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매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어’
한 평생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며 나이를 먹었다. 노동운동하며, 운동만 생각하며 보낸 시간, 40년 세월이다. 머리엔 하얀 눈꽃, 얼굴엔 검은 버섯 꽃이 피었다. 어느새 2003년이다. 벌써 여든여섯 째 고개 앞에 서 있다. 한 해 한 해 넘어 온 인생 고개, 얼마나 더 넘을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기억이 많이 흐려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잊지 않았다. 그때, 평생을 운동할 운명으로 만들어 버린 50여 년 전 그때를 잊을 수 없다. 그 기억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운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의 부산, 국회 앞 ‘조방’ 노동자들의 그 함성을 기억하는 한.
“국내 최대 국내 유일의 방직회사가 조방이야”
조방, 곧 조선방직주식회사는 귀속기업체다. 1917년 일본자본이 500만 엔의 자본금으로 설립한 조방은 1922년 부산에서 조업을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부족한 면화를 조선에서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총독부에서 연간 20만 엔의 보조금도 받았다. 엄연한 일본 기업이었다.
이 조방을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접수했고, 군정이 끝나자 다시 한국정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몇 년 새 국적이 세 번이나 바뀐 것이다. 이미 손을 탈 때로 탄 조방을 정치권력이 주목한 것도 이때쯤이다. 1951년 ‘조방락면사건’과,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 조방쟁의는 한국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 국가권력과 기업가의 유착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조방쟁의요? 들어서 뭐 할라꼬요? 50년도 더 된 이야기 아입니까.”
힘들다고 했다. 누굴 만나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게 기운에 부친다고 했다.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었다. 조방쟁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생존자니까. 이상옥(86세). 1918년생이다. 여전히 부산에 살고 있는 그는 쟁의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었다.
“조방쟁의는…, 쟁의 당시 내가 조방노조 핵심이었는데, 그 후로 많은 탄압을 받았십니다. 쟁의 도중에도 그랬고. 두세 번인가 경찰에 잽히가서 구류도 살고, 재판소에 가서 검사한테 심문도 받고, 그런 사실이 있십니다. 요새 같으면 아주 능수능란하게 이것저것 이야기해서 이론적으로 (검사를) 꼼짝 못하도록 만들 자신도 있는데…. 내가 노동운동 시작한 지 한 40년 안 됩니까.”
고령인데다 발음도 정확치 않아 한 마디 한 마디가 쉽지 않았다. 건강에 대해 물었다.
“말이 아입니다. 나(나이) 많으면 죽어야지. 심장이 안 좋아서 말 많이 하면 숨이 차요. 말도 좀 삐뚜룸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말했는데.”
정말 숨이 찬 것 같았다. 띄엄뛰엄 옛 기억을 더듬다가도 “쉬었다 합시다”라며 그는 여러 차례 숨을 골랐다. 쟁의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또렷했다. 그는 꼼꼼하게 스크랩한 당시 신문자료들을 들춰가며 이야기를 조금씩 이어갔다.
조방이 마침내 한국정부로 넘어온 건 1948년 9월이었다. ‘국내 최대’ 면방직 회사. 당시 조방의 명성이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조방을 ‘국내 유일’의 방직회사로 만들었다. 전쟁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 내는 조방, 거대 권력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남의 나라 기업’이었던 조방을 상공부가 관리하면서 조방은 국내 정치권력이 접근할 수 있는 ‘국내 기업’이 된 것이다.
“조방 노동 조건은 한국 최고였어. 보통 부산에서 베 짜는 여공들, 그 처우라는기 말이지 회사마다 대부분 균형을 이루고 있었거든요. 근데 조방은 엄청 좋은 기 광목 배급을 했어요. 월급과는 별도로. 상당히 대우가 좋았지.
그래서 그런가 조방은 취직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회사였어요. 내가 조방에 들어간 기 46년 7월입니다. 시험을 쳤는데 1등이라고 합디다. 그래 채용돼서 승진도 하고 나중에 경비과 경비주임으로 있었십니다. 그러다가 쟁의가 터졌지요.”
“강일매 배후는 이승만이었지”
1951년 12월 15일, 조방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켰다.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1951년 3월 16일이었다. 당시 조방 관리인 정호종과 회사 중역이자 국회의원인 김지태 등 조방 임직원 50여 명을 갑자기 군검경합동수사본부가 구속하는 일이 발생했다.
정호종 등이 군복에 질 나쁜 낙면(落綿)을 섞어 품질을 떨어뜨린, 의도적인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조방 내에 괴뢰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해 국군작전을 방해했다는 죄목도 덧붙여졌다. 어이없는 구속 사유. 이른바 ‘조방락면사건(朝紡落綿事件)’이다.
사건 발생 당시, 관리인 전호종은 노동자들과 함께 조방의 공동불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조방 내 유일한 조선인 기술자 출신으로 해방 직후 자치관리위원장이기도 했던 그는 노동자들과 주식지분을 5 대 5로 나누는 조건으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노동자들도 조방에서 지급했던 후생용 광목을 모아 노동자분 입찰보증금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전호종이는 곧은 사람이요. 전혀 부정이 없었어요. 간부들이 많이 따랐지. 딴 건 모르겠지만 돈 문제, 부정 이런 건 그 사람이 사장으로 오고 나서는 생각 못 하는 거였으니까. 그 사람이 할라고 한 종업원지주제도 상공부 장관 허락까지 받았다는 말이 있었십니다.”
문제는 시기였다. 사건이 발생한 3월 16일은 귀속기업체 조방의 불하 당사자가 결정되기 3일전이었다. 구속 하루 뒤엔 불하 공고까지 돌연 무기한 연기됐다. 그리고 9월 5일 강일매가 신임 관리인으로 임명됐다. 뜻밖의 인사였다. 강일매는 해방 전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해방 후에는 동화백화점관리인이었던 인물로 방직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정호종이는 강일매 세력에, 소위 이승만을 등에 업은 세력에게 쫓겨난 사람 아입니까. 이승만이가 강일매를 조방에 보냈고, 그 다음에 굉장히 어거지로 말이지, 조방 구 경영진을 완전히 바까 버렸어. 소문에는 강일매 아버지가 이 박사 선대 묘지기였다고 합디다.”
조방락면사건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 이승만과 강일매 관계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강일매가 이승만의 양자라는 소문까지 돌고있었다. 관리인 취임 당시 강일매가 봉황무늬가 새겨진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나타났을 정도였다.
단순히 강일매의 뒤를 봐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승만이 조방 경영권에 집착했던 데는 보다 중요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전 관리인 정호종이 불하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손을 잡았던 사람은 부산의 대표적 자본가이자 야당 국회의원인 김지태였다. 강일매가 이용한 점이 이것이었다.
조방 관리인 자리를 노리던 그는 이승만에게 “만약 김지태가 조방 사장이 될 경우 조방의 막대한 이익금이 야당의 정치자금이 될 뿐 아니라, 결국 신익희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무고했고, 이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조방사건을 일으켜 정호종과 김지태를 구속했다는 것이다.
김지태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러나 얼마 후 강일매 관리 하의 조방은 오히려 이승만의 정치자금줄로 이용된다. 4800여 조방 노동자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조방쟁의는 이런 복잡한 이해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강일매는 네로였어”
처음부터 파행이었다. 조방 노동자들의 강한 반발을 무시하고 관리인이 된 강일매는 취임하자마자 폭군적 권력을 휘둘렀다. 자기 입맛에 맞게 채용과 해고도 일삼았다. 친인척을 불러들여 요직에 앉힌 건 물론이다.
“강일매는 조방을 자기 가족회사로 만들려고 했지. 자기 처남을 총무부장 시키는 식이었으니까. 강일매 행패가 대단했어. 아무 죄도 없는데 순사들 데리고 공장에 들어가서 말이지, 일하는 여공들 보고 이년 저년, 이거해라 저거해라. 내가 사장이라 그래도 그래는 안 했을 긴데. 여공들 고맙쟎십니까.
전쟁 중에 밤 일하고 말이지. 먹고살기 어려워서 조방에 들어왔다 카지마는. 강일매가 입이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자기보다 밑에 있는 사람이라카면 멸시하고 욕하고 이래 하는 기 보통이고, 그것도 반항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해요. 권총 찬 순사들이 같이 와 가지고 돌아댕기니까 여공들이 겁을 먹는 거죠.
그래 약한 여공들까지 쟁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강일매가 약한 종업원이라고 인간적 대우를 하지 않는 아주 막나니 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란 말이지. 우리 사이에서 강일매는 네로였어. 로마 폭군 네로.”
노동자들의 분노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강일매도 위협을 느꼈다. 노조 분열을 시도했다.
“강일매가 노조를 파괴할라고 했어요. 자기를 따르는 노조를 만든 거지. 돈으로 노동자들을 매수해 가지고 그랬다는 말이 있었어. 매수 안 하고는 그리 될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조방에서는 권력에 아첨하는 강일매파 노동조합이 있었고, 근로자를 위한 노동조합, 두 종류가 공존해 있었단 말입니다.”
51년 12월 7일, 조방 노동자들은 강일매에게 매수된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대한노총 조방지부를 새롭게 설립했다. 이상옥 씨가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것도 이때였다. 치열한 이념 대립 시기, 노동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좌익계 노총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좌우대립의 혈투 속에서 소멸된 이후, 대한노총만이 단일 노조로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12월 14일, 대한노총 위원장이자 초대 사회부장관이기도 한 전진한이 강일매를 만났다. 대화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쟁의에 불을 붙이는 일이 발생했다.
“전진한 씨가 강일매한테 맞았어요. 뚜드려 맞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하지만, 이유는 무신, 뚜드려 패니까 맞는 거지. 전진한 씨 정도 되면 국회의원도 지내고 국내 명사인데 말이지. 대한노총이 소위 말해 백만 맹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위원장이 강일매한테 매를 맞았이니 안 우습십니까. 그래 평화적인 해결이고 뭐시고 그냥 갈라섰어요. 노동조합이 위원장이 뚜드려 맞기까지 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썩은 거지. 노동조합도 아이고, 사람도 아이지 그거.”
“국회 결의까지 무시했어”
“폭군 강일매 물러나라.” 노조의 벽보가 나붙었다. 마침내 조방쟁의가 시작된 것이다. 51년 12월 15일의 일이었다. 당장 해고자가 나왔다. 박정대 위원장과 이상옥 부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몇 명이 첫 희생자가 됐다. 파업 후 열흘 째 되던 날이었다. 노조는 투쟁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종업원들이 무슨 전술을 썼냐 하면 조방에서 작업하고 내버린 베 쪼가리가 있어. 이 못 쓰는 베 쪼가리에다가 ‘폭군 강일매 조방에서 물러가라’고 써 가지고 등허리에 붙인 기라. 당시 12시간 2교대를 했는데, 이쪽 반 저쪽 반 할 것 없이 전부다 그랬어요.
사장실에 차를 대접하는 처녀까지 말이지. 그래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또 어떻게 했냐 하면 게시판에다가도 ‘폭군 강일매 조방에서 물러가라’고 써 붙였어. 그러니까 회사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건물을 오염시켰다’고 한단 말이지. ‘조방 건물을 오염시킨 죄다’ 이래 가지고 경찰이 게시판을 철거했어요. 그렇다고 그냥 있어서 되나. 마침 회사 앞에 수양버들이 있었어요.
작은 종이에 또 ‘폭군 강일매는 물러가라’고 써서 풀로 수양버들에 죄다 붙였단 말야. 그래도 안 돼. 그럼 쫓아내자, 직접 쫓아내야 되겠다 해서, 52년 1월 14일인가 그랬을 긴데, 점심시간에 1300명 정도가 사장 사무실을 에워쌌어요. 여공들이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강일매가 사무실에 있다가 ‘온다’ 카면 바로 밖으로 내뺍디다.”
그러나 강일매는 물러나지 않았다. 경찰력까지 동원하며 노동자를 조여왔다. 노조는 마지막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시 수도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52년 1월 21일 시위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조방노조가 선택한 장소는 임시 국회 건물 앞이었다. 최후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야간 근로를 하고 나온 3000여 명 여공 중 1000여 명이 국회 앞으로 나갔어요. 지금 경남도청 옆에 무도관이라고 안 있습디까. 무도관에 국회가 임시로 옮겨와서 집무를 보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 그걸 알고 여공들이 강일매의 행패라든지, 강일매가 폭군이라는 사실에 대해 국회에 진정을 하러 갔어.
그때 야당 국회의원 몇이 여공들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모양이니까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했어요. 들어보니까 뭐 이런 게 있나 말이지. 그래 바로 의사장 안으로 들어가서 조방 여공들이 시위하러 나온 이유를 모든 국회의원들에게 주지시켰다 이기지. 그래 결국 국회가 강일매는 물러나고 여공들은 쟁의를 풀라고 결의 안 했십니까.
지금 같으면 국회 결의가 나면 국회의원이라도 모가지가 달아날 거요. 근데 소용 없었어요. 강일매가 안 나가겠다고 그냥 버텼다기보다는 국회 결의를 이승만이 무시한 기지.”
그랬다. 처음에는 국회와 사회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개입하자 상공부는 강일매에게 14일간 휴직처분을 내리는 등 쟁의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강일매를 보호했다. 노동쟁의라면 빨갱이들 폭동이라며 가차없이 처단했던 당시,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가 하늘을 찔렀던 전시 상황의 엄혹함을 무릅쓴 시위였다. 결과는 시위 주동자들의 구속이었다.
이상옥 씨 역시 구속을 피하지 못 했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강일매는 기마경찰관과 정사복경관 호휘 하에 기세 등등하게 출근해 노조 간부들을 모두 사내에서 추방했다. 그의 권좌는 튼튼했다. 이승만이 그랬듯.
결국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은 3월 13일 오전 7시를 기해 파업중지를 선언했다. 3개월에 걸친 조방쟁의가 실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노동자들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조방쟁의는 강일매와의 싸움이 아닌 이승만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과 이를 이용한 기업가의 이해가 결합해 노동자와 기업을 망친 역사적 사례가 탄생한 것이다. 상처만 남은 52년 부산이었다.
방해자가 없어진 강일매는 3년 뒤인 55년 9월 조방을 개인 소유로 불하받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애초 경영능력이 부재했던 그는 불하 후 불과 4년만에 조방을 제3자에게 넘기고 만다. 그후 조방은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도태돼 68년 4월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시로 넘어갔다. 68년 5월 1일 결국 조방은 철거됐다.
“나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쟁의에 참가한 후 지금까지 제일 분개한 것이 말이지,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서도 국회 결의를 이행 안 했다는 거야. 4·19가 있어 가지고 이승만 권력이 없어지고 나면 조방도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야 되는 것 아입니까.
야당 세상으로 바뀌어도 노동자 구제할 생각은 못 가졌다 그래 봐야 안 하겠습니까. 그건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어요. 노동자가 도둑놈도 아이고, 반역자도 아이고, 뭐냐 이거라. 순수한 근로자가 말이지, 욕설이나 위협에 떨다가 직장까지 뺏기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이오.”
힘들게, 그래서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던 그의 언성이 순간 높아졌다. 5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도 아직 부족한 듯 했다. 분노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생활이 곤란했지. 결혼하고 아이도 있었는데. 돈이나 좀 숨카놨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래 할라 케도 안 되고.”
조방에서 파면 당한 후 그의 생활은 고단했다. 한 번 시작한 노동운동, 그게 평생 직업이 될 줄도 몰랐다. “조방에서 터득한 걸로 노조 일만 했다”는 그. 직업 운동가로서의 생활은 60대 후반의 나이까지 계속됐다. 평생을 운동하는 데 써 버린 사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운노조 교육원 원장으로 있을 땐데, 85년인가 전두환이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노동조합 정화운동 안 했십니까. 위원장 하고 간부들 두엇이 잽히 갔는데, 나는 잡아갈 건더기가 없었는지 안 잡아갑디다. 근데 그 후에 새로 온 간부들이 내가 좀 버거웠던 모양이라. 그래서 나왔지요. 무신 미련이 있다고요.”
지금 그는 괌에 가 있는 아들이 보내 주는 돈으로 아내와, 외손주 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조방쟁의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말을 아꼈다. 그런 그가 몇 마디 시작하다 또 그만두고 말았다.
“2년 전에 딸이 죽었어요. 죽은 것도 내 책임이라면 책임이지. 그 애가 남기고 간 외손주가 둘 있십니다. 그 애들 키우면서 살지요…. 나 고생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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