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사의 주말 저녁 오락프로그램에 ‘러브하우스’라는 순서가 있다. 비만 오면 천정이 새고, 겨울엔 담요를 둘러야 할 정도로 춥고, 가족 모두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좁아도 수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어려운 가정을 찾아가 집을 고쳐주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에 나오는 ‘수리수리 마수리’나 ‘열려라 참깨’처럼 “러브하우스를 공개해 주세요”라는 주문을 외치면 낡고 누추하던 집이 산뜻한 가구, 단열 창문, 비데 등으로 단장한 깔끔한 새 집으로 변해 나타난다.
보고 있으면 도깨비 방망이나 제비가 물고 온 흥부네 박씨가 절로 떠오르는 이 코너의 집수리 신청자만도 수십 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만큼 ‘러브하우스’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이 어찌 단순한 ‘집’ 뿐이겠는가. 편안함, 안락함, 여유, 희망… 이런 것들이 꿈의 구성성분이 아닐까?
벌집, 쪽방 등으로 상징되는 서울 구로동. 한때 한국 경제의 산업 역군이자, 수출 신화의 주역이었던 구로공단의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이 꿈꾸는 2002년 러브하우스는 어떤 모습일까?
한 달 임금 48만 원, 그마저도 회사부도로 받지 못해
구로공단에서 20대 초반의 생산직 여성노동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게 강미애 씨(가명·25세)와 조미진 씨(가명·21세)를 만났다.
강미애 씨는 라디오나 핸드폰의 주파수를 맞추는 추정 진동체를 만드는 Y통신에 다닌다. 그는 70여 명의 직원 중 막내다. 패스트푸드점, 의류상가, 각종 이벤트 등 젊은 여성을 필요로 하는 업종들이 번성하면서 20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공장을 찾지 않는다는 게 강씨의 말이다. 그 자신도 20대 초반에는 KFC(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에서 청춘을 보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일한 곳이 안양 지점이었는데, 거기에 좀 있는 집 애들만 간다는 학교가 있어요. 돈 많은 애들이니까 점심 시간에도 자주 오는 단골들이에요. 나보다 어린 애들이 눈 흘긴다며 소리치고 너 잘리고 싶냐, 점장한테 이른다는 둥 협박하고, 정말 못 참겠더군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 5년이나 일했던 패스트푸드점을 그만두고 새롭게 일을 시작한 곳이 ‘Y통신’이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핀셋을 들고 0.2㎜의 미세한 부품 3300여 개를 옮기고 고정시키고 나면 눈앞이 안개비라도 내린 듯 뿌옇게 흐려진다. 이 일을 시작한지 3년째, 그 동안 가장 크게 잃은 것은 시력이라고 했다. 이렇게 눈까지 버려가면서 그가 버는 돈은 한 달 48만 원. 노동부가 발표한 최저생계비에서 한 푼도 어긋나지 않는 금액이다.
잔업에 철야, 야간근무까지 시간외 근무를 124시간이나 일했을 때 받은 80여 만 원이 그녀가 지금까지 받은 최고의 임금이다. 그나마 노조 활동을 시작한 지금은 회사측에서 잔업이나 철야도 시켜주지 않아 기본급 48만 원만 받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가족들 생활비 15만 원과 적금을 빼고 나면 용돈은커녕 교통비조차 빠듯한 현실이다.
M전자에 다녔던 조미진 씨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고3 때 실습 나온 회사에 2년 간 둥지를 튼 그의 한 달 임금은 58만 원. 쥐꼬리만한 월급이나마 보름씩, 한 달씩 늦게 나오기 일쑤였다. 회사는 결국 지난해 부도를 냈다. 한참 잘나가던 회사의 급작스런 부도, 그리고 뒤를 이은 임금 및 퇴직금의 미지급은 노동자들을 100일 간의 천막 농성으로 내몰았다.
“제가 원래 말이 없거든요. 부끄럼도 많이 타고. 그런데 그 때는 정말 달랐어요. 그 동안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회사에 대한 불만도 꺼내놓고, 참고 지나갔던 일들도 그것이 어떻게 잘못된 일인지 알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병원 노조 건설과 결혼을 꿈꾸며
지난 달 조씨는 간호학원에 등록했다. M전자 이후, 몇 군데의 공장을 전전했지만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학원측의 소개로 낮에는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는 간호사들이 얼마나 부당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M전자 노조에서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호사가 되면 개인병원 노조를 만드는 게 꿈이다.
조미진 씨에게 병원 노조가 러브하우스라면, 강미애 씨는 더 현실적인 러브하우스를 꿈꾸고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다. Y전자 노조 조사부장으로 있는 강씨는 Y전자 노조가 속한 N노조에서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 1년 간 사귀어온 그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결혼할 생각이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적금 통장도 하나 새로 만들었다. 강씨에게는 적금 통장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를 통해 한 달에 30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던 강씨는 어느 날 적금이 해약된 것을 알게 되었다. 구제금융사태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어머니가 강씨 몰래 해약한 것이다. 강씨 위로 4명이나 되는 언니들도 여러 차례 겪은 일이었기에 그리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로 적금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다.
강씨에게 연인이 생기자 혼인신고부터 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결혼식을 올리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씨의 언니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러나 강씨는 생각이 다르다. 웨딩드레스도 못 입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 언니들 때문에 부모님이 속으로 흘린 눈물을 알고 있는 그는 자기만이라도 남들 하는 대로 순서를 밟아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은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강씨와 남자 친구는 그날까지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이 땅에 정당하게 벌어 부자가 된 이는 없다”
이런 소박한 러브하우스를 꿈꾸는 이들이, 하룻밤에 수백 억 원을 도박으로 날린다는 신문사 사장이나 공적자금 수조 원을 해외로 빼돌린 어떤 회사 사장 같은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조씨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 땅에 부자는 없어요. 그렇게 쓰는 돈 정당하게 번 것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 주어야 할 것 안 주고 가로챈 건데. 그들은 부자가 아니고 도둑이에요.”
결혼을 생각하면서 난생 처음 복권을 사봤다는 강미애 씨, 무릎이 아픈 엄마를 보면서 처음으로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조미진 씨. 비록 2002년 새해도 경제 불황과 속 터지게 만드는 정치 등 어두운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건 돈으로 치장한 러브하우스가 아니라 건강한 노동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지어가는 러브하우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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