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1년 03월 2011-03-01   2594

어느날 문득, 영화 한 편-아이 엠 러브

아이 엠 러브

사랑과 감각을 찾아서 떠난 이후

 조광희 변호사

모모하우스에서 입장권을 사고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에 늦은 점심을 먹고 오려 하는데, 저편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선배가 그의 연인과 있었다.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경계를 보란 듯이 뛰어넘어 만남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 뭐하고 사는 걸까”라는 자괴심을 안겨준 커플. 그들의 영화관 나들이는 남다르게 보였다. 나는 홀로 식사를 마치고 들어와 객석에 앉는다. 그 커플은 내 앞쪽에 앉았고 영화는 시작된다.

  한국의 부르주아들에게서 보기 힘들 것 같은 품위와 격식을 갖춘 이태리 명문가. 그들이 살고 있는 저택과 그들의 몸짓 하나 하나는 잘 정돈된 그들의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격식’을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힘들어하는 내게도, 그들의 견고한 세계는 우아한 정신과 건실한 성격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부유함이 그들에게 우아함과 건실함을 주었는지, 그 반대인지는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와 같은 문제겠지만, 그들의 세계는 그 자체로 잘 완성된 예술품과 흡사하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일치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그 부르주아 성채의 안주인이 알고 보면 사랑에 빠져드는 ‘차탈레 부인’이며, ‘인형의 집’을 나가게 될 ‘노라’일 줄 누가 알겠는가. 여주인공 엠마는 이러한 여인들의 고전적이고도 새로운 판본이다. 러시아 태생으로 이태리 명문가의 며느리가 된 주인공 엠마는 완벽한 아내, 훌륭한 어머니이며, 가족들도 모두 그에 못지않다. 그러나 가문의 속사정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간단치 않다. 딸은 여자를 사랑하고, 남편은 전통적인 가업을 글로벌 금융기업에게 팔게 된다. 그러한 삶의 미세한 균열들은 엠마의 삶에 일정한 파장을 일으키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는 결정적 동기가 되지 않는다. 그 계기는 뜻밖에도 음식이다. 아들의 친구이자 요리사인 안토니오가 만든 음식이 주는 쾌감은 엠마가 잊고 있던 감각을 일깨우고, 그것은 안토니오에 대한 욕망으로 번져간다.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을 계기로 그와 금지된 사랑을 하게 된다”라는 설정은 훨씬 그럴듯한 동기를 요구하는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무리수다. 더군다나 나같이 음식을 ‘먹기 괴로운 것’, ‘맛없는 것’, ‘맛있는 것’으로 밖에 구별하지 못하는 투박한 미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러한 계기는 그저 무리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생존을 위한 식욕’이라는 원초적 욕구는 ‘미식’이라는 욕망으로, ‘종족번식을 위한 성욕’이라는 근원적 욕구는 ‘에로티시즘 또는 사랑’이라는 욕망으로 확장되어 있다. 이처럼 가장 일차적인 욕구라는 공통점을 지닌 ‘식욕’과 ‘성욕’이 문화 속에서 다른 차원의 욕망으로 변모되고 투영된 것이 ‘미식’과 ‘사랑’이라면, 엠마가 ‘미식’을 제공하는 요리사를 사랑의 대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은 매우 논리적이다.

  이렇게 시작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어디로 갈지 궁금해 하는 관객들이 뜻밖에 만나는 것은 그 아들의 죽음이다. 명백히 영화 ‘데미지’를 연상시키는 아들의 돌연한 죽음에 대해 엠마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도덕적 책임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엠마의 비탄을 보면서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이 가련한 여인의 참회다. 그런데 영화는 우리의 기대를 다시 한 번 배신한다.  아들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 ‘데미지’의 주인공은 아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홀로 은둔해버리지만, 엠마는 그것을 또 다시 계기로 삼아 본격적으로 ‘인형의 집‘을 나서는 노라의 면모까지 갖춘다. 감각과 사랑을 찾는 그녀의 행로는 부르주아 세계를 벗어나고, 가족을 초월하며, 죄책감마저 가로지르는 것이다. 마침내 엠마가 어두운 동굴에서 안토니오와 함께 사랑에 빠져있는 마지막 장면은 격식과 윤리의 세계에서 감각과 사랑의 세계로 이행한 그녀의 무아지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유한 것을 모두 버리고 사랑에 몸을 던진 후의 세계는 과연 낙원일까. 어차피 영화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절정에서 멈추었다. 물론 작가가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의 지리멸렬한 결혼생활까지 다루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삶의 단면을 그렇게 면도날처럼 잘라낸 영화는 늘 정당화되는 것일까. 작가에게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지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삶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는 전혀 없고, 그 미래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미래의 불길한 전조가 분명한 경우에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은 이 영화가 결국 여성의 최고급 판타지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그녀에게는 부도 지위도 없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나이는 점점 속일 수 없다. 안토니오에게 친구의 어머니가 언제까지 사랑스러울지, 안토니오가 언제까지 그녀에게 연정을 바칠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집을 나간 ‘노라’가 그럭저럭 잘해볼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엠마가 또 다른 엠마인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의 운명에는 이르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운명을 지루하게 늘인 어떤 낙담과 우여곡절에 이르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을 걸고, 나도 한번…’이라는 용기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미완성한 ‘탐미적인 환상’이다. 관객들은 경비행기를 타고서 미처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두 시간 동안 안전하게 내려다보지만, 그 세계에 착륙하여 산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경험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무척 감탄스럽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세계의 비경을 담은 아름다운 유화’일지언정, ‘매우 거칠지도 모를 그 세계의 지리학’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정으로 그 세계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위험천만한 유혹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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