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6년 07-08월 2026-07-01   251

[미술관에 간 페미니즘] 플라우틸라 넬리 : 최후의 만찬을 그린 최초의 여성

가브리엘-에밀리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일, 마르키즈 뒤 샤틀레의 초상화
성인들과 함께 한 애도, 16세기

수녀원은 여성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산실

유럽의 마녀사냥을 중세에 한정해서 벌어진 사건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녀사냥은 무려 근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14세기 백년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르네상스 시대에 활발히 자행됐고, 무려 근대로 분류되는 18세기까지 이어졌다. 파리에서 첫 마녀재판은 1390년대에 일어났고 여성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린치가 아니라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재판이다.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마녀로 처형당했다.

르네상스 시기 여성들은 중세 시대에 다양하게 참여하던 직업군에서 오히려 한계가 생겼다. 더욱 견고해진 남성 중심의 길드는 점차 여성을 결혼 후 가정에만 충실하도록 만들었다. 미술은 인문학이며 공적인 활동이자 남성의 활동으로 재구성되었다. 국가의 통합과 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작되던 르네상스가 여성들에게는 봉건주의에서 그들이 누렸던 실제적인 힘조차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수녀원의 축소는 여성들의 삶에 선택지를 더욱 줄어들게 했다. 중세 시대에 일부 계층의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고 수녀원을 통해 다양한 역량을 발휘하며 예술가와 지식인으로 살 수도 있었다. 물론 본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결혼 비용을 들이기 싫은 부모의 선택인 경우도 많지만 수녀원은 여성들에게 가정에 갇힌 아내, 엄마가 아닌 삶을 살게 해줬다. 또한 여성들끼리 모여 있기에 그들의 관계를 통해 여러 종류의 창작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로 수녀원은 이러한 기능을 점점 상실했지만 여전히 결혼 제도 바깥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 종교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플라우틸라 넬리Plautilla Nelli, 1524~1588이다. 16세기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조르지오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등장하는 여성예술가들 중 한 명이다. 물론 바사리는 여성 예술가들을 남성 예술가들처럼 제대로 지면을 할애해서 다루지 않고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플라우틸라 넬리는 피렌체에서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여성 화가이다. 비슷한 시기 수녀원 바깥에는 소포니스바 안귀솔라가 스페인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다면 넬리는 수녀 신분으로 종교화를 그린 여성이다. 풀리세나 마르게리타 넬리Pulisena Margherita Nelli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고 그때부터 ‘플라우틸라’라는 수녀명으로 활동했다. 이후 수도원 원장까지 지내며 50년간 수녀이며 화가로 살았다.

넬리는 수녀원에서 여성들이 교육받으며 지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흔히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하지만 넬리가 독학으로라도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환경을 간과할 수는 없다. 넬리가 속한 수도원은 유명한 종교개혁가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사보나롤라는 여성 수도자들이 신앙심을 기르는 방식으로 그림 그리기를 장려했으며 이 수도원은 여성 예술가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넬리는 미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조프랭 부인의 초상화
최후의 만찬, 1550년 경

또다른 〈최후의 만찬〉

제도권에서 미술 교육을 받기 어려운 여성들은 실제 모델을 보며 공부할 수 없었기에 넬리는 당시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예술적 기량을 키웠다. 수녀였던 만큼 종교적 성격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종교화에서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슬픔, 애도, 신앙적 열정을 매우 잘 묘사했다고 평가받는다.

몇몇 드로잉과 함께 남아있는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종교화이다. 이 중에서 〈성인들과 함께 한 애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둘러싼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인물들 하나하나를 잘 표현했지만 특히 왼쪽 하단에 예수의 몸을 붙들고 있는 여성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슬픈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처럼 종교적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넬리는 여성들에게 권장되지 않았던 대형 회화도 시도했다.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성경 내용은 여성 화가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시대에 그는 ‘최후의 만찬’에 도전했다.

그는 알려진 화가 중에서는 여성 최초로 〈최후의 만찬〉을 완성한 사람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 비교해서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넬리의 〈최후의 만찬〉은 길이 약 7미터에 달하는 대형 작품이다. 16세기 피렌체의 남성 거장들과 나란히 평가될 만한 대작으로 여겨진다. 〈최후의 만찬〉이 중요하게 남은 이유는 당시 여성 화가들에게는 매우 드물게 대형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과 함께 넬리가 직접 서명한 유일한 현존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수 세기 동안 잊혀졌다가 복원 작업을 거쳐 2019년 피렌체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현재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걸려있다.

수 세기 동안 플라우틸라 넬리의 이름은 미술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넬리의 서명이 남아있지 않은 작품이 많은 탓도 있지만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르네상스 시대 여성 화가는 오랜 세월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모두 남성으로 기억된다. 수 세기가 지난 후 여성 예술가 재조명 연구가 진행되면서 넬리는 르네상스 시대 여성 화가의 선구자로 다시 평가받았다. 바사리는 당시 피렌체 귀족들의 집에 넬리의 그림이 많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는 넬리가 당대에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또한 여전히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그의 작품이 많을지도 모른다.

〈최후의 만찬〉은 오늘날 넬리의 대표작이 되었고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플라우틸라 넬리는 피렌체 최초의 여성 화가일뿐만 아니라 최초의 대형 종교화를 남긴 화가로, 오늘날 미술사에서 여러 종류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중요한 화가로 남았다.


이라영 문화평론가의 프로필 사진.

이라영 문화평론가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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