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여경_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최근 CCTV 감시가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강남경찰서가 거리와 주택가에 촘촘히 CCTV를 설치하여 논란을 빚더니 이명박 서울시장은 내년부터 CCTV를 서울시 전체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거리 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 31일 “노동자 감시 근절을 위한 연대모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전국 사업장의 90%가 한 가지 이상의 작업장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종류별로는 CCTV 카메라 설치(57.0%)가 가장 높았다. 우리 생활 곳곳이 감시 카메라 천지인 것이다.
내가 CCTV에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CCTV 감시가 인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CCTV가 침해하는 인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간단치 만은 않은 일이다. CCTV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CCTV로 인한 피해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질문한 사람은 CCTV로 인해 병을 얻었다던가 해고를 당했다던가 하는 답변을 기대한다. CCTV 뿐 아니라 개인정보와 관련한 최근 사안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 물론 CCTV로 인한 피해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CCTV와 개인정보가 문제되는 이유는 그로 인해 사후에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다. CCTV로 인한 피해에서 인권침해를 찾고자 하는 질문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인권 침해가 아니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CCTV가 피해를 방지한다면 오히려 CCTV를 설치하지 않는 것이 인권 침해라는 역설도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의 함정에서 벗어나 CCTV가 침해하는 인권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는 매우 생소한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프라이버시권 말이다.
원래 프라이버시권은 세계인권선언이나 우리 헌법에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라고 소개되었다. 그러나 198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프라이버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이후 프라이버시권은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을 소극적인 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전달하는 행위에 정보 주체가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적극적 권리로 재정의되었다. 그래서 “감시”란 일반적으로 정보 주체의 동의를 받지 않고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집적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CCTV가 인권을 침해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대한민국의 어떤 감시 카메라도 찍히는 사람에게 의사를 묻고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에 카메라를 설치하건 테이프나 파일을 어디에 얼마동안 보관하건 누구에게 넘기건 그저 카메라 주인 맘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공공장소에, 특히 수사 목적으로 CCTV를 설치할 때는 까다로운 요건을 갖추도록 제한한 것과 너무 차이가 난다. 그야말로 무법 천지인 것이다.
하지만 인권 때문에 CCTV에 반대한다는 주장이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가장 큰 이유가 기술적인 매료라고 생각한다. CCTV에 찬성하는 대부분의 주장은 CCTV의 쓸모에 주목한다. 뉴사우스웨일즈 프라이버시위원회는 감시 CCTV를 도입하는 회사는 보통 아홉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고 정리하였다. ①절도 방지 ②적대적인 기물파손·방화·파괴 방지 ③(생산성 향상을 위한) 작업 모니터링 ④고객 서비스 향상 ⑤고용인 교육 ⑥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⑦법적 의무 준수 ⑧(법적 분쟁 발생시) 회사 면책 ⑨(생산성 향상을 위한) 생산과정 모니터링 등이다. 이 기술적 논리는 ‘CCTV가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과 비교되거나 심지어 압도한다. 인권이 기술적 논리에 밀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인권에 대한 기술의 압도는 단지 논리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기술은 그 존재 만으로 인권에 위협적이다. 예를 들어 신체의 자유가 처한 상황을 보자. 오랜 인권 운동의 역사 속에서 국민을 체포·구속·압수·수색할 때에는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에서 말하는 영장주의 원칙이다. 그러나 이제 경찰은 카메라와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한다. 영장은 필요없다.
2001년 미국 경찰은 얼굴인식기술을 사용해 미식축구 결승전을 보려고 모여든 수천 명의 관중 가운데 19명의 수배자를 아주 간단하게 검거했다. 경찰은 관중이 경기장에 입장할 때마다 얼굴을 촬영하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데이터베이스와 신속하게 대조했고 경기가 끝났을 때 퇴장하는 관중 가운데 수배자를 손쉽게 골라내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수배자를 검거한다는 명목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혐의자 신분으로 수색하고 조사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실례합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따위의 양해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알릴 필요도 없이 매우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기술의 힘 덕이다.
CCTV나 카메라 감시 기술이 “실질적으로” 인권의 원칙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술의 효과는 특히 권력 관계의 영역에서 잘 발휘된다.
CCTV라는 기술에 대한 선택 여부를 사회적으로 결정할 때 이 문제는 곧잘 개인의 선택 문제로 여겨진다. 워낙에 OECD의 프라이버시 개념 자체가 개인의 동의권을 강조하고 있고 강남 CCTV의 경우에도 관건은 강남 주민들의 의사였다. 그러나 만일 주민들이 CCTV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다면 CCTV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강남 주민들의 80%가 CCTV 도입에 찬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어쩌면 OECD의 프라이버시 개념에 충실하게도 CCTV에 촬영되는 대가로 자기 재산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길 원한다. 자기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감시는 선택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CCTV는 순수한 개인적 선택의 영역에 있는 문제가 아니다. CCTV에 대한 수용 여부는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유래한다. 똑같은 카메라 감시의 문제인데도 강남 CCTV에 대한 반응이 얼마 전까지 문제되었던 카메라폰에 대한 대응과 매우 다르게 전개된 것도 이 때문이다. 카메라폰을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은 폭발적이었지만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의 CCTV에는 같은 논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다른 개인이 나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지만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권력에는 순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CCTV에 대해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권력 관계에 의해 제한된다.
CCTV에 대한 선택권 역시 권력 관계에 따라 차등적이다. 고용관계에 매여 있는 노동자는 CCTV를 “선택”할 수 없다. 강요받을 뿐이다. 노동자감시근절을위한연대모임의 위 조사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즉각 반박 입장을 내어 CCTV 설치는 사용자의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노동부 또한 2001년에 회사에 설치된 CCTV는 노동자 파업의 사유가 되지 못하고 사용자의 전속적 권리라고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CCTV 감시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잘리기 십상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권력 관계에 따라 철저하게 달라지는 CCTV의 효과이다. 우리보다 먼저 CCTV 논쟁을 겪었던 영국의 경우 “범죄 이전” 효과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 CCTV는 특정 지역에서의 범죄율은 저하시켰지만 전체적인 범죄율은 변화가 없었으며 범죄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켰을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범죄 이전 효과는 결국 “청정 구역”과 “우범 지역”을 철저하게 나누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한다. 이는 곧 신보수주의 영국 사회에서 사회 계층의 분리와 양극화 현상의 한 지표이기도 하다.
권력 관계 하에서 CCTV에 대한 선택권이란 단 두가지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속한 계층에 따라 CCTV를 찬성하는 것으로 그 동의권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거부할 권리도 없이 감시당하는 것.
결국 감시의 궁극적인 효과는 사회적 분리와 배제, 그리고 차별이다. 비록 지금은 추진이 중지되었지만 천호동에 설치될 뻔한 CCTV가 가져왔을 효과는 성매매 여성들의 영원한 사회적 격리이다. 호주 정부가 1980년대 전자주민카드를 추진했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도 “불법 이민”에 대한 철저한 적발과 소탕이었다.
하지만 감시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정보사회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내가 감시망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역설에서 발생한다. 미국은 얼마 전 유학생·교환방문자 정보시스템(SEVIS)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입국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SEVIS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향후 준테러범으로 미국 정부에 의해서 감시받겠지만 등록되지 않으면 아예 미국에 입국할 수 없다. 데이타베이스에 들어가면 감시받고 데이타베이스에 들어가지 않으면 차별받는 것이다. CCTV도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CCTV에 촬영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CCTV에 촬영되지 않고서는 강남이나 서울시를 활보할 수 없다. 강남이나 서울시에서 일할 수 없다. 하지만 CCTV에 촬영되면 그 순간 내가 있었던 위치, 나와 함께 있던 사람, 내가 했던 행동, 간혹 내가 대화한 내용까지 모두 기록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결백을, 이 기록으로 인해 입증받는다. 프라이버시 학자들이 경고한 바로 그대로, 나는 오로지 감시당함으로써 나의 존재를, 나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내게 CCTV의 문제는 무겁고도 어려운 주제이다. CCTV의 문제는 단지 하나의 카메라를 설치할 것인가 뗄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CCTV 감시가 많아질수록 범죄가 줄어들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많아질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기술 그 자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기술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착한 기술은 내재된 정치성을 발휘하는 견고한 사물이 되는 법이다. 궁극적으로 CCTV는 기술과 권력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문제의 반복이다. 권력 관계에 밀착되어 있는 이 기술을 우리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민주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CCTV는 이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와 진보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묻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감시 문제에 대한 대응의 단초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회구조적 문제인지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감시가 많아질수록 얼마나 많은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생겨날지를 생각한다면 CCTV를 반대해야 한다. 더불어 프라이버시권 또한 더이상 23년전 OECD가 천명한 자기정보에 대한 개인적인 결정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인 동의권의 행사를 넘어 동의보다 더 강한 정의, 즉 감시를 거부할 수 있는 집단적이고 사회적 권리가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을의 CCTV에 대한 선택은 CCTV를 거부하는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작업장의 CCTV에 대한 선택은 노동자가 해야 한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