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6년 07-08월 2026-07-01   357

[이슈] 갈라파고스에 갇힌 소비자의 권리

: OECD 수준의 소비자권익 3법이 필요하다

Juliana Romão, unsplash

들어가며 : 끝나지 않는 피해, 달라지지 않는 구조

사람이 죽고, 불이 나고, 개인정보가 새도, 기업의 대답은 늘 똑같다. “법적 책임이 없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자동차 화재 결함 은폐,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기업이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에 치명적 피해를 입힌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기업들은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라는 말로 책임 회피를 반복한다. 고통은 온전히 소비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토록 무책임한 기업에 대응하는 소비자의 수단은 과연 불매운동뿐인가? 불매운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지만, 효과는 일시적이거나 가맹점주 같은 무고한 제3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한계를 지닌다. 현행 구제 제도의 한계를 정면으로 짚고, 소비자와 기업이 대등하게 맞설 구조를 만들어야 할 때다.

현행 소비자 피해 구제 제도의 민낯

민법 제750조는 불법행위 손해배상 책임을 규정하지만,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의 과실과 손해 간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구조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현대 제조물·서비스를 고려하면, 이 구조는 소비자에게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현행 제도에는 세 가지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 있다.

첫째, 정보의 극심한 비대칭성이다. 결함이나 설계 오류를 증명할 핵심 데이터와 내부 문서는 모두 기업의 서버와 지배하에 있다. 소비자는 원인도 모른 채 피해를 보고도 증거가 없어 소송을 시작조차 못 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수년간 기업 내부 연구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둘째, 배상액의 구조적 한계다. 우리 사법부는 실제 발생한 손해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 ‘전보배상 원칙’을 고수해 왔다. 기업의 위법 행위로 소비자가 1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면 기업은 딱 1만 원만 돌려주면 된다. 소송을 제기하는 데 드는 시간·노력·변호사 비용이 배상액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합리적 포기’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기업은 이 구조를 이미 알고 있다.

셋째, 행정 제재의 한계다. 시정명령·과징금 처분은 국가에 내는 공법적 제재일 뿐, 피해 소비자에게 직접 금전이 돌아가지 않는다. 법이 묻지 않으면, 기업은 답하지 않는다. 한국소비자원 분쟁조정(소비자기본법 제60조) 역시 한쪽이 거부하면 강제력이 없다.

증거는 기업의 금고 안에 있고, 책임은 소비자의 어깨 위에 있다. 현재의 법적 환경은 기업에게 ‘버티는 게 이득’이라는 왜곡된 유인을 제공한다.

소비자권익 3법 : 대등한 싸움을 위한 세 가지 무기

소비자 권익을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적어도 평평한 운동장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학계·법조계·시민사회가 오랜 기간 요구해 온 ‘소비자권익 3법’(집단소송법·징벌적 손해배상법·증거개시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집단소송법 : 숫자가 곧 권리다. 현행 소비자단체소송(소비자기본법 제70조)은 기업의 위법 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청구하는 소송일 뿐, 소비자가 입은 금전적 손해를 직접 배상받는 소송이 아니다. 금융 분야에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이 존재하지만, 적용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며, 그마저도 사실상 6심제로 운영되어 평균 약 10년이 걸리는 실정이다.

집단소송법은 피해자 일부가 대표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직접 참여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도 별도 소송 없이 판결의 효력을 누려 배상받는 제도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이 ‘소송할 테면 해보라’며 배짱부리는 행태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불매운동은 분노를 표현하지만, 집단소송은 책임을 강제한다.

집단소송법은 ‘소비자 보호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이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한, 기업은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수많은 소비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없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언제나 사고를 낼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시장에서 모든 기업은 결국 과속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법적 브레이크 없는 시장에서 기업은 언제나 소비자를 희생시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유혹에 노출된다.

징벌적 손해배상법 : 범죄가 이익이 되어선 안 된다. 현행 제조물책임법 제3조 제2항 등 일부 법률에 고의·중과실에 대해 3배에서 5배까지 징벌적 배상 규정이 도입되어 있으나, 적용 요건이 매우 까다롭고 법원의 인정 금액도 보수적이라 징벌적 효과가 미미하다. 기업들은 실무에서 이를 사실상 무시한다. 소송할 테면 해보라는 기업의 자신감은 사실 소비자의 무력함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다.

징벌적 손해배상법은 기업이 악의적으로 위법 행위를 하거나 안전을 무시했을 때, 실제 손해를 훨씬 뛰어넘는 형벌적 금액을 배상하게 하는 제도다. ‘위법으로 얻는 이익’보다 ‘치러야 할 대가’를 압도적으로 크게 만들어 안전 투자를 소홀히 하거나 결함을 은폐하는 사태를 예방한다.

경제학적으로 표현하면, 전보배상 원칙 아래 기업은 ‘피해 발생 확률 × 배상액’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배상액이 작다면 위험한 선택도 손해가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법은 이 등식을 뒤집어 위법이 드러나면 상상 이상의 재정적 충격을 감수해야 하므로 처음부터 안전에 투자하는 편이 이익이 되게 만든다.

증거개시법 : 정보 불평등이 곧 법적 불평등이다. 아무리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이 도입되더라도, 기업의 잘못을 입증할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이다. 미국 등의 증거개시제는 재판 전 소송 당사자들이 서로의 증거와 서류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 제도(제344조)가 있지만, 기업이 ‘영업비밀’이나 ‘존재하지 않는다’며 공개를 거부하면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기업의 침묵은 무죄의 증거가 아니다. 증거개시제가 도입되면 핵심 증거를 은폐·파기할 경우 즉시 패소의 위험이 발생한다.

최근 상용화가 한창인 자율주행 자동차 사고 사례를 떠올려 보자. 자율주행 중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이 AI 알고리즘의 오류인지, 센서의 결함인지, 혹은 일시적인 네트워크 지연 때문인지 일반 소비자가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관련 주행 로그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내역은 모두 자동차 제조사의 중앙 서버에 암호화된 채 독점되어 있다. 현행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에서 소비자의 입증 책임을 일부 완화하고는 있으나, 이 역시 정상적인 사용 상태였음을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므로 거대 첨단 기술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증거개시제가 도입되면 핵심 증거를 은폐·파기할 경우 즉시 패소의 위험이 발생한다. 재판 전 제조사에 시스템 로그와 알고리즘 로직 제출을 강제할 수 있어 정보 불평등을 실효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반론에 답한다 : 오해와 진실

경제계는 소비자권익 3법이 소송 남발과 기업 파산 위험을 키울 것이라며 강하게 저항한다. 그러나 이는 제도 설계와 사법부 필터링 기능을 간과한 과도한 기우다.

반론➀ 소송 남발로 기업 활동이 마비된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ʻ패소자 부담 원칙’이 확립되어 있어, 증거 부실한 블랙컨슈머 소송은 변호사들이 수임을 꺼린다. 법원이 소 제기 단계에서 집단소송 요건을 심사하는 ‘소송 허가 절차’를 두면 근거 없는 기획 소송도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

소송 남발은 오히려 지금이 더 크다. 쿠팡의 개인정보유출과 관련된 사건만 봐도 그렇다. 전국의 주요 법원에서 수백 건, 수천 건에 달하는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소비자 1인이 받을 수 있는 위자료가 10만 원 정도에 불과함에도, 이를 구제받으려면 수만 명의 피해자가 각자 인지대와 송달료를 내고 개별 소장을 접수해야 한다. 그 결과, 전국의 법원은 동일한 쟁점의 재판을 수천 건씩 중복으로 심리하느라 막대한 국가적·사법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집단소송으로 해결될 문제를 쪼개서 진행하는 셈이다. 잘못은 기업이 했는데 왜 사회가 그 책임 추궁을 위한 비용을 전국 방방곡곡에서 부담해야 하는가? 지금은 한 기업의 잘못에 대한 비용과 소송 부담을 전국의 소비자, 검찰, 법원, 그리고 정부가 지고 있는 셈이다.

반론➁ 과도한 배상액으로 기업이 파산하고 경제가 무너진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소송은 잘못 없는 기업을 타깃으로 하지 않는다. 결함을 알고도 은폐했거나, 유해 성분을 인지하고도 이윤을 위해 묵인한 악의적 기업만을 징벌한다. 사법부가 기업을 무조건 파산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경제계의 우려는 우리 법원의 재판 절차와 역량을 간과한 억측에 가깝다. 법원이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산정할 때는 가해 기업의 재산 상태와 결함 시정 노력, 위법 행위의 기간 및 이를 통해 취득한 경제적 이익의 규모 등을 법률에 따라 종합적으로 심리하여 조절한다. 즉, 제도의 본질은 악의적 범죄에 상응하는 ‘징벌과 재발 방지’에 있지 기업을 도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진짜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부도덕한 소수 기업의 위법 행위를 방치해 시장 전체의 신뢰를 붕괴시키는 일이다. 소비자 안전을 도외시하여 시장 생태계를 교란하고 성실한 대다수 기업에까지 타격을 입히는 기업이 있다면, 사법적 단죄를 통해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거나 퇴출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건전성과 투명성을 지키는 올바른 방향이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의 부재로 안전에 투자하는 정직한 기업이 손해를 보고, 위법을 저지르는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갖는 시장 왜곡이 발생한다. 소비자권익 3법은 부도덕한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하고 정당한 기업을 보호함으로써 한국 기업의 글로벌 품질 경쟁력과 신뢰도를 높이는 기반이 된다.

왜 지금 필요한가 : 입법 지연 대가를 누가 부담하나?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10년 넘게 개별 소송으로 지친 사이,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의 미국 소비자들은 집단소송으로 천문학적 배상을 받았다. 입법 지체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 피해로 환산된다. 피해자는 셀 수 있지만, 책임은 셀 수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결국 사고를 낸다. 마찬가지로 소비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사법적 브레이크 없는 시장은 반드시 반복적인 피해를 낳는다. 집단소송법은 단순한 소송 수단이 아니라 시장이 과속할 때 작동하는 안전 브레이크다. 이 브레이크가 작동할 때, 기업은 처음부터 소비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설계한다. 소비자의 집단적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기업 스스로 ‘이 속도면 멈춰야 한다’는 신호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논의가 아니라 입법이다.

또한 법이 만들어지는 방식도 돌아봐야 한다. 피해자보다 기업 로비스트의 목소리가 입법 과정을 압도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다. 집단소송법이 상정될 때마다 경제계 반대 로비로 좌절되어 온 20여 년의 역사는, 입법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법은 강자에게 관용을, 약자에게 인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소비자권익 3법의 도입은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왜곡된 시장의 저울추를 바로잡고,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면 존립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소비자에게 인정받아야만 기업은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한경수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

법무법인 위민 대표변호사이자 공정거래법 전문변호사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우리 시장의 공정성과 소비자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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