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상지대 교수인 김정란 씨. 그녀는 좌파지식인들이 상아탑에 안주해서는 안되고, 강단 좌파보다는 현실적 좌파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전투적 페미니즘이 갖는 남성성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기도 한 그녀는 앞으로 ‘경쟁과 배제’가 주된 남성성의 시대에서 포괄과 사랑이 있는 여성성의 시대로의 전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제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대중을 만나고 싶어요. 꾸준히 자기를 설명하면 대중들이 이해해주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대중에 영합한다는 게 아니라 함께 간다는 거지요.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대중은 낮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다른 영역에 있다고 보면 돼요. 사실 우리 문화가 이렇게 된 건 매체의 책임이 큽니다. 고급 문화를 매체들이 꾸준히 매개해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불란서 대중들이 어느 지식인 못지않게 로랑 바르트를 이해하는 건 매체들이 꾸준히 고급 문화를 매개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매체는 그런 역할에 너무 게을렀어요. 학문도 돈 되는 학문과 돈 안 되는 학문으로 나뉘어져서 돈 안 되는 쪽은 취급을 못 받지요. 그러니까 우리 대중은 인문학적으로 훈련돼 있지 않은 겁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계몽이란 말은 좀 권위주의적이어서 쓰기 싫고 저는 지식의 소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특히 좌파 지식인들이 그런 권위주의라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나를 만나자마자 내가 보기엔 거의 숨도 안 쉬고 그녀가 쏟아 놓은 말들이다. 물론 내가 많이 생략해서 써놓은 것이니 그 총알 같은 말들에 내가 초장부터 어찌 정리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53년 생. 사진에서 본 그대로 그녀는 나이가 덜 들어 보인다. 아, 이쯤에선 서로 ‘당신이 더 젊어 보인다’ 등등의 덕담 비슷한 것이 오갔으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사십대 중후반의 사람들끼리 나누는 그런 덕담이란 어쩔 수 없이 좀 처량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지면에 옮기는 건 생략. 그건 그렇고…, 그녀는 시인이다.
시집은 잘 나가나요?
“제 독자가 대략 만 명쯤 돼요. 욕심대로라면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쯤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 시가 그렇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진 않는 거지요.”
시를 쓰면서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뭘 원하시지요?
“심층적 근대성 확보가 목표입니다. 20세기는 남성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경쟁력 있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20세기가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타자(他者)들을 만들어 냈지요. 예를 들면, 남성 대 여성, 서구 대 비서구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런 경쟁이나 배제가 아닌 포괄, 사랑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데엔 남성성 보다 여성성이 가능하다고 봐요. 어찌 보면 요즘 운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반대편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생태주의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좌파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감이 잘 안 온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성이란 게 뭔가. 기껏해야 페미니즘에 대한 기초적 인식만을 갖고 있는 내게 시인 김정란이 쏟아 놓는 말들, 예를 들면 하버마스의 도구주의 비판까지 열심히 받아 적다가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다시 여성성이 등장했을 때쯤 나만큼 궁금해 할 것이 틀림없는 독자들을 위해 한 마디.
그런데 그 여성성, 여성적이란 게 뭐죠?
“저는 그게 한 마디로 괴이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원시적이고 자연적이라고 할까요? 여성성은 지금까지 남성 위주의 세계가 파묻어왔던 것들이지요. 남자들이 지금까지 여성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즉, 젠더(gender)로 길들여지는 것이었지요. 남성이 지배하기 위해 본래의 여성성을 파묻었던 겁니다. 이를테면 남성의 세계에서는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경쟁과 배제가 있지만, 여성성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과 저것이 같다는 겁니다. 질서의 반대 개념이 무질서인 것으로 규정돼 왔지만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를 찾을 수 있는 것, 즉 굳이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성적 지성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른바 전투적, 공격적 페미니즘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는 공격적 페미니즘의 입장을 인정하긴 하지만, 방법적인 면에서 남성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합니다. 즉, 여성성이 배제된 여성운동은 또 다른 경쟁과 배제에 의한 타자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아, 이제 조금 감이 잡힌다. 그런데 감을 잡은 건 잡은 것이고, 과연 김정란 식의 여성성에 의한 심층적 근대성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20세기는 남성 위주의 통제를 통해, 어찌 보면 이성에 과부하가 걸린 시대였다고 할 수 있어요. 과부하가 걸린 이성은 누차 얘기하지만 수많은 타자들을 만들어 내지요. 여성성에 의해 획득된 심층적 근대의 세계에서는 그런 차별이 없어지고 반목에 의해 세계가 움직이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인가? 누군가가 ‘김정란은 귀신이다’ 라면서 그녀가 실현하려는 자아는 불가능한 유토피아라고 했는데…(물론 그것은 그녀를 비판하기 위한 글은 아니었다). 나도 그녀를 귀신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지금까지 여성이 ‘담론’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성성의 세상에서 그녀의 싸움은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모두가 아다시피 ‘싸움’이란 것은 곧 ‘실천’이다.
아까 좌파 지식인들이 권위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셨는데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요?
“저는 우리 좌파 지식인들이 편안하게 상아탑에 안주해선 안 된다고 봐요. 강단 좌파보다는 실천적 좌파가 필요하고 대중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강준만 교수의 방식에 찬성합니다. 강 교수가 전략적으로 유연해질 필요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실명 비판 등 지나친 도덕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따라서 강 교수의 방법에도 보다 더 운동적 감각이 필요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교수의 방식에 한국 지식인 사회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그는 세련된 담론 생산자는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강 교수의 방식에 찬성하시는 것은 아까 말씀했던 여성성, 즉 포괄과 상생의 방법과는 좀 배치되는 게 아닌가요? 다시 말해 또 다른 타자들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냐는 거죠.
“아니에요. 강 교수의 싸움은 바로 그 포괄과 상생을 무너뜨리는 세력과의 싸움이죠. 포괄과 상생이란 것이 때묻은 것, 더러운 것들도 다 좋다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오히려 강 교수의 방식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가 걱정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게 결국 지행합일인데 지식인들이 허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지식과 의식이 저절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틀린 겁니다. 실천해야 정당한 것이지요.”
이거 졸지에 강준만 교수 예찬론이 돼버렸다. 하긴 두 사람은 몇번 만나진 않았지만 서로 교감하는 바가 큰 것 같다. 강 교수도 이미 『인물과 사상』을 통해 김 교수를 높이 평가해 마지않은 바 있으니까…. 자, 이제 좀 건드리면 아픈 부분은 없을까?
‘실천’ 문제에 있어서는 김 교수에게 이런 비판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지난 80년대에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서느냐, 기회주의적이다 하는 것 말이지요.
“글쎄요, 변명일지는 모르지만 저는 80년대를 관통했던 이데올로기적 흐름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상지대에서 학교 민주화를 위해 다른 교수들과 함께 싸우면서 현장에서 움직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강준만 교수와도 그때 만나 많은 걸 느꼈지요. 다시 말해 내 내부의 진통이 끝나고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 시기적으로 90년대였다고 할까요.”
하지만 내연하고 있던 문제의식은 있었겠지요?
“대학 4년 내내 연극을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제가 이래 뵈어도 학교 때 안성기 씨와 공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웃음) 연극을 했던 건 그 만큼 자기 언어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인지 제가 했던 작품들은 말의 비극에 관련된 것들이었지요. 마지막 작품 <목소리>도 당시 지식인들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 콕토는 실연한 여자의 독백을 통해서 표현했지만,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외치는 마지막 부분은 당시 지식인들의 상황을 담은 것이라고 봐야지요.”
그런데 왜 연극은 그만 두었지요?
“그때는 시가 갖고 있는 완결된 이미지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장르 통합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물론 그 전에도 많은 습작들이 있었지만, 그때 내가 알 수 없는 괴상한 단어들이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악몽도 많이 꾸고….”
이를테면 무당의 신내림 같은 건가요?
“꼭 비교를 하자면 그렇겠지만, 무당과 시인의 차이점은 무당은 자아가 없지만, 시인은 지성으로 통제되는 존재라는 겁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지요.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좇아가지만 저는 그것과 극단적 지성 사이에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여성적 지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이고, 또 여성성이다. 피해가자.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책을 다른 분들과 함께 내셨지요?
“『조선일보』를 바로 세우는 것은 우리 정신사 안에서 맥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물론 다른 신문들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전략적 측면에서 전부를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하고 주적을 설정해야지요. 무엇보다도 『조선일보』를 개혁하자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제화 돼야 해요. 그런데도 좌파 지식인들이 『조선일보』를 선호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오산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해요. 『조선일보』를 포장해주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지금의 행태는 끝내야 합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저만해도 지난 번에 상을 하나 받았는데 『조선일보』측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 인터뷰 한번 하면 저는 속말로 뜨는 거겠지요. 게다가 기자가 잘 아는 사이라면 이른바 안면 받치는 것 때문에 더 거절하기 힘들 거예요. 그때 이런 것 때문에 실천이란 게 힘든 것이구나를 느꼈습니다.”
자꾸 실천 얘기가 나오니까 이번엔 좀 엉뚱한 질문 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아, 이 속물성이란….
만일에 말이지요.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실천이 그토록 중요한 덕목이고 실천이란 게 어차피 현실참여라면 요즘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치도 엄연한 현실인데요.
“저한테는 글쓰기 자체가 실천입니다. 하지만 넓은 뜻에서 정치 참여를 할 수는 있겠지요. 단, 정치 일선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뜻이 맞는 정당이 있다면 당원 정도로 참여할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뜻이 맞더라도 정치 행태에 동의할 정당은 없어요. 19세기식, 구닥다리 방법으로 하고 있거든요. 민주노동당만 해도 그래요. 현실적 문화 마인드가 없어요. 늘 투쟁이란 구호에, 빨간 조끼에, 머리 깎고…. 진보적 정당도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맞춰야 해요. 이젠 좌파들도 꼭 자본주의적 방식에 함몰되지만 않는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매력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 양반은 내가 권영길 위원장에게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넌즈시 했던 말들을 쾌도난마로 풀어낸다. 그러면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성공한 작가들을 인신공격 한다는 비판도 있던데…. 그거 상업주의 아니냐고 하더라구요.
“저는 왜 문학하는 사람들이 비판에 약한지 모르겠어요. 수사학적 비판이 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왜 나서서 맞서지 않고 뒤에서만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문인이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것도 하나의 정치행위입니다. 그러면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는 것이지요. 자기 세계 안에서만 가부장적이고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김정란이 그렇게 해서 뜨지 않았느냐고 하는 모양인데, 만일 백번 양보해서 제가 그걸로 유명해졌다면 그건 단지 결과일 뿐이지 의도한 건 아니란 겁니다.”
역시 쾌도난마…. 시작부터 지금까지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두 시간이 가버렸다. 『참여사회』 담당 기자가 처음에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미안해 했을 때 ‘그런 것 없어도 된다’고 호기를 부렸는데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고정적인 인터뷰 형식을 싫어하긴 하지만 좌우지간 마지막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한 가지만 더 묻기로 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있으신가요?
“인터넷을 이용해서 멀티미디어 문학을 기획하고 있어요. 아마 5·18을 기점으로 해서 나올 것 같군요. 시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하이퍼 텍스트가 될 겁니다. 홈페이지는 www. womanliterature.net 예요.”
컴퓨터에 익숙하신 모양이지요?
“아니에요. 저는 아이디어를 낼 뿐, 홈페이지 운영은 동생이 맡아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인터넷은 제가 기다렸던 매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계층구분이 없고, 바람직한 소통이 일어나고 그림이나 음악 등 미적 기능도 있으니까 예술적으로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지요. 물론 인간은 공간적 존재니까 책이나 다른 인쇄문화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김정란 시인을 만난 곳은 지난 번 이창동 감독을 만났던 여의도의 한 카페였다. 우연인지 그 날도 날이 좀 꾸물댔다. 그녀가 화사한 웃음을 남기고 택시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계속 ‘여성성’, ‘지식의 소통’ 따위의 것들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는데, 토요일이라 유난히 차들이 막혀 서 있어서인가, 언뜻 떠오르는 생각—나라는 이 남성에게 보이는 세상도 참 꽉 막힌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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