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3년 12월 2013-12-05   1203

[놀자] 내 머릿속에서 포슬포슬 익어가는 이야기

내 머릿속에서
포슬포슬 익어가는 이야기

 

이명석 저술업자

 

이제 날씨 예보를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 해가 떨어지면 사무치는 한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바쁘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겠지. 그러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어느 카페로 기어들어갈 거야. 종업원에게 무릎 담요를 빌려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선 눈이 그치길 기다리겠지. 그런데 창밖의 눈은 쌓여만 가고, 교통은 마비되고, 카페엔 나 같은 인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지. 그러다 결국엔 종업원도 손님들도 집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되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 긴긴 밤을 어떻게 보낼까? 

 

뱀파이어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서기 1816년은 유럽에서는 ‘여름이 없던 해’라고 불린다. 동남아의 화산 폭발로 생겨난 거대한 대기의 장막이 태양을 가리자 계절을 가리지 않는 극심한 한파가 몰아쳤던 것이다. 그때 스위스에서 휴양 중이던 시인 셸리와 약혼자 메리가 쌀쌀한 여름비를 피해 제네바 호수에 있는 디오다티 빌라를 방문했다. 빌라의 주인은 당시 유럽의 여성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미남 시인 바이런. 그들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최신 과학과 초자연 현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내기를 하게 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각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쓰자고. 그때 메리가 창조한 것이 ‘프랑켄슈타인’, 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가 만들어낸 것이  ‘뱀파이어’였다. 이후 2백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상상의 두 괴물이 이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긴긴 밤을 기기묘묘한 이야기로 채워가는 건 어떨까? 물론 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도 수없이 많은 영화, 드라마, 만화를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놀이는 잘 꾸며져 상품화된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각자의 머리로 만든 이야기를 서로 풀어놓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첫걸음은 자기 안에서 끄집어내는 거다.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에 얽힌 이야기도 좋고, 출생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아도 좋다. “때는 삼십 년 전 우리 부모님이 서로 성격 차이로 이혼을 결심하고 술을 마시고 싸웠는데……” 이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로 슬슬 입을 풀면 된다.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내 몸의 이야기, 내 안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테마는 각자의 몸에 있는 흉터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과 천사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배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만의 상처와 낙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몸에 흔적들을 새기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이마 가운데 깊게 패인 자국이 있는데,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쇠 리어카에 꽝 하고 부딪혀 기절했을 때 생긴 것이다. 정강이에 있는 흉터는 여섯 살 때 동네에서 가장 큰 수탉과 싸우다가 생긴 걸로 되어 있다. 약간의 허풍과 과장은 당연하다.

 

흉터는 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도 있다. 영화   <노팅힐>에서 할리우드 여배우인 안나가 런던의 동네 서점 주인인 윌리엄의 친구들 모임에 초대받는다. 식사가 마무리되자 그들은 한 조각 남은 브라우니를 상으로 걸고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불행 배틀’을 가진다. 요리사는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위기라고, 회사원은 주가가 폭락해 쫓겨날 처지라고, 휴 그랜트는 자신의 불행한 연애사를 토로하며 칭얼댄다. 안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몸매 관리 때문에 열아홉 살 때부터 굶어왔고, 남자 친구에게 학대당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받을 때마다 신문은 신이 나서 오락거리로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계기가 된다. 물론 우중충한 이야기만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입과 머리를 예열했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상상의 허풍을 널어놓아보자.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에서 하하와 장기하 밴드가 하늘에서 낙하산도 없이 떨어져내리는 무대 연출 이야기를 했듯이, 가능한 터무니없는 꿈을 이야기해본다.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스무 해 전 일요일 아침의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TV 앞에 모여들던 시대와는 다르다. 극장에 가득한 영화, 매일 수십 편씩 쏟아지는 웹툰, 온갖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이야기에 굶주리던 때의 절실함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이야기가 그립다. 육성으로 전해지고 우리 머릿속에서 살이 붙은 이야기 말이다.   

 

* <놀자>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화, 여행, 커피, 지도 등 호기심이 닿는 갖가지 것들을 즐기고 탐구하며, 그 놀이의 과정을 글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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