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999년 04월 1999-04-01   1284

OECD 가입후 한국 떠나는 독일재단

회원 늘려 우리 돈으로 여성운동 지킨다

한국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독일이 책임진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이 많을 듯하다. 하지만 이 말을 가볍게 흘려 넘겨선 곤란하다. 실제로 한국 여성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주요 단체들은 30∼50% 정도의 재정을 독일재단들로부터 지원받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재단의 지원은 여성단체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는 단비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셈.

하지만 독일재단 지원이 올해 하반기부터 중단될 예정이라 여성단체들은 이 30∼50%의 재정을 어디에서 충당해야 할 지 걱정스럽다. 한국이 지난 96년말 OECD에 가입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이유로 제3세계 NGO를 지원하는 독일재단들이 대부분 철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단체들은 그동안 독일재단에 대한 재정 의존율이 높았던 만큼 그 공백과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보고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지은희·신혜수·이경숙)은 90년대초부터 독일 EZE재단의 지원을 받아왔다. 기독교재단인 EZE재단은 제3세계 기독교운동 및 여성단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곳.

EZE재단의 지원 규모는 상당하다. 현재 여연 전체 사업비의 50% 가량을 차지하는 덩치다. 3년 단위로 지원여부 및 지원비율을 결정하는데, 비율은 여연 전체사업비 가운데 EZE재단이 맡을 부분과 여연이 충당해야 할 부분을 나누는 형식이다. EZE재단이 지원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크게 고려하는 잣대는, 50%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나머지 50%를 그 단체가 국내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지의 여부다. EZE재단은 단체로부터 ‘50%를 충실히 마련해 내겠다’는 약속을 받아 계약을 체결하고, 6개월마다 사업보고서와 결산보고서를 통해 단체가 그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 지 꼼꼼히 점검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최영애)도 EZE재단과 교류하고 있다. 지난 94년부터 96년, 97년부터 올해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지원을 받았는데 여연과 마찬가지로 지원은 올해로 끝이 난다. EZE재단 지원이 상담소 전체 재정 가운데 약 30% 가량을 차지했기 때문에 내년부터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됐다. 재정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수를 떠올려내진 못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회장 신혜수)은 독일 HBF재단(녹색당 계열)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HBF재단도 제3세계 국가의 NGO들을 지원하는 곳. 3년마다 지원을 체결하는데, 98년부터 2000년 12월까지 지원약속을 받아놓은 상태. 여연이나 성폭력상담소보다는 1년 정도 여유가 있긴 하지만 재정자립을 위한 고민은 마찬가지. 여성의전화는 HBF재단의 지원으로 서울·부산·전주에 있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여성의전화 전체 예산의 50%에 해당하는 규모다.

OECD 가입 후 한국 떠나는 독일재단

독일재단들이 이렇듯 한국 여성단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상당한 재정적 뒷받침을 해왔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하면서 제3세계 NGO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재단이 더 이상 한국 시민단체를 지원할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

따라서 여성단체들은 심각한 위기에 부닥쳤다. 여연에선 “독일재단의 지원이 당장 끊기는 올해 하반기부터 달마다 사업비를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여성단체들이 자립적으로 안정적인 재정구조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더욱 피부로 절감하게 된 것. 독일재단의 철수는 엄청난 부담과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여성단체 실무자들의 고민은 ‘모금운동 전략 마련’으로 모아지고 있다.

지난 96년 한국정부가 OECD에 가입하면서 독일재단 지원이 끊길 위기를 예고하자 여성운동의 열악한 재정상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성단체들이 독일재단의 지원을 통해 활동을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운동을 책임지지 못하고 외국지원으로 꾸려가다니 비참하다”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여성단체 실무자들은 “시민들의 이런 안타까움과 문제의식을 여성운동의 지지와 참여로 이끌면 우리 힘으로 재정자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여성운동도 여성대중과 함께 하는 운동을 고민하고 이 과정에서 재정 자립도를 완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성단체들은 올해 하반기부터 대대적인 모금사업에 돌입할 예정.

여연은 12년 동안 운동을 벌이면서 그 운동의 성과가 여성 개개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고, 끼치게 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나서 홍보한 적은 없다. 여성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어떤 법이 바뀌어야 하는지, 생활에서 어떤 법을 활용할 수 있는지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는 짐짓 소홀했던 게 사실.

여연 김명륜 기획부장은 “이제는 여성운동의 결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알리고 확산시켜 여성대중들이 ‘내 딸이 더 나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여성운동을 지지하고 기부할 수 있는 풍토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일재단이 한국 여성운동을 지원했던 것을 알리고, 그들이 우리 운동에 기여할 역할을 소개하면서, 이제는 한국 시민·여성의 힘으로 우리 운동을 살찌우자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호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 그는 “여연이 구상하는 모금운동은 회원단체와의 적극적인 연계 속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연은 대대적인 모금운동에 앞서 오는 4월 회원단체의 모금사업 담당자를 모아 ‘비영리기구 모금전략 워크숍’을 진행할 계획. 영국 비영리기구 모금사업 담당기구인 IFRG(International Fundraising Group)의 담당자를 초청, 모금전략을 위한 방법론을 검토하고 우리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다.

외국의 경우 모금운동의 기본윤리·방향 등 구체적인 방법론이 자리잡혀 있다. 마케팅을 위한 시장조사방법론부터 대상파악방법론, 요청·재요청 및 지속적인 요청 원칙, 편지쓰기, 광고, 친절훈련, 연락을 통한 인간관리 등이 체계적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

여성단체 실무자들은 해외 시민단체들이 일상적인 모금운동을 하고 있음을 경험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운동에 적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넓혀왔다. 하지만 현재 여성단체들은 인력과 재정의 어려움 속에 전담 실무자를 배치해 전문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했었다. 따라서 환경운동연합이 재정담당 간사를 두어 일상적인 재정사업을 벌이고 성과를 거두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여연 김명륜 기획부장은 “앞으로 재정담당 간사를 배치해 집중적인 고민과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라며 “회원배가운동을 비롯해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기꺼이 기부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말한다. 여성운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 확립에 주력하겠다는 뜻.

시민단체들의 재정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간 몇억 원의 적자에 시달리는 시민단체가 있는가 하면 상근간사 월급을 몇달째 못 주는 곳도 있다. “재정난 해결 없이 시민운동 발전 힘들다”는 말은 모든 단체들이 수긍하는 얘기.

여성단체 실무자들도 “우리도 정부나 재단 지원 안 받고 스스로 사업을 통해 자립할 수 있길 원한다”고 입을 모은다. 회원을 확대하고 조직을 강화해야 하는 게 원칙적으로 옳지만 여성운동은 그것이 여러 가지로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여성운동의 회원확보는 운동의 대중성과 직결되는 사안. 하지만 성폭력 등 여성관련 사안은 극히 제한적인 사람들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를 확산시켜 나가기가 쉽지 않다.

기업 정부 등의 각종 프로젝트와 후원 협찬 등도 여성단체에겐 ‘그림의 떡’일 때가 많다. 각 분야에서 여성 주류화가 미진하다보니 기존 단체의 10배 이상 노력해도 뒤쳐지기 일쑤.

현재 여성단체가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은 지난 96년 설립된 ‘여성발전기금’. 정부가 출연한 기금의 이자를 가지고 여성단체를 지원하는데 그 관리는 여성특별위원회가 맡고 있다. 지자체엔 여성관련 기금 설치가 권고사항일 뿐이라 서울시를 비롯해 몇군데만 있는 상태다.

“독일재단 지원이 끊기면 사업이 축소되거나 위축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운동의 목표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생각해 볼 때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NGO의 매력이 그런 게 아닐까요?” 한 여성단체 실무자가 밝히는 각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약진하려는 여성단체의 노력을 독려하며 이제 한국시민과 여성이 전폭적으로 우리 운동을 지지하고 동참해야 할 때가 아닐까.

서정은 『시민의 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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