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3년 04월 2003-03-25   2157

‘위장 사업자 등록하면 노동자 대접해준다?’

제화노동자, 유기용제 중독·근골격계 질환 심각…1년 5건의 과로사 발생하기도


하루 16-18시간 노동, 접착제와 토루헨 중독에 의해 두통과 손떨림, 근골격계 질환. 2003년 오늘 제화노동자의 우울한 현실이다. 이런 제화노동자들에게 하청공장 사장은 자영업자 등록을 요구하고 있다. 조건은 퇴직금과 인건비를 올려주겠다는 것. 자영업자에게 퇴직금과 임금인상이라니. 이 억측에 반발하고 나선 제화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고 싶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안타까운 제화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다. 편집자 주

매캐한 접착제 냄새. 간이쪽문을 열고 들어선 공장의 시멘트바닥엔 구두 본을 뜨고 남은 가죽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작업대마다 1개씩. 불빛이 없는 곳은 대낮인데도 침침하다. 봄기운이 완연한 거리를 걷는 동안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건만, 햇볕 한 줌 없는 공장에선 아직도 난로에 불을 쪼이며 언 손을 녹이고 있다. 5분이나 지났을까. 벌써 눈이 시리다. 등받이가 없는 딱딱한 간이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노동자들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구두조각을 오리고 풀칠하는 사이, 라디오에선 옛 가요가 흘러나온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바알길∼” 입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하루 16∼18시간동안 묵묵히 앉아 일하는 사이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뿐이다.

그들은 봄 신상품 구두를 만들어내느라 바빴다. 한두 마디 말을 붙여보아도 시선은 절대로 작업대를 떠나지 않는다.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에서 그들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MBC 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탤런트 장서희 씨가 즐겨 신는 구두는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많은 미소페와 엘리자벳이란다.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너무 값비싼 제품은 조심스럽다”며 이 상표의 수제화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 구두들은 국산 고급 수제화다. 특히 엘리자벳콜렉션(주)은 2002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애인 엘리자베스에게 영문 이름이 같다며 축구승전 감사 표시로 10켤레의 구두를 선물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회사 사장 최기창 씨는 2001년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해 ‘자랑스런 중소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 수제화를 찾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수제화 시장이 호황을 맞고 있다. 봄 신상품 구두가 쏟아져 나온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뒤트임 수제화의 가격은 한 켤레에 대략 18만9000원. 이 정도라면 산뜻한 봄 패션 전략을 고민하는 직장여성들이 흔쾌히 카드를 내밀 수 있는 가격이다. 3개월 할부를 끊을 지라도.

유명 상표는 아니지만 밀리오레 등 서울 동대문패션타운에서 팔리는 수제화는 한 켤레에 6만∼9만 원. 백화점 수제화와 2∼3배 가격 차이가 난다. 동대문패션타운 판매원들은 상표 값을 빼면 백화점 물건과 견주어도 질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화점 직원들은 ‘시장물건’과 ‘브랜드 수제화’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목청을 높인다. 과연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18만9000원짜리 구두의 인건비는 1만 원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일대엔 수제화 공장 800여 곳이 밀집해 있다. 한 공장에서 일하는 제화노동자는 30∼50명. 제화업계엔 열세 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해 마흔 살, 쉰 살을 넘긴 숙련공들이 많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제화노동자는 10만 명. 그중 대다수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이들은 봄 가을 성수기엔 하루 16∼18시간씩, 비수기에도 하루 12시간은 일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비수기에 ‘굶지’ 않으려면 성수기에 한몫 잡아야 한다. 그래서 집이 먼 노동자들은 성수기가 되면 아예 공장 근처 여관을 잡아놓고 하루에 겨우 두세 시간 눈을 붙여가며 작업에 열중한다. 노동자가 한 명이 하루에 만들어내는 구두는 10켤레 쯤. 간단하고 쉬운 디자인은 제작시간이 덜 걸리므로 생산량이 더 많을 수 있다.

이곳 성수동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에 따르면, 그가 다니는 공장에서는 노동자 10명이 하루에 120∼150켤레의 구두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이 구두들은 현재 강남 유명 백화점에서 한 켤레에 18만9000원 이상의 고가로 팔리고 있는데, 그들이 구두 한 켤레에 받는 인건비는 가피(가죽을 필요한 모양으로 오리거나 풀칠하는 일) 4800원, 접우(박음질하고 망치질해 구두를 완성하는 일) 5200원이다. 가피와 접우를 하는 2명의 노동자가 받는 돈이라야 고작 1만 원. 18만9000원짜리 구두의 인건비가 1만 원인 셈이다.

더 놀라운 건 제화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소한의 기본급이나 4대 보험 혜택, 8시간 노동제, 특근 및 야근 수당의 개념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켤레 당 받는 ‘개수 임금제’가 전부다. 이사벨구두 관계자는 “대부분의 제화공장들이 도급제로 계약하며 우리도 사업자 등록을 낸 도급 노동자에게 1켤레에 5500∼5600원을 주고 일을 맡긴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유명 상표 제화업체라 할지라도 본사에 공장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실에서 샘플만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하청공장에 맡긴다. 제화업계에는 “생산공장을 가지면 망한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오기까지 한다.

박규상 제화노조위원장에 따르면, 메쎄의 경우 본사에서 만드는 구두는 하루 50켤레 가량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청공장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아예 본사 생산라인이 없고, 디자인만 해서 하청공장에 넘기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에스콰이어, 엘칸토, 금강 등 유명브랜드 역시 1/3은 본 공장, 2/3는 하청공장 생산방식이다. 박 위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한 하청공장에서 여러 브랜드의 상품을 만들어요.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한 공장에 앉아 사장이 받아온 주문표에 따라 작업합니다. 엘칸토 본사가 있는 성남·하남에는 반제품 하청공장이 많고, 성수동은 완제품 하청공장이 많아요. 요즘은 아예 중국으로 진출해 구두를 만들어오기도 하죠. 그 틈에 중국산 구두가 국산으로 둔갑해 고가에 팔리기도 합니다. 제화노동자들은 개당 5000∼7000원의 인건비를 받고 구두를 만들고 있어요. 수제화는 본래 사람이 직접 만든다 하여 비싼 구두지만, 생산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굉장히 적습니다. 구두가격 정상화가 필요하지요.”

탈세를 위한 사업주의 압력

최근 엘리자벳콜렉션 하청공장 노동자들에게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노동자에 불과한 자신들에게 회사가 사업자 등록을 내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이다. 한 노동자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만드는 구두의 원가는 인건비를 포함해 3만8000원 정도 돼요. 공장에선 제게 주문 표를 주면, 개당 4800원씩 받고 일해요.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야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에 마누라와 같이 일하죠. 제가 21년 간 구두공장에 다녔지만 기본급과 4대 보험 혜택을 받은 적이 없어요. 지난달, 아내와 함께 하루 14∼15시간씩 일해서 번 돈은 270만 원입니다. 그래봐야 의료보험 안 되지, 퇴직금 없지, 늘 미래가 불안하지요. 언제 잘릴 지도 모르고. 돈을 좀 덜 받더라도 월급제를 했으면 해요. 만일 우리가 법정근무시간을 지켜 8시간 일하면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벌어요.

그런데도 사장은 우리에게 사업자 등록을 내라고 요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왜 사업자가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갑근세 등 탈세를 위한 게 아니라면 뭐가 있을까…. 더 기막힌 건 우리가 사업자 등록을 내면 사장이 그동안 주지 않던 퇴직금을 1인당 100만 원씩 주겠다고 하고, 구두 개수 당 500원 씩 인건비를 더 주겠다고 하더군요. 이게 말이 안 돼요. 돈을 좀 덜 받더라도 월급제를 했으면 해요. 만일 제가 사업자 등록을 내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곧 잘리겠지요. 계속 어려운 디자인을 주고 주문대로 안 나왔다고 트집 잡고…. 그럼 전 오래 못 버틸 거예요. 어린 자식이 있는데, 저도 먹고 살아야지요.”

말을 하는 동안에도 관리자의 눈치를 보면서 쉴 새 없이 망치와 칼을 돌리는 그는 분명 노동자였다.

“제화노동자의 위장 자영업자 등록문제는 백화점에 입점한 구두 브랜드 26개 업체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제화업계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하청 노동자들에게 위장자영업자 등록을 강권하고 있어요. 본 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하청공장으로 돌리면 노사문제 신경 안써도 되지요. 탈세 수단도 됩니다. 영세사업자에게는 과세특례 혜택이 있기 때문에 하청공장 사장들은 노동자에게 사업자 등록을 요구하죠. 월 300만 원 미만이라면 노동자보다 사업자가 갑근세 혜택을 더 보기 때문에 몇몇 노동자들이 업주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죠. 명백한 사용종속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업주는 노동자성을 파괴하는 거죠. 우린 지금도 사장 눈치보며 초치기로 일해요. 그런데도 사업자 등록을 했다는 이유로 산재를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박규상 위원장의 말이다.

이종란 민주노총 노동법률지원센터 노무사는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되는 노동자들의 자영업자 등록 문제는 이미 오래된 문제인데도 대법원은 이들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특수고용직은 회사로부터 개인사업자 등록을 요구받고 등록을 한 것을 제외하면 사용자와 종속관계에 있는 노동자에 다름없다. 그들에게도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자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노동자마저 외면한 3D업종

제화노동자들에겐 위장자영업자 등록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조건 또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 지 오래다. 접착제, 광택제, 시너, 토루헨 등 유기용제 중독증상과 근골격계 질환으로 인대파열 등이 심각하다. 박 위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신발 모형에 가죽을 대고 그라인더로 깎다보면 분진이 많이 날려요. 평생 제화노동자로 살다 진폐증에 걸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1년에 5건씩 작업장에서 쓰러지는 과로사가 발생합니다. 미소페 하청공장에서는 재봉틀에 앉아 있다 죽은 50대 남자가 있고, 사보에선 접우를 하다 쓰러진 57세 노동자가 있었어요. 접착제나 토루헨 중독으로 신경계 질환이 오기도 하고, 두통 구토를 호소하는 사람도 많아요. 칠성제화의 경우엔 사인이 분명해 과로사 판정을 받고 회사에서도 보상에 나섰지만 다른 경우는 근거 불충분 등으로 보상 한푼 받지 못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는 거지요. 제화공장엔 외국인 노동자도 거의 없어요. 잠시 있다 떠난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그러더군요. 이 일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고.”

제화노조는 1988년부터 91년까지 월급제와 4대보험 쟁취투쟁을 벌인 적도 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구두만 가지고 한해 50억 달러를 번다는 이탈리아의 경우 시간제 월급제를 이행하고 있다. 핀란드엔 영세사업장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으며 노동자 대표가 건의하면 정부가 직접 지원에 나선다.

박 위원장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노동자를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는 비뚤어진 관행이 계속되는 한 제화업계는 앞으로 더욱 간사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착취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군다나 최근 많은 업체들이 중국에서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으로 구두를 들여오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해야 하는 국내 제화노동자들은 더 답답한 현실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주노동자마저 외면한 제화업종이 진정한 호황을 누리려면 노동자가 노동자로 제대로 인정받는 구조로 하루 빨리 개편돼야 한다고 일갈했다.

성수동 신발공장을 다녀온 며칠 뒤 제화노조 홈페이지엔 안타까운 사연이 접수돼 다시 한번 보는 이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했다.

“제화 일을 하는 부부기능공입니다. 성수동 제화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3월 10일 사장님이 갑자기 직원들을 불러놓고 내일부터 문 닫아놓겠다고 합니다. 회사가 어려워 그러니 각자 직장을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선금도 다 까고, 나머지 임금만 줬습니다. 근무년수 1년을 딱 2일 앞두고 내린 사장님의 횡포를 그냥 눈뜨고 당해야 합니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문이 잠겼어도 일단 출근은 해야겠지요.”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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