참여사회 2013년 03월 2013-03-08   2547

[특집] 인간의 조건 – YOUNG-OLD한 삶을 위하여

인간의 조건

YOUNG-OLD한 삶을 위하여 

*young-old 노인이지만 젊어 보이는 

 

이영구 참여연대 운영위원

일러스트 황진주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아마 회원 가운데 나이 든 사람이 많지 않아 나에게 부탁을 한 것 같다. 나는 글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글을 쓸 엄두가 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젊은 활동가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쉽지 않다. 그저 독자분들께서 이 글을 넋두리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그럼 건강한 삶을 살고 싶은 81세 노인의 있는 그대로의 사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한다. 

 

 

1. 새벽에 신문 읽기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새벽잠이 없어진 덕에 신문과 함께 새날을 시작하기 좋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새로운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의 사고는 항상 젊어지는 기분이다. 물론 신문 기사 가운데 분노할 일도 많지만, 어려움 속에서 훌륭한 일을 한 분들, 함께 나누며 옳은 삶을 사는 분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뭉클한 감동으로 시작하는 하루라니, 얼마나 활기찬가? 

혹 누군가 수십 년 동안 신문을 읽어왔는데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나의 사람됨은 어떻든 간에 하루하루 신문 읽기로 쌓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 오늘의 내가 아닌 내일의 나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사회』 2월호에서 얘기한 ‘시민의 공부’를 아침 신문 읽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떤가.  

 

 

2. 무임승차 지하철

 

많은 노인들의 교통수단은 주로 지하철이다. 무임승차에 시간 약속 지키기도 좋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물론 러시아워는 피하는 게 좋다. 지하철을 탈 때, 나도 자리를 양보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양보해주면 양보해주는 대로 고맙게 받지만 양보하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아직 젊게 보아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65세가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하철 무임승차권과 함께 당시 교통비 8,000원을 매월 지급해주었다. 나는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당시 지하철 1회 승차권 600원과 지급받은 교통비 8,000원을 더해 시민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1세인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혜택 받은 걸로 기부하니 부끄럽지만, 연말에 기부한 단체에서 고맙다는 메시지가 올 때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65세가 되고부터 나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준 무임승차 혜택에 고맙다고 생각한다. 

 

 

3. 기부를 말하다

 

기부란 어려운 형편 속에서 할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15년 전, 나는 분수에 맞지 않는 기부를 한 적이 있는데 지금 그 액수의 10배를 기부한다 해도 그때의 감동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기부는 액수가 크든 작든 한번 해보면 그 행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작은 것부터라도 경험해 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부를 주변에 자랑해보길 권한다. 

나의 기부 얘기를 듣고 다섯 사람이 1천만 원씩 기부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다섯 분께 감사하면서 아직 나에게 그런 젊은이를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에 기뻤다. 2년 전 참여연대 MT에서 알게 된 원종아 회원에게 기부하는 행복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는데, 얼마 후 그 회원이 천만 원을 기부하여 희망제작소의 천만 원 기부자 커뮤니티 천사클럽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2월 2일에는 희망제작소 산악회에서 청계산 다녀오는 길에 내가 넘어져 응급실에서 세 바늘을 꿰매는 치료를 받았다. 그때 산행을 함께 갔던 사람들이 문병을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원종아 회원의 동생이 또 천사클럽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부 동기가 눈 사이, 코, 그리고 코 밑에 세 바늘 꿰매어 큰 부상을 당한 사람 같아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저런 나이든 분도 열심히 다니고 참여하는데 하고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스스로가 그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모습이 그런 행동의 동기가 되었다고 하니 감동적이고 행복한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물론 평소 생각하던 것을 실천하는 작은 동기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이제 옛날 이야기다. 자꾸 기부 사례를 발표해서 국민 모두가 기부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돈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나눔’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나눌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타인과 얼마나 나누며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생의 마지막 길에서도 최고의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4. 늙은이의 공부

 

자랑 같지만, 공부는 수준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례가 있다. 나는 68세에 영어 공부를 처음 시작하였다. 구 문화원에서 주 1회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이 영어 글을 해석해주기 때문에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되니까 부담은 없다. 알고는 싶은데 모르는 것은 많아 나는 질문이 많은 편이다. 함께 공부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니 다들 이해해준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 공부가 벌써 12년 째, 결석은 누님이 돌아가셨을 때 딱 한 번이었다. 

사실 나는 고1 때 한국전쟁이 나는 바람에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게다가 해방 후의 영어 교육 수준은 지금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로서는 영어 공부가 영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공부는 내게 남다른 의미를 준다. 첫째, 한가할 시간이 없다. 언제나 바쁘다. 둘째, 돈 쓸 일이 적다. 셋째,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준다. 넷째, 지나치면 안 되지만 자긍심이 생긴다. 다섯째, 희망을 갖게 된다. 매번 악전고투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다른 분들과의 실력 차이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할 수 있다. 시간은 노인의 편이다. 

앞으로 건강한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한국 소설, 일본어 소설, 영어 소설을 한 권씩 배낭에 넣고 시골길 여행을 해보고 싶다. 너무 큰 꿈인가? 하지만 그런 희망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젊게 사는 늙은이, ‘YOUNG-OLD’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희망은 나를 젊게 한다. 꿈이 없는 젊은이야말로 ‘늙은이’이고 꿈이 있다면 늙은이도 ‘젊은이’가 될 수 있다. 

 

 

5. 빈자리 채우기

 

요새는 무료로 제공되는 영화나 전시회, 강연회도 많지만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사회 참여’이다. 물론 집회나 모임에 참여해도 늙은이가 특별히 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모임은 그저 자릿수만 채워도 파급 효과가 남다르다. 무엇보다 어려운 여건에서 집회를 여는 분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대 김진균 교수님도 생전에 집회에 정말 많이 참석하셨다. 언제나 멀찍이 뒤에 서 계셨지만, 그 분의 참여는 분명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이것을 ‘빈자리 채우기’ 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대우가 정말 극진하다. 나는 그런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미래가 희망으로 보이고,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니 건강하고 시간이 있다면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해보기를 권한다. ‘빈자리 채우기’를 통해 젊은이들은 힘을 얻고, 나이 든 사람은 젊음의 기를 받을 수 있다. 

 

 

부탁 한 가지

 

마지막으로 시민단체 활동가 여러분께 늙은이가 부탁을 하나 하고 싶다. 박원순 시장이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을 때 일이다. 한 번은 원순 씨를 만나서 몇 가지 의견을 말했는데 그는 내 의견을 작은 수첩에 깨알 같이 받아 썼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참여연대에서 만난 원순 씨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아직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10여 년 전 원순 씨의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니 활동가 여러분도 회원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소홀히 하지 마시고 계속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어려운 일은 있게 마련이다. 나도 그렇다. 다만 즐거운 일을 만들어 어려운 일을 이기는 것이 의미있는 길이다. 나의 삶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영구 1950년 18세에 입대하여 1976년 중령으로 전역했습니다. 이것저것 여러 직업을 옮겼고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지금은 참여연대 운영위원, 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그리고 희망제작소 천사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 참여사회 2013. 3월호 [특집] 인간의 조건
김 대리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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