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0년 04월 2000-04-01   1033

제주범도민회

지속가능한 개발모델 찾는 제주지킴이

성게국, 갈치국, 오분자기 젓갈. 큰그릇에 푸짐하게 담아낸 겉절이와 톳나물. 밥상 위에 오른 반찬만 봐도 여기가 서울은 아니구나 싶고, 절로 제주의 맑디맑은 옥빛 바다가 연상된다.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 부근에 자리한 제주범도민회(공동대표 임문철). 총선연대 활동으로 이곳 역시 분주해 보인다. 회의실엔 사람들과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서울에서 보던 레드카드 포스터와 총선연대 신문들이 넓은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틈에 끼어 ‘단 커피’를 들이키고 있는 동안 이지훈 집행위원장이 나타나 제주범도민회의 역사와 주요활동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제주범도민회는 지난 91년 9월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반대 범도민회’를 결성하면서 제주 지역운동의 기틀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1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제주범도민회는 정세와 사회변화에 따라 시기별 운동전략에 맞게 명칭을 몇번 변경했고, 주요 슬로건으로는 “주민주체의 개발과 자연환경보존”을 주창하고 있다.

“다른 지역이 모조리 ‘참여·연대’로 도배질해도, 우리는 제주역사 속에서 ‘범도민회’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어요. 그 이유는 지난 10년간 도민들과 함께 지역현안을 가지고 고민하고 싸워왔기 때문이에요.”

‘제주도개발특별법 제정반대 범도민회’(90년∼91년 12월)→‘제주도개발특별법 철폐와 민주화 실천 범도민회’(92년 1월∼94년 1월)→‘도민정치실현 제주범도민회’(94년 2월∼97년 2월)→‘참여자치와 환경보존을 위한 제주범도민회’(97년 2월∼현재). 명칭변경 과정만을 면밀히 살펴봐도 그들은 대중추수주의적 시민운동보다는 시대별로 적절한 지역 현안을 발굴, 철저히 지역운동에 복무해왔음을 엿볼 수 있다.

‘개발과 환경보존’이란 양날의 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이자 감귤·당근·감자 등이 재배되는 생산의 섬, 제주. 도민들에겐 언제나 ‘개발과 환경보존’ 문제가 양날의 칼처럼 존재해왔다. 환경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이야말로 섬과 도민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언제나 도민과 섬은 외지 개발업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90년대초 정부주도의 하향식 대규모 개발이 ‘제주도개발특별법’이란 이름으로 본격화함에 따라 그에 반대하는 지역운동을 벌인 거예요. 날치기로 통과돼버리기는 했지만 저희는 그 운동을 통해 지역민의 단결과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봤어요. 예를 들면, 아시아나가 운항을 개시하기 전에는 대한항공이 독점적 지위를 갖고 항공과 숙박(KAL호텔)에서 생기는 개발이익을 대규모로 챙겨갔거든요. 그런데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지역민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없고, 아름다운 제주자연만 파괴되는 거예요. 가만히 있다가는 제주 전체가 엉망이 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개발이익의 역외유출과 자연환경의 파괴를 막기 위해 본격적인 지역운동을 벌인 겁니다”

93년 제주지역 3개 단지 10개 개발지구의 재벌중심 외지인 토지소유 실태 공개운동을 벌일 때도 6개월 내내 소유주를 알기 위한 토지대장을 일일이 떼고, 법원에 등기부등본을 신청해 결국엔 도내 외지인의 땅 소유실태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냈다. 제주 지도를 직접 갖다놓고, 외지인 소유의 땅에 색깔을 칠하면서 실제로 여기서 개발을 하면 그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공개했다. 지역언론도 이를 크게 보도했고, 도민들의 호응도 높았다. 조사결과 우보악지구, 강정유원지 등이 100% 외지인 소유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제주도는 분노와 경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으며, 지역민의 생존권과 지역의 환경보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발이익만을 노리는 개발업자들을 향해 도민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펼칠 것인가에 대한 토론도 심도깊게 이뤄졌다.

이처럼 제주범도민회는 지역주민들이 실제로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찾아 ‘사업의 계획단계’에서부터 저지해 들어간다. 최근엔 강원도의 한 시민단체가 지역내 카지노 설립문제와 관련한 지역운동을 조직하면서 제주범도민회로부터 몇가지 모범사례를 배워가기도 했단다. 10년의 노하우를 전국화하고 있는 제주범도민회. 지역 내부의 연대운동은 어떻게 벌여나가고 있을까? 고유기 사무처장의 말이다.

“환경련, 여성민우회 등 제주지역 7개 시민단체들이 모여 서울의 시민단체협의회(이하 시민협)와는 별개로 제주시민단체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수평적 네트워크체제로 이뤄진 시민협은 지역내 시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뤄진 연대기구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단체간 갭을 줄이고, 제주 현안과 전국적 사안의 운동을 함께 펼치고 있습니다.”

재정? 현안부터 토론하지?

운동 내부의 연대 틀이 아무리 확고해도 사실 그 연대가 시민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면 모래성과 마찬가지인 셈인데, 제주범도민회 역시 다른 지역단체들처럼 지역 내부에서 갖는 정치적 영향력에 비해 회원의 수와 참여도는 미미했다. 주로 인적 관계로 구성된 약 300명 정도의 회원이 구체적으로 활동에 결합하는 수준이고, 지역내 전문가의 참여보다 일반시민의 참여가 저조한 현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풀뿌리네트워크에 힘을 싣기 위해 동 단위의 소지역모임을 활성화할 계획이란다.

실제로 제주 지역운동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제주범도민회의 실무역량은 어느 정도나 되나. 시민사업위원장, 사무처장, 정보관리실장 셋이서 1인3역 내지 4역을 맡아가며 총체적 실무역할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실무하중이 크다면 일에 치여 사람을 미워할 법도 한데…, 제주범도민회 실무자들에게선 그런 낯빛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바다를 품고 살아 그런지 넉넉하고, 유순하고, 정감있게 대해준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실무하중을 겪고 있다면 구체적인 대안마련이 시급한 것은 아닌지…. 실제 재정문제(실무와 밀접한 연관)와 관련한 일화 한토막.

“일부러 재정문제를 회의자료 제일 앞머리에 올려요.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 그런데 회의자료를 받고 회의가 시작되면, ‘어, 현안부터 토론하지…’ 하고 넘어가요. 그러다보면 거의 회의시간이 다 끝나거든요. 그럼 그때 토론하자고 붙잡아요. 그럼 ‘어, 밥먹으면서 하지…’ 그러곤 그냥 또 넘어가는 거예요.” 한 실무자가 웃으면서 던진 이 한 마디가 가슴을 치게 한다. 97년부터 지금까지 공히 50만 원의 상근비를 받으며 제주의 앞날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지치지 않고 제주발전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뭔가 구체적 대안이 필요한 건 아닐까? 참여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권력감시의 전문화, 아파트공동체운동을 위시로 한 도시개혁운동, 날로 넓어져만 가는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운동이 성공해 살기좋은 제주가 되려면 이제 큰 목소리보다는 낮은 목소리가 필요할 것 같다. 요구하기보다는 실천하고, 책망하기보다는 돈 1만 원이라도 회비로 내면서.

인터뷰 | 고유기 제주범도민회 사무처장

“NGO회관 건립으로 활동가에게 쉼을 주고 싶다”

서울중심격 경향의 운동을 비판하는 ‘운동분권화’론이 대두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앙단체들이 과도하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인데,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서울에 있는 메이저단체들의 역할이 유효하다고 본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지역현안에 대해서는 지역별 시민협을 만들어 내부동력을 갖고, 전국적 연대는 지역과 지역간의 만남을 강화함으로써 더욱 탄탄한 연대운동 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 · 13총선이 코앞에 왔다. 제주지역내 총선연대운동 계획은?

“지역은 여전히 ‘유착설’이 또다른 ‘음모론’을 낳기도 하는 현실이다. 다만 제주의 경우 ‘낙선대상’에 오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운동이 더 어렵다. 하지만 전국적 사안인 만큼 이번 선거가 정치개혁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젊은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생각이다.”

제주에서 벌일 수 있는 독특한 시민운동이 있다면?

“NGO회관의 건립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와서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 각종 시민운동워크숍을 개최하고, 제주지역을 찾는 지친 활동가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위한 ‘활동가 쉼터’같은 것도 만들고 싶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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