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3201

이 땅의 양심들은 왜 지금 태평한가?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옹과의 병상 인터뷰

‘최후의 분대장’ ‘외다리 거인’ ‘현역 독립혁명가’로 불리는 김학철 선생(85세)이 지난 6월 말 중국 옌벤에서 서울을 다녀갔다. 마지막 나들이가 될 지도 모른다고 한다. 병상에서 안경환 교수와 두 차례에 걸쳐 우리 현대사에 관해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안경환 선생님. 1년 만에 뵙습니다. 병상에 계신 선생님을 뵈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군요. 선생님은 격정의 현장에 어울리는 인물이지, 병실의 침대라는 일상의 세계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한 생각이 듭니다.

김학철 식도가 좀 상했다는데 대수로운 건 아니에요.

(중환자실에서 사흘을 보낸 후 병실로 옮긴 지 이틀인데 그동안 식사를 전혀 못하고 링거로만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그런데도 꼿꼿한 자세는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

이번에 한국에 오신 사연은 무엇입니까? 혹시 창작과비평사에서 수필집을 내신다고 들었는데 그 일 때문인가요?

책 한 권 펴내는 데 무슨 나들이가 필요합니까? 경남 밀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밀양시 주최로 석정 윤세주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지요. 석정 선생은 내 운명을 결정지워 준 분이에요. 내가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팔로군 소속으로 대일 유격전을 벌일 때 줄곧 상관으로 있었어요. 석정은 의혈단 단원으로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7년 동안 복역한 후 탈옥하여 상해로 건너갔지요. 그 후 약산 김원봉 선생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하다 1941년 태항산에서 전사했어요. 그 곳의 (한단) 항일전사 묘역에 묻혀있어요. 그런데 중국이 문화혁명을 거치는 과정에서 당시 북조선은 수정 사회주의라는 이유로 조선출신 전사자들의 무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지요. 그리고 질서가 회복된 후에도 연대장급 이상만 이장해 갔기에(자기들 기준으로는 그 급에 이르지 못한) 석정 선생의 묘는 아직도 잡초 속에 버려져 있어요.

약산 김원봉 선생의 이야기는 저희들 어린 시절에 전설처럼 접하곤 했어요.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받곤 했었어요.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약산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나왔더군요.

안 교수의 고향이 밀양인 것을 몰랐었군요. 미리 알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주고받았을 텐데요. 우리는 한때 밀양을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렀지요. 내 개인으로는 평생을 가슴졸이며 그리던 사상의 메카이기도 하지요. 무명소졸(無名小卒), 청년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약산과 석정의 고향이었으니까요. 이번에 가서 약산 생가를 돌아보고 약산 선생의 막내 여동생을 만나서 부둥켜안고 울었지요. 윤세주와 김원봉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지요. 약산이 사상가라면, 석정은 뛰어난 이론가이자 탁월한 조직가였어요. 석정을 잃고 약산도 타격이 컸을 거예요.

약산의 정확한 사인은 알려졌는가요?

제가 알기로는 60년에 국제간첩 혐의를 받고 투옥중 자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 성격에 치욕스럽게 비굴한 최후를 맞았을 리가 없어요(흔히 알려져 있듯이 6·25 패전책임을 추궁당해 박헌영과 비슷한 시기에 숙청당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상해 시절 약산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증언했는데 대체로 지나치게 미화한 것처럼 느껴지던데요. 특히 님 웨일스의 『아리랑』에서 김산(본명 장지락)의 입을 통해 그려진 바에 의하면 지성과 미모, 언변과 필력, 게다가 완력까지 갖춘 전인격적인 인물이더군요. 실제로 그러했습니까?

제가 약산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37년이었으니까 의혈단 활동이 다소 약화된 이후였어요. 그 당시는 이미 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있을 때였어요. 이따금씩 그분의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언변은 신통치 않았어요. 오히려 눌변에 가까웠어요. 이야기를 논리정연하게 이어가질 못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그런 김원봉 선생의 카리스마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나 자문해 보았어요. 만나고 나면 무언가 빚을 졌다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무언가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그게 카리스마의 원천이 아닌가 해요.

선생님이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가의 길을 택하신 동기에 대해 여러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소설가는 양립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소설은 탄생부터 자본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문학 장르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나는 청년시절에 피가 끓어 찬찬히 무언가를 쓰는 것보다 행동을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소설가의 길을 택한 것은 지극히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어요. 태항산에서 다친 다리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나가사키 감옥에서 잘랐어요. 해방이 되어 감옥에 함께 있다 귀국한 옥우(獄友) 송지영에게 부탁했어요. 한 다리 없는 놈이 먹고살아야 할 텐데 어디 “소설이라도” 쓸 방법이 없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하고 무식한 소리였지만, 마음 착한 송지영이 이무영(李無影, 1908-1960)선생께 나를 소개해주며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사실 나는 소설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어요. 의용군 시절 우연히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고 몹시도 분개할 정도로 (자본주의식) 문학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어요(이 이야기는 우리의 문학사에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빼앗긴 나라를 구할 생각을 해야 할 시기에 어떤 썩어빠진 놈이 난봉꾼의 추잡스런 이야기나 쓰면서 문학가입네 하고 행세하는가, 라며 비난했지요. 제가 쓴 작품은 문학의 형식만을 빌었지 전부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 기록이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이 한동안 관성이 붙어버렸던 거예요.

선생님은 서양의 작가 중에서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을 최고로 내세우시던데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이들 두 사람의 영향을 강하게 확인할 수 있었어요. 두 사람 모두 해학의 달인인 동시에 인물을 그리는 데 천재들이 아닙니까?

맞아요. 해학이 주제의 엄숙함과 진지함을 결코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소신입니다. 홍명희의 『임꺽정』, 조설근의 『홍루몽』, 노신의 『아Q정전』도 해학이 작품의 주제를 더욱 진지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무엇보다 인물을 그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게 이런 문학론을 강연한 사람은 중국 작가 정령(丁玲)이었어요. “인물을 그려야 후세에 남는다. 수호지를 보라”며 역설하곤 했어요.

영화도 좋아하시지요? 속된 질문입니다만, 일생 중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를 한 편 들라면 어떤 작품입니까?

그럼요, 영화는 소설의 구체적 형상화가 아니겠습니까? 안 교수의 영화칼럼도 즐겨 읽었지요.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는 1936년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보았는데요, 그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동행한 여인이 있음직했으나 굳이 캐묻지 않았다).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해학의 기법으로 해부한 절세의 수작이 아니겠어요.

인민배우 등 공연 예술가들과도 교분이 깊지요?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가요?(요즘 TV 드라마 <동양극장>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황철과 문예봉이 ‘9·28 수복’ 후 북으로 도망갈 때 김학철 선생이 자신의 지프로 태워주었다고 증언한다.)

지난해에 황철의 따님이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서 피아노를 가르쳤어요. 나를 아버지처럼 따르지요. 많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과도 소식을 주고받지요.

선생님의 필력은 산문에서 더욱 빛이 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백낙청 교수가 농담삼아 말했어요. 내 소설은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다고.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모자란 거지요. 격정적으로 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소설인지 자료집인지 정체불명이었어요. 내게 소설가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요. 월터 스코트의 지혜를 몰랐어요(바이런의 등장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소설가로 전향하여 대성한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산문과 해로동혈(偕老同穴)할 생각이에요.

선생님은 여러 차례 ‘잡문’에 대한 소신을 밝힌 바 있으시지요. 한때는 ‘직방문학’이라는 표현도 쓴 적이 있으시고요.

그래요, 잡문은 외과의사의 수술칼처럼 사회의 병집을 도려내서 건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 이를테면 문자화한 칼이지요. 특히 독재정권이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노신도 그랬죠. 그의 글도 대부분 잡감(雜感)이라는 이름의 단평적 잡문이었지만 일종의 ‘사회논문’으로 평가받지요. 직접, 신속하게 일상적 사건에 접근한다는 효용과 이점이 크지요. 누군가는 선생님의 겸양이 지나친 나머지 ‘과소망상증’ 환자라고까지 하던데요. 흔치 않은 경험인데도 왜 굳이 작게 해석하려 하시는지요? 선생님의 일생은 민족사의 차원에서 분석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닐까요?

아니에요. 사실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특별히 주목받을 가치가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여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분들에 대한 거대한 기억과 환상의 편린이나마 살아있는 제게서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내가 체험한 범위 안에서 솔직하게 기록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때로는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과장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과거사를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과장하는 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잖아요? 이제는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도 좋을 만큼 이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쟁만 해도 그래요. 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어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요.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 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윷진 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 떠돌던 자랑스런 ‘민족시인’ 윤동주가 일본 감옥에서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도 그런 차원에서 신빙성이 희박하지요?

그럼요, 윤동주 시인과 외사촌 송몽규 둘다 대학생 신분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2년 징역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했어요. 그러니까 비교적 가벼운 죄의 단기수들이었어요. 당시 일본 전역의 100여 개 형무소에는 67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감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무기수 박열 등 거물급들이 수두룩했어요. 위험성이 높은 장기수들을 제쳐두고 두 어린 학생들을 골라 독살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어요? 일제는 그처럼 잔학한 정치체제에도 불구하고 행형(行刑)에서는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후일 중국감옥에서 살다보니 새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이 팽배한 시점에서도 전국 형무소를 통틀어 단 한 사람의 정치범도 처형하지 않았어요.

저도 상해에 가면 항상 민족을 생각하게 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민족의 앞길을 인도하겠노라며 저마다 사명감과 꿈을 다지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제각기 입장은 달랐어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진한 마음만은 공유했던 게 아니었던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해기를 기록으로 남겼지요. 이병주는 변명을 위해 소설을 썼고, 김준엽 총장은 학자로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장정』을 썼어요. 박정희의 호적수이자 저희들 학생시절 우상이었던 장준하 선생은 『돌베개』에서 ‘광복군’ 체험을 전해 주었어요. 아나키스트였던 유림 선생의 족적도 더듬을 수 있고 이회영 선생의 전기도 있어요. 후일 박정희에게 민족주의 이론을 강론한 황용주 선생은 상해에서의 행적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비판과 고발에도 불구하고 글도 대응하지 않았어요. 애인리 52번지는 다시 찾아보셨는지요? 『무명소졸』과 『격정시대』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던 추억의 장소가 아닌가요? 순수와 열정의 시대의 성지가 아닌가요?

그럼요. 열아홉 살에 오로지 ‘제2의 윤봉길’이 되겠다고 무작정 상해 땅을 밟고, 실로 우연하게도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이끌려 간 곳이었어요. 나라를 되찾으면 당연히 이왕(李王)을 다시 모셔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던 철없는 아이가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주권사상’ 교육을 받던 학습장이기도 했지요. 몇 년 전에 다녀왔어요. 아직 그 당시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더군요.

남경(南京)에도요? 화로강(花露岡)과 이연선림(怡然禪林)에도 들리셨나요? 민족독립당의 본거지였지 않아요?

예, 중화문(현재의 중산문) 근처였는데 몇 해 전에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어요. 이제는 화로강도 이연선림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어차피 역사는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지는 건데 아쉽지만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그것으로 족하지요.

선생님은 연세가 들어도(older) 결코 늙지(old) 않는 분입니다. 지난 일을 회고하기보다는 새로운 일에 더욱 관심이 많으시지요. 그렇지만 굳이 선생님의 일생을 회고해볼 때 다시 태어난다면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내 평생 두 가지 순박한 믿음으로 살았더랬어요. 청년시절에는 일본의 중요인물 몇 사람을 죽이기만 하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꺼이 의혈단에 가입하였고, 그 인연이 연장되어 팔로군으로 대일 무장항쟁에 참여했지요. 성인이 되어서는 20세기에 사회주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둘다 세상과 인간을 크게 보지 못했던 속견(俗見) 때문이었지요. 그렇지만 걸었던 길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어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무언가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노신의 명구가 있어요. “전제(정치)는 사람들을 냉조(冷嘲)하게 만들고 공화(정치)는 침묵하게 만든다”고 했어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 시기 그토록 잘 싸웠던 양심들.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권의 옹호를 위해 그토록 물불을 헤아리지 않았던 그 양심들이 “지금은 왜 이리도 고자누룩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의 후기)

“영웅은 결코 침대에서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지요. 빨리 쾌유하셔서 못다 한 이야기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무명소졸’은 죽는 자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의연하게 죽으면 그만이에요. 돌아가는 대로 연락 드리지요. 약속한 대로 재서 군이 여덟 살이 되면 오세요. 함께 백두산에 오릅시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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