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호] 2부 좌표 1_모두를 위한 나라는 어떻게 가능한가?: 공화국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

1. 공화국의 이념

대한민국 헌법 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건국 이후 여러 번의 헌법개정이 있었지만 한국의 국체를 규정한 이 조항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 조항은 한국사회에서 자명하고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공화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민주’라는 용어에 관해서 보자면, 이 개념이 우리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이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수십 년 동안의 반독재투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제는 어느 정도 체득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라는 데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 실질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개념 역시 우리의 정치적 전통 속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서양적 개념을 번역한 것이므로 우리에겐 지극히 낯선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현대사의 진행 속에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대접받은 것도 아니고,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싸운 것도 아니다. 반독재투쟁의 역사 속에서 나부낀 깃발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민족해방의 대의였지 공화국의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화국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전통역사 속에서 배운 적도 없고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체험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1) 공화국에 대한 아무런 역사적 체험도 없는 상황에서 관념적인 방식으로나마 공화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해준 사람이 홍세화이다. 그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 비평사, 1995) 이후 일련의 저작들 속에서 프랑스사회에서 공화국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줌으로써 한국사회에서 공화주의의 결여를 깨닫게 해주었다.

헌법을 다루는 법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들 역시 공화국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더러는 공화국을 군주국의 반대개념으로 단순화시켜 설명하기도 하고2) 이를테면 김철수, <헌법학개론>, 박영사, 2005, 127쪽. 더러는 공화국의 내용을 장황하게 열거하기도 하지만,3) 권영성은 <헌법학원론>(법문사, 2005, 114쪽)에서 민주공화국의 공화국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이라 함은 비군주국가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유국가·국민국가·반독재국가라는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 헌법의 공화국조항은 소극적으로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체주의적 내지 독재적 국가형태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고, 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질서가 자유국가적·국민국가적 질서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공화국과 민주국가 사이에 특별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권영성은 현실적으로 민주공화국이 아닌 공화국도 있으므로 공화국을 민주국가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헌법 1조 1항의 공화국조항을 그 자체로서 설명하지 않고 민주공화국으로 뭉뚱그려, 그 조항이 “우리나라의 국가적 형태가 전제·독재·전체주의·인민공화국 등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적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같은 곳). 결과적으로 공화국이란 그 자체로서 이해되기보다는 민주국가라는 이름에 내용 없이 부착된 장식물처럼 보인다. 어떤 경우이든 공화국이 단순히 민주국가와 그 내실에 있어서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법학자들조차 아는 시늉을 낼 뿐 실제로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공화국을 일반시민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이런 사정이 법학자들의 무지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화국의 개념 자체가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이 변해왔기 때문에 그 개념에 대해 고정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화국이란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는 말의 번역어이다. 이 말을 영어로 직역하면 public thing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서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기말로 옮기기보다는 저 말을 아예 한 낱말로 만들어―republic, Republik, republique 등―자기들의 언어로 받아들였다. 아마도 그것은 저 말을 자기말로 옮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레스 푸블리카란 말은 공공적인 일 또는 공동체라는 말로서 사사로운 일(res privata)에 대립되는 말이다.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말은 인민을 뜻하는 포풀루스(populus)라는 명사에서 비롯된 형용사이다. 그러니까 공화국이란 그 어원에서 보자면 인민의 일이요, 인민의 공동체, 함석헌의 표현으로 하자면 씨ㆍ공동체라 할 수 있겠다. 그리스인들은 레스 푸블리카와 레스 프리바타를 구별하기 위해 폴리스(polis)와 오이코스(oikos)라는 표현을 썼는데, 단순하게 말해 폴리스는 국가이고 오이코스는 가정이었다. 비슷하게 로마인들의 경우에도 레스 푸블리카는 국가공동체 또는 국가의 일로서 가정일과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스 푸블리카의 고전적인 정의는 키케로의 같은 제목의 책(Res publica)에서 볼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공화국이란 인민의 일로서, 인민이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집단이 아니라 법(또는 정의)에 대한 합의와 공동의 이익에 의해 결속된 다중의 공동체를 일컫는다.”4) M. T. Cicero, Res publica, I 25;39. Est igitur…res publica res populi, populus autem non omnis hominum coetus quoquo modo congregatus, sed coetus multitudinis iuris consensu et utilitatis communione sociatus. 그러니까 공화국이란 가장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그 정치체제가 어떠하냐와 관계없이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법에 의해 결속된 인민공동체(coetus populi)로서의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를 때 공화국에서 배제되는 첫번째 정치체제는 폭군(tyrannus)이 지배하는 독재국가인데,5) 같은 책, III, 31;43. Ergo ubi tyrannus est, ibi non vitiosam ut heri dicebam, sed, ut nunc ratio cogit, dicendum est plane nullam esse rem publicam. 그러므로 폭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우리가 어제 말했던 것처럼 나쁜 공화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성이 명하는 것처럼 공화국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독재국가에서는 독재자 또는 전제군주의 자의가 법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서양 고대사회에서는 폭군의 독재국가를 제외한다면 원칙적으로 모든 정치체제가 공화국의 범주에 포섭되었다. 그리스인들의 경우에 폴리스의 여러 형태 가운데 왕정(basileia)과 귀족정(aristokratia) 그리고 민주정(demokratia)이 모두 포함되었는데, 마찬가지로 로마인들 역시 공화국의 테두리 속에 저 세 가지 정치체제가 다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정시대 이후에는 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로마공화정과 구분하기 위하여, 공화국을 황제국가 곧 군주국의 대립개념으로 쓰기도 했으니, 이미 이때부터 공화국의 개념 속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들어 있었던 셈이다. 즉 한편에서 그것은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된 모든 종류의 법치국가를 의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단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황제나라나 임금나라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이후 중세에 와서 공화국은 다시 국가 일반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화국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데, 하나는 다소 포괄적인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엄밀한 규정이다. 포괄적으로 보자면 크든 작든 공적인 일에 대하여 통치권(imperia)을 가진 모든 민족들의 국가가 다 공화국이라 불릴 수 있다.6) A. Augustinus, De Civitate Dei, 19;24. 그의 다른 정의에 따르면,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합의된 공통성에 의해 결속된, 이성적 대중의 모든 공동체”(qualiscumque rationalis multitudinis coetus, rerum quas diligit concordi communione sociatus)가 공화국이라 불릴 수 있다.7) 같은 곳. 번역문은 성염 교수의 번역서에 따름(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신국론>, 분도출판사, 2004, 2243쪽). 이 경우 공화국은 임금나라에 반대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굳이 법치국가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공화국을 법치국가라고 이해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키케로가 말했던 법에 대한 합의(iuris consensus)라는 공화국의 요건에서 법을 실정법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상적인 정의(正義)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교도국가에서 정의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므로, 공동의 정의에 입각한 나라가 공화국이라면, 어떤 세속적 국가도 공화국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게 된다.8) 같은 책, 19;21. 정의는 오직 기독교국가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좁은 의미 또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된 공화국의 개념이다.

물론 이런 식의 기독교근본주의는 곧 수정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세속적 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Papa Gregorius I)는 공화국을 다른 종류의 나라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뭇 민족의 왕들과 공화국의 지배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뭇 민족의 왕들은 노예들의 지배자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통치자들은 자유인들의 지배자인 것이다.”9) J. Ritter, K. Gründer hrsg.,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8, S. 859. Hoc inter reges gentium et reipublicae imperatores distat, quod reges gentium domini servorum sunt, imperatores vero reipublicae domini liberorum. 이렇게 하여 이제 공화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했던 폴리스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에 따르면 “폴리스란 시민들의 공동체이다.”10) Aristoteles, Politica, 1275 a 1. 쉽게 말해 그것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들의 공동체인바, 자유인들의 공동체는 지배자의 자의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규정된 법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이다. 이리하여 인민을 노예상태에서 지배하는 모든 야만적인 전제국가를 제외한 법치국가가 공화국으로 규정되었다.

공화국의 개념에 대한 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공화국의 개념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한편에서는 정치체제와 무관하게 자유시민들의 공동체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황제나라나 임금나라에 반대되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N. Machiavelli)는 “인류를 지배했거나 지배해온 모든 국가나 통치권력은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라”고 구분하면서, 공화국을 군주국가의 반대개념으로 규정했다.11) 마키아벨리, 백상건 옮김, <군주론>, 박영사, 1985, 28쪽. 이에 반해 루소(J. J. Rousseau)는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떠한 정부형태를 취하든지간에,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국가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국가가 법률에 따라 지배될 경우에만, 공공의 이익이 우위를 차지하고 공공의 것이 중요성을 지닐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정부는 모두 공화적이다.”12) 루소, 이태일 옮김, <사회계약론>, 범우사, 1994, 55쪽.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공화적이라는 말을 귀족정이나 민주정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법률인 일반의지의 지도를 받는 모든 정부로 이해하고 있다”13) 같은 곳.고 다시 한번 명확하게 부연하고 있다. 루소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입법권과 집행권(곧 통치권)을 구분했기 때문인데, 그는 입법권을 인민에게 귀속시키고 집행권을 인민의 대리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누가 인민의 대리인 노릇을 하느냐는 그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리인이 인민이 제정한 법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그가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국가권력의 집행자가 한 사람이냐 소수냐 아니면 다수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14) 개인적으로 루소는 통치자가 소수인 귀족정을 선호했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계약론>(3장 5절) 참조. “요컨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해서 정치를 한다는 것만 보장되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 가장 좋고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다.”(이태일 옮김, <사회계약론>, 92쪽) 그러나 루소가 말하는 민주정이란 직접민주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가 말한 귀족정이란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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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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