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사무처 2005-07-24   2055

[회원에세이] 구멍 난 술잔

“아니! 이 술잔이 왜 이래?”

지난 4월 참여연대 봄 산행으로 도봉산에 갔을 때, 회원 ㄱ이 내민 술잔은 특이했다. 간장종지보다 작은 하얀 도자기잔, 이 자그마하고 예쁜 술잔의 옆구리에는 바닥으로부터 4분의 1 지점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잔을 쥘 때 손가락으로 ‘옆구리의 구멍’을 막아야 잔을 채울 수 있고, 손가락으로 계속 그 자리를 누르지 않으려면 단번에 마셔야 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면 ‘원샷 잔’이었다. 그는 이날의 행사를 위하여 집에서 준비해온 ‘아주 귀한 술’을 골고루 한잔씩 나눠 마시기 위하여 챙겨온 것이라 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너도나도 잔을 받아들고는 ‘원샷’을 했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한잔을 받아들고 단번에 꿀꺽 마셨다. 순간 목이 화끈하도록 술맛이 퍼져 잠시 켁켁거렸고, 내 모습에 다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누가 이런 잔을 만들었을까. 그 기발한 착상이 놀라웠다.

기발한 착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최근에 참여연대 회원 증가 추세가 둔해졌고 그로 인한 재정문제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ㅈ은 아까 그 구멍 난 술잔을 이용하자고 했다. 참여연대가 ‘그 술잔의 구멍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각시키자는 것이었다.

사실 참여연대가 국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돌려드린 돈은 어림잡아 4조원이 넘으니, ㅈ의 비유가 꼭 맞다. 얼핏 떠올려도 소송과 활동으로 폐지한 면허세(연 1회 1인당 1만원), 전파세(가구당 연 1회 1만2천원), 휴대폰 요금 8.3% 인하(가구당 평균 2만원) 등이 있다. 참여연대의 활동이 없었다면 구멍 난 술잔에서 술이 새듯, 국민의 주머니의 돈도 아무도 모르게 계속 흘러버렸을 것이다.

그뿐인가. 낙천낙선운동과 같은 의정감시활동이 있었기에 부족하나마 이정도로도 일하는 국회가 되었으며, 참여연대가 그동안 줄기차게 벌여온 경제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소액주주들의 권익 역시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최저생계비 현실화 등 국민 최저선 확보운동, 정보공개운동 등…. 참여연대는 줄줄 새는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지난 10년 동안 손에 쥐가 나도록 ‘술잔의 구멍’을 틀어막아온 것이다.

네덜란드의 소년이야기가 생각난다. 바다보다 낮은 땅인 네덜란드에서 바닷가의 둑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도시가 물에 잠기는 재해를 의미한다. 길을 가던 소년은 둑에 난 작은 구멍에서 물이 새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막기 시작했다. 구멍이 점점 커지자 팔까지 다 넣어야 했고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누군가 기진맥진하여 둑에 엎어져 있는 소년을 발견했고 그제서야 지난 밤 모두가 누렸던 평온은 그 소년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그 소년이 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상근자들이다. 불꽃 같은 젊은 날을 ‘보다 맑고 밝은 사회’를 위해 소진하는 그들. 우리 사회의 구멍을 막느라 기진맥진해진 그들을 부축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역할은 우리의 몫이 아닐까.

*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해숙(참여연대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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