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3년 02월 2013-02-14   2253

[기획 ]현장의꽃,오재식 초대 공동대표님을 추모합니다

기획

 

현장의꽃,
오재식
초대 공동대표님을
추모합니다

 

참여연대 초대 공동대표를 역임하신 오재식 선생님께서 2013년 1월 3일, 4년여 간의 암 투병 끝에 별세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참여연대와 함께하신 오재식 선생님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분이셨습니다. 간사들과 스스럼없이 술자리를 함께하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셨고 고령의 연세에도 세상을 향한 사그라들지 않는 사랑과 열정으로 우리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사회운동 조직의 대가’로 꼽히는 오재식 전 대표님은 1933년 추자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종교학과와 미국 예일대 신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YMCA 간사,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등을 맡으며 우리나라의 기독학생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70년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와 국제부 간사를 맡아 일본에 거주하면서 <세카이(세계)>에 지명관 선생(필명 TK생)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할 수 있도록 돕는 등 민주화 운동 지원에 헌신하셨습니다.
1980년대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선교훈련원장과 통일연구원장을 맡아 기독교 사회참여와 에큐메니컬 운동 지원에 힘을 쏟았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국제구호개발 단체인 월드비전 회장 및 월드비전 국제본부 북한국장을 역임하며 적극적인 북한 구호 사업을 통해 평화와 통일 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아직은 오 대표님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집니다. 대표님으로부터 세상과 사람을 향한 ‘사랑’과 ‘실천’의 유산을 물려받은 참여연대가 그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참여사회 독자들과 함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집자 주

 

추 모 사

오재식 선생님을 추모하며

 

201302_참여사회2월호

 

진보의 인품,
그리고 사람들의 현장

이기호 한신대 교수

 

선생님과 “새해 1월에는 편안하게 옹기종기 둘러앉아 지나간 시공간과 다가오는 시공간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고 새로운 시공간을 꿈꾸는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것이 작년 11월이었다.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그 분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어 몹시 안타깝다. 다행히 작년 11월, 선생님의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이 출간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구술한 내용이 다시 정리되어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있어 그 분의 삶을 성찰하고 역사의 한 축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기독학생운동을 조직하신 일,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의 민주화운동을 조직하고 지원하신 일, 한반도평화와 관련된 비전과 평화운동을 개척해오신 일 그리고 아시아를 강조하며 사람을 키우고자 했던 일들은 회고록과 한겨레신문의 연재 기사에 맡기고 여기서는 오재식 선생님과 함께 일하면서 느꼈던 그분의 삶의 원칙을 다시 회상해보고자 한다.

 

단순하고 상식적인, 아주 어려운 원칙
항상 해맑게 웃으시는 오재식 선생님과 함께 일해본 사람이라면 선생님의 기본 원칙이 얼마나 단순하며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가를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원칙은 단순하며 매우 상식적인 것인데,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간파하고 계셨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맡아 행함으로써 신뢰를 쌓아야 하고 그 신뢰에 기반한 연대와 팀워크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강조하셨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일, 말에 책임을 지는 일, 공사를 구분하는 일 등을 명확히 해야 새로운 시공간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 선생님은 다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자 하셨다. 다시 말해 말과 행동이 같이 가는 것을 진보의 인품으로 여기고 이것이 몸에 익어 습관이 되도록 하는 것을 현장 조직의 첫 번째 원칙으로 삼으셨던 것이 아닐까.
오 선생님께서 언젠가 이런 비유를 하셨다. 일본의 가부키歌舞伎라는 전통극에서는 관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온 몸을 감싸는 검은 옷을 입은 여러 명의 구로코黑子가 무대 연출을 위해 배우나 다른 물체의 시중을 든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배우와 연출자 뿐 아니라 드러내지 않고 움직이는 구로코들이 필요한 것이다. 오 선생님께서는 우리 사회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또한 이 구로코 역할이 필요하고, 이미 많은 구로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오 선생님은 본인의 역할을 구로코에 비유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은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예일대에서 석사를 했으며 한국, 아시아, 세계 교회에서 활동했지만 박사 과정을 밟지 않았고 목사 안수를 받지도 않으셨다. 그러한 지위가 자칫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거나 지위에 걸맞는 위치로 가려는 경향을 갖게 할까봐 처음부터 그런 유혹을 없애려고 하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회고록이 나왔을 때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쓰는 일이 스스로를 교만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씀하셨다. 언제나 현장의 주인공들을 무대에 세우고 본인이 나서지 않는다는 원칙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이러한 삶과 운동의 원칙에 기인한 것이리라.

 

오재식의 현존, 사람들의 현장
오 선생님께서 말년에 시공간을 화두로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현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현장은 어떤 곳이었을까?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던 1960년 무렵, 학생운동을 조직하던 선생님은 당시 ‘존재로서의 현장(현존, presence)’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이란 삶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문제 제기로, 당시 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화두로 사용된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이보다 10년 앞서 학생 시절에 접한 김재준 목사님이 소개하신 스팽글러의 『서양의 몰락』과 강원용 목사님의 『새시대의 건설자』에서 드러난 생각들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양이라는 세련되고 근대화된 나라들이 몰락하고 있다는 역설과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낙담했을 때 새로운 건설의 주체가 될 것을 강조했던 메시지는 청년 오재식을 움직이게 하는 현존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 뒤 미국 유학 시절 알렌스키와의 만남은 ‘조직으로서의 현장’, 곧 약자의 세계에서 사회를 만들어가는 ‘조직’으로서의 사회 현장이 큰 중심을 이루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박정희 정부의 유신 시대와 5.18 광주는 ‘역사로서의 현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오 선생님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과 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민주화의 열기를 거대한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했다. 1993년 귀국 후 오 선생님은 차세대 교육에 관심을 가졌고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사회교육원’, 그리고 월드비전 이후 ‘아시아 교육연구원’과 ‘아리’등을 통해 ‘사람들의 현장’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유언처럼 맴도는, 우리에게 남은 일
1995년 동경 신주쿠의 어느 술집에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우리는 60대 초반이었던 선생님께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은 조심스럽지만 주저 없이 ‘시민정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정당을 만드는 공학적인 일이 아니라 시민들이 비전을 찾고 스스로 모델을 만들고 실천하면서 정치를 살려내는 우정과 연대의 심포니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건 내가 혼자 앞장서고 자네들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가야 하는 일이네.”
오 선생님의 이 말씀이 이제는 유언처럼 귓가를 맴돈다.

 

이기호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 소장. 오재식 선생님이 귀국 후 처음 사회교육원장을 하시던 1993년, 크리스챤아카데미 기획실 차장으로 함께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 문제를 중심으로 함께 일하고, 2006년 아시아사회교육원과 2009년 아리에서 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 육성과 평화연대 구축을 위해 함께 일해오다.

 

오재식 선생 연보

1933. 3. 26 제주도 추자면(도) 신양리에서 아버지 오전태,
어머니 김길성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남
1945~1946 평양 숭덕인민학교에 편입(1945)/
평양 숭인중학교에 입학(1946)
1947~1951 서울 중앙중학교 편입/졸업
1952~195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 졸업
1960~1964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 간사,
미국 감리교 선교사 제임스 레이니 목사와 같이 근무
1964~1966 미국 예일대학교 신과대학 졸업
1967~1968 한국YMCA전국연맹 대학생부 간사
1969~1970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1971~1981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 간사,
국제부(CCA-IA) 간사
1982~1988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선교훈련원 원장,
통일연구원 원장
1988~1993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CCPD), 제3국장(JPIC)
1994~1996 참여연대 창립대표,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사회교육원장
1997~2002 한국 월드비전(World Vision) 회장
1998~1999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초대회장
1998~2002 대통령 통일 고문
2003~2005 월드비전 국제본부 북한국장
2006~2009 아시아교육연구원 원장

포상
1998 미국 코넬대학 명예인문학 박사
1999 미국 예일대학교 신과대학 동문상
2002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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