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그 즈음에 눈에 띄는 또 다른 뉴스가 있었다. <서울신문> 11월 18일 기사 ‘2056년엔 E.T.가 지구에 온다?’였는데 50년 뒤에는 “영장류, 포유류, 물고기를 포함한 척추동물 순으로 동물의 감정을 인간의 뇌에 전달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다는 기사였다. 그 결과 “지구인은 살코기를 먹는 데 혐오감을 느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되어도 상황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채식이건 육식이건 근본적으로 ‘먹기’는 나와 다른 무엇인가를 그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켜 내 속으로 소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기’가 없이는 필연적으로 나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50년 뒤에 동물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100년 뒤에 식물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근본적으로 ‘먹기’는 내가 살기 위해 타자에게 해를 가하는 존재론적 숙명에 대한 딜레마를 담고 있다.
사실 조리의 과정은 이러한 필연적 살생의 과정을 문화적으로 감추는 행위이다. 어떻게 잘 요리하는가, 어떻게 시체를 시체로 보이지 않게 하는가가 조리의 문화적 의미이다. 날것과 익힌 것의 구분을 통해 야만과 문명을 구분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이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편 인디언들은 사냥한 짐승을 기리기 위해 제의를 행하였는데, 이 역시 문화를 통한 살생의 죄의식을 치유하려는 행위였다.
채식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견 채식을 함으로써 동물을 살생하지 않는 것 같지만 생명의 경계선을 동물과 식물로 나누는 것조차 문화의 산물인 셈이다. 더 나아가 미국산 쇠고기와 한국산 쇠고기의 구분 역시 -광우병의 전염 유무와 별개로- 신토불이와 같은 문화적 구별 짓기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딜레마의 문화적 치환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행위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는, 남을 해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문제는 그 거짓말과 폭력이 어떠한 효과를 내는가이다. ‘먹기’로 이야기 하자면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때의 ‘잘 먹는 것’은 나의 거짓말과 폭력이 타자에게 어떠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다른 표현이다.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내릴 수는 없겠지만 문화가 야기하는 현실 효과에 대한 책임이 윤리의 한축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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