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의 과제를 요약하라면 '변화와 발전'이라는 두 개념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발전 이 목표라면 변화는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혁신 없는 발전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구태여 김대중 대통령님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만이 변화를 이끌 인물이라는 판 단 아래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추진'이 라는 대통령의 약속 역시 '변화와 발전'이라는 개념에 꼭 부합한다.
변화는 개혁을 동반한다. 개혁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역사에서 개혁은 반개혁세 력의 저항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개혁없는 변화를 도모하거나 저항없는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역사적 무지의 소치이거나 지적 오만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개혁을 위해 수구·기 득권세력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안정과 발전의 미명 아래 포위망을 풀고 스스로 포위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국민의 정부 집권 1년에 대한 평가의 결론으로서 제기 된다.
지난 80년대 중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제한적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대통령직선제의 쟁취, 문민정부의 출범, 그리고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의 탄생 등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제한적 민주화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계적, 제한적 민주화는 민주화 과정의 불가역성을 전망케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이지만, 이 과정에서 수구·기득권세력을 청산하는 문제가 심각한 국가적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불안정성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이 논쟁과정에서 민주화와 개혁으로의 진전이냐, 아니면 어두웠던 과거로의 후퇴냐 하는 역사 적 선택이 이루어졌음을 제3세계 민주화 과정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김대중정부는 김영삼 문민정부의 민주화 성과를 계승하는 동시에 네 가지 측면에서 문민정 부와 구별된다. 첫째, 김대중정부는 역대 정부와 확연하게 단절된 비연속적 정부이다. 둘째, 김대중정부는 민간세력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부이다. 셋째, 김영삼정부가 정치개혁 과 정치의 탈군사화를 과제에 직면했다면 김대중정부는 재벌개혁 등 사회경제적 개혁의 과 제에 직면했다. 넷째, 김대중정부는 노동 및 시민사회세력의 상당한 사회적 조직화라는 조건 위에서 출범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정부는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문민정부에 이어 민주화 2단계의 정부에 해당한다.
정치개혁에 이어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우리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민주주 의의 '공고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는 것은 민주주의 의 원리가 전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관철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구조화된 낡고 구태의연한 사회적 작동원리의 근본적인 교체를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분단의 논리가 통일의 원리로 전환되 는 동시에 중앙과 지방, 재벌기업과 중소기업, 행정부와 국회,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위계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재구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정만능주의와 행정편의주의를 주민참여에 기초한 참여민주주의로 바꾸어나가는 것도 전환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매우 높았으며 새정부 출범과 동시에 재 벌·금융개혁, 교육개혁, 정치·행정개혁, 언론개혁, 법조개혁 등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특히 인사청문회, 부패방지법, 특별검사제, 국가인권위, 사학비리 등은 민감한 쟁점으로 부각되었 다. 이 중에서는 외환위기 해결이나 금융개혁, 재벌의 빅딜과 같이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적 극적으로 실천한 과제가 있는가 하면 정치개혁과 같이 시작하지도 못한 과제가 있다. 여성, 교육, 행정분야에서는 부분적으로 개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인사청문회나 특별검사제와 같 이 대통령의 철석같은 공약사항이면서도 스스로 파기한 것도 적지 않다.
따라서 국민의 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한 개혁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몇몇 정책분 야에서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고, 문민정부의 개혁과 비교해서도 상당한 질적 진전이 있었 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의 성과가 우리 사회의 구조화된 작동원리를 바꿀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대통령이 약속하고 국민들도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이 몇몇 정책의 실 천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정부 1년에 대한 평가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 사회의 열악한 현실이나 DJP연합이라는 정치적 모순구조 등 수다한 구조적 조건을 감안한다면 '성공한 절반'도 매우 힘겨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패한 절반'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는 더욱 어렵다. 특히나 그것이 대통령 혼자만의 노력이나 대통령의 온정적 시혜에 의존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더욱 아니 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김대중정부는 이 모든 상황을 상수로 간주한 상황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러한 조건을 슬기 롭게 극복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조건지어졌다. 따라서 어떻게 개혁역량을 결집하여 효 과적으로, 꾸준히 개혁을 추진할 것이냐 하는 또하나의 과제, 즉 개혁의 방법론적인 과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이것을 누차 '개혁주체의 형성'이라는 개념으로 강조한 바 있다. 개혁주체 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권력내부의 개혁주체가 먼저 형성되어야 하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지 탱해주는 사회적 수준의 개혁주체가 형성되어야 하며, 이 권력중심적 개혁주체와 사회적 개 혁주체가 연합하여 광범위한 '개혁연합'을 형성하여야만 개혁이 성공할 수 있으며, 그 힘에 의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그렇지 않고 개혁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개혁적 시민단체의 요구를 번번히 묵살하거나, 대통령이 약속한 공약중 실천 가능한 것을 정략적 판단으로 파기하거나, 개혁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을 생략하려 하거나, 전문성과 업무의 연속성만을 내세워 관료조직에 지나치게 의존하려 한다면 개혁도 패러다임의 전환도 가능하지 않다. 하물며 이 런 상황에서 의원 빼가기와 법안의 변칙처리 등 역대 정권과 똑같은 정치행태를 반복하여 국민들로부터 불신과 조롱을 자처하면서 각본따라 진행되는 '국민과의 대화'를 진정한 대화 인양 분식하여 자화자찬식의 성과나열로 국민을 호도해서는 국민의 진정한 동의와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은 국민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 새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명명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정부의 국정과제에서도 '국민의 힘'에 의한 개혁과 '국민 중심의 국정운영'이라는 국정운영방식이 명기되어 있다. 아 래로부터 분출되는 국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 다. 국민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개혁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새정부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작동원리를 교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국민을 중심에 놓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국민은 여전히 국정의 대상이거나 수단 일 뿐 결코 주체이지도 않고 국정운영의 목표이지도 못한 실정이다. 몇가지 점에서는 오히 려 국민을 배제하고 도외시하기까지 하고 있다. 인사청문회, 부패방지법, 특별검사제 등에 대 한 식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듣기 좋은 질문만 선별해서 답 변하면서 대통령 자신이 평균적인 국민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유창하게 말한다고 해 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국민들은 지식으로 평가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행동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국민의 정부가 2년 차의 국정운영에서 성공하려면 스스로 발상을 전환하지 않 으면 안된다는 전제 아래 세 가지 사항을 당부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론에 민감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국민의 의견을 무겁게 여기라는 말이다. 시민단체의 특성을 십분 이해하고 이들을 개혁의 동반자로 삼아 개혁작업에 적극 활용하여 야 한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시민단체는 언제든지 개혁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 지막으로, 대통령 없이도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국정운영의 틀을 제도화, 체계화하여야 한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중심이지만 대통령 혼자하는 개혁은 최선의 경우에도 민주주의 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정치학의 원론을 잊어서는 안된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이 패각투표를 통해 훌륭하지만 '잠재적'인 독재자를 정치에서 영원히 추 방한 지혜를 경청하고 루비콘강을 건넌 영웅 시이저를 찌른 브루터스의 가슴아픈 인간적 고 뇌를 이해하여야 한다. 대통령이 개혁의 '홀로아리랑'을 소리높여 열창할 때 국민들의 소외감 은 더욱 깊어져 간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려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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