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나무로 서 있는 사람
주진우 『참여사회』 편집위원, 평화박물관 사무처장
임길택이란 시인을 아시는지?
강원도 산골과 탄광마을에서, 그리고 경남 거창 시골마을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다 마흔여섯 한창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난 이다. 그는 여러 권의 동시집과 동화들, 아이들과 쓴 글을 모은 문집을 남겼다. 코밑이 탄가루라도 묻힌 듯 거뭇한 사진 속 그는 더벅머리에 감수성 예민한 청년같다.
아주 오래 전에 탄광마을을 다녀온 적이 있다. 캄캄한 갱 안쪽으로부터 불빛이 하나 둘 씩 어른거렸다. 전날 밤부터 지하 수천 미터 막장에서 밤새 탄을 캐다 이제 기진한 몸을 허위적 거리며 갱을 나오고 있는 사람들의 헤드램프 불빛들. 탄가루의 땀투성이 얼굴들이 아침햇살을 받자 생기로 일렁였었다.
“굴 속 걸어 나올 때마다/ 점점 밝아지는 길 밟으며/ 세상 밖으로 나올 때마다/ 햇빛처럼 반가운 게 없대요/ 햇빛처럼 그리운 게/ 아무것도 없대요” (「햇빛」 중).
『탄광마을 아이들』은 이런 아버지를 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삶에서 뿌리 뽑혀 막장으로 내몰린 이들의 고된 노동과 절망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노래한다.
아이들의 절망도 깊다. “까만 물 흐르는 길을/ … /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 집까지/ … /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그러다 결국 화살은 자신을 향한다. “폐에 박힌 석탄 가루들이/ 아버지의 숨을 가쁘게 하”는 대가로 받은 보상금으로 “쌀도 사고 학교도 가”야하는 아이들은 “아버지를 죽이면서… 살아가야”하는 이들이다(「아버지를 죽이면서」).
그러나 손톱만한 자부심과 아이다운 유머- 즉, 해탈이 있으니 살아간다. 이 아이들은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냐는 질문에 계속 모른다고 하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야/ …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십니다/ 일한 만큼 돈을 타고/ 남 속이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 광부이십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아이들이다(「거울 앞에 서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라는 선생님 주문에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눈치를 살피다, “술 잡수신 다음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는 한 아이의 말에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시인이 사랑하고 안쓰러워 한 것은 “선생님의 조그만 꾸중에도/ … / 탄광이 문을 닫으면/ … / 걱정하시는 아버지 이야기 엿들을 때도/ … / 슬픈 몽실 언니 이야기에도” 가슴이 마구 뛰는 그런 아이들이다(「우리의 가슴」).
그의 사후에 묶여 나온 『나 혼자 자라겠어요』는 『탄광마을 아이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여전히 주변의 아이들과 자연, 사물을 살피고 있지만 그 시선은 더욱 깊고 부드러워졌고, 무엇보다 자의식을 통과한 감수성으로 풍부하다.
『나 혼자 자라겠어요』에서 시인의 주변에 대한 관심은 특별하다. 관심은 아주 넓지만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아이 이름 만해도 수십 명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꽃과 풀, 나무와 새, 별과 하늘을, 그리고 두엄더미까지 두루 살핀다.
“논두렁콩 구불구불 심어진/ 정숙이네 논둑 도랑가/ 방동사니, 돼지풀, 강아지풀, 개여뀌, 달맞이꽃/ 언제부터 그곳에 자라왔는지/ 도랑물 보이지 않도록 자랐다”(「풀」). 살아있는 생명자체를 보며 거기 그렇게 있었구나 하는 것인데, 그 인정認定이 눈물 나도록 따스하다. 그렇게 존재자체의 소중함을 말하며 다른 존재를 살피러 넘어가려다가 문득, 주춤한다. “나무나 풀들은/ 뿌리로 생각하는지도 몰라./ 어둠 속에서 더/ 일을 잘하고/ 갈 곳을 더/ 잘 찾는지 몰라”(「정말」). “저흰 물 밑에 발 담그고서/ 사람들 물 밟지 마라/ 놓여 있지”(「징검다리」).
그 주춤거림은, 보던 것에서 시선을 먼 데로 돌려 생각에 잠기면서 발생한다.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와 우리가 발로만 밟던 징검다리를 통과하여 사람의 존재와 삶에 대한 사유로 풍부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막장’이나 ‘깡촌’이라 부르는 절망의 땅에서도 그 다양한 사람과 자연, 사물들의 존재의 소중함 때문에 “이 세상 끄덕없다” 긍정하게 한다(「이 세상 끄떡없다」).
이 긍정이 우리 마음이 향해야할 잘못된 세상이나 누추한 곳을 묻어버리는 ‘사이비 긍정’이 아님은 물론이다. 엄마 따라 벼에 농약 치러 나왔던 아이는, “온 논의 벌레들이 죽어야/ 벼들이 잘되는 것이/ 오늘따라 이상히 여겨”진다고 고개를 갸웃한다(「정이」). “삼 층짜리 건물 옆/ 신기료 아저씨 자리엔/ 오후 내내 그늘뿐”임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신에게로 이다.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 /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나 혼자 자라겠어요」)라는 엄청난 도약은 놀랍다. 주변 것들에 부드럽고 따스한 관심을 보이던 바람은 그 양분을 모두 몰고 와서, 이런 옹골찬 자기 선언을 하게 한다.
우리에게 이런 자기 긍정의 힘을 남겨놓고, 그가 우릴 떠난 지 벌써 13년이 흘렀다. 사라지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다가 그와 함께 사라진 사람. 난 그를 본 적이 없지만, 왠지 지금 그의 허우대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지금 ‘가죽나무’처럼 내 앞에 서있다.
“귀 먼 정옥이 할매/ 어슬렁어슬렁 마당가 거니는 것 보고/ 혼자 놀다 잠이 든/ 툇마루 위 기용이도 보고/ 정이네 부엌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가는/ 바람 손도 놓치지 않고// 가죽나무는/ 봄날, 조용한 마을 가운데서/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 집 지키는/ 선이네 꿀꿀이도 보고/ 거름 더미 헤치며 먹이 찾는/ 은정이네 장닭도 보고/ 비닐하우스 위 반짝이는 햇빛에/ 부신 눈을 감으면서도// 하늘과 손잡은 가죽나무는/ 봄날, 마을 가운데 우뚝 서서/ 심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가죽나무는/ 성옥이네가 살다가 비워 둔/ 감나무 마당 지붕 위에/ 파랗게 돋아나는 풀들을 보면/ 슬그머니 눈이 돌려진다/ 하늘에 맞닿은 키가/ 왠지 허전해지기만 한다” (「가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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