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0년 06월 2000-06-01   989

장애인 참정권 봉쇄하는 2층 투표소 법정에 선다

지난 4·13 총선 당일, 경기도 광주군 한 투표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휠체어를 탄 한 여성장애인은 이날 아침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막상 투표장 앞에 이르러 난감해졌다. 투표소가 2층에 설치됐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 편의시설은 물론 도우미조차 없었다. 게다가 선거 관계자로부터 고압적인 목소리로 “다음에 (투표)하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결국 그는 투표를` 포기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가족 2인도 투표를 포기했다. 공교롭게도 이 지역은 3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됐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결국 이 사건은 선거법에서 근거를 담보해내지 못해 벌칙조항도 없는 선언적인 장애인복지법 제23조(선거권 등 행사의 편의제공)를 근거로 국가의 책임을 방기한 선관위를 상대로 고소·고발은 물론 사례를 더 수집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참여연대, 장애인 편의시설촉진 시민연대 등이 공동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제기하기로 했다. 장애인의 참정권을 원천봉쇄하는 이같은 행태는 매번 선거 때면 돌출하지만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2층 투표소는 사실상 ‘장애인 출입통제 구역’

91년 10%, 92년 3월 11.6%, 95년 6월 20.9%, 97년 12월 18.1%, 2000년 4월 17.8%.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수치는 뭐길래 10년 전이나 변함없이 10∼20%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걸까?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매 선거시 1층 아닌 투표소의 비율이다. 그러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현상 때문에 장애인은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바로 장애인 ‘선거참여 접근금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문제제기를 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선거 역사상 지금까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애인 투표율’을 조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라면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행정자치부에 장애인 선거율 조사를 요구했지만 모두 자신들 소관이 아니고, 자료가 없고 비밀보장의 원칙에 어긋난다 등의 이유로 조사를 거부해 왔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투표장은 1층 아니면 2~3층, 지하일 텐데 그 통계가 무슨 의미를 지닌다는 건가? 그리고 장애인의 투표율을 따로 조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까?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리는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소외는 점점 깊어가고 있다.

투표장과 선거 참여율의 상관관계는 대표적으로 부산과 충청북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지난 97년 15대 대선 때 일반 유권자의 투표율은 83%를 웃돌았지만, 부산지역 장애인 선거율은 53%, 충청북도의 장애인 선거율은 약 70%였다(연구소가 의뢰해 지자체 자체 조사). 1층 아닌 투표소의 비율을 보면 부산은 33.8%, 충북은 4%였다. 다른 변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지만 투표소의 환경, 접근의 문제가 얼마나 장애인의 투표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은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지난 92년 선거시 강원도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작은 반란이 있었다. 조직적으로 장애인들이 선거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그 당시 강원도는 1층이 아닌 투표소가 20%가 넘었고 지역장애인 단체에서 투표소 사전조사를 해보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이 대다수였다. 매 선거시기마다 요구하는 문제지만 선관위의 답변이 항상 ‘노력은 하겠으나 부득이한 경우가 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로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정부당국에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는 분노가 일었던 것이다. 언론에서도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의 이러한 기본권 찾기 움직임에 관심을 나타냈고 장애인들의 선거불참 운동은 급기야 투표소 한두 군데를 빼놓고는 모두 1층으로 옮기는 성과를 올렸다. 지금도 조직적 운동을 펼쳤던 춘천과 강릉은 다른 지역에 비해 눈에 띄게 1층 투표소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파장을 일으켰던 선거불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해 제도적 대안 마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장애인 선거불참 운동으로 일부 지역에서 성과

이 사건을 계기로 장애계는 매 선거때마다 한시적인 공대위를 가동시키면서 강력한 항의는 물론 제도적,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등 기본권 확보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힘이 약했다. 장애인 관련 선거정책이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돌아오는 소리는 매번 같은, “노력하겠음.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장애인만을 위해 투표장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람”이라는 짧은 답변뿐이었다. 그래서 장애인 참정권 확보운동이 길게는 1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이나 제도 마련에 초점을 두며 일관된 흐름과 분위기를 이끌지 못해 그다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번 4·13 총선을 맞이하면서도 두 달 전에 선관위에 대책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선관위 측은 “노력은 하고 있으나 부득이한 경우 어쩔 수 없이 도우미를 배치할 예정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회답했다. 10년 전의 공문을 펴보았다. 문구는 좀 다르지만 역시 매한가지 내용이었다. 물론 이번 선거법 개정을 통해 시각장애인 홍보물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고, 수화통역을 실시하게끔 되어 있어 일정정도 싸움의 성과는 있었지만(작년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 점자 홍보물은 금지, 수화통역은 후보자들의 모든 동의가 있을 때에만 가능했음) 가장 중요한 투표장의 접근 문제는 빠졌던 것이다.

매번 요구하고 매번 같은 답변만 되풀이 전달받고, 어지러운 정치 현실의 여러 가지 쟁점에 밀려 힘있게 한 번도 크게 쟁점화된 적 없었다. 급기야 지난 98년 선거법 개정을 위해 장애인의 선거의식과 투표환경까지 조사하면서 토론회를 통해 문제를 알리고 의원입법 할 의원과도 이야기를 끝냈지만 이후 그 의원이 되레 선거법 위반혐의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바람에 그냥 그렇게 무산돼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장애인의 실제적인 참정권 확보를 정책적으로 명확히 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 자리에’라는 것이 또 한번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선관위는 자신들의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는 선에서 선심쓰듯 선거법을 개정해 놓고 모든 후보자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겼으므로 이 부분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참여연대·장애인 편의시설 촉진 시민연대 등이 공동으로, 국가를 상대로 추진하고 있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장애인 권리찾기 운동의 일환이다. 이 단체들은 앞으로도 선거환경 조사, 선거법 개정을 위한 토론회 등을 갖기로 하는 등 더 이상 10년의 싸움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매번 반복되는 중앙선관위와의 지리한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 한 사람으로서의 당당한 주권 행사를 위한 권리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함이다. 안으로 안으로 쌓여, 50년 선거 역사에서 소외된 장애인이 이제는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여준민 장애우권의문제연구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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