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부터 필자는 SK텔레콤과 관련하여, 불법행위 및 부실경영 책임자의 이사직 사퇴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험한 일 중 그냥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부분이 있어 경제프리즘 코너를 활용하려 한다.
장면 1.
필자는 정말 ‘우연한 기회’에 SK그룹의 회장이자 SK텔레콤의 이사인 손길승씨와 관련된 뇌물사건을 발견했다. ‘우연한 기회’를 강조한 것은 자칫하면 이런 사실을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채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남기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출마를 반대하는 측에서 총선연대 사무실을 겸하는 참여연대 사무실로 이 전 위원장이 지난 2000년 가을 SK그룹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1심 재판문(2003.7월 판결)을 보내왔다.
익명으로 왔기에 누가 보냈는지는 몰랐으나 이 전 위원장의 국회의원 선거출마를 반대한다는 메모와 함께 판결문을 보내온 것이다. 필자가 우연히 팩스수신 문서를 정리하던 와중에 그 판결문을 보았고, 예전에 검찰이 이 전 위원장을 기소했다는 언론보도만 기억할 뿐 그 결과는 몰랐던 차여서 13쪽의 판결문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내용은 검찰이 이 전 위원장을 기소할 때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들이라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런! 판결문 8쪽 다섯째줄부터 여덟째줄까지의 문장을 읽다가 필자는 숨을 잠깐 멈추었다.
“사. 그로부터 며칠 후 김창근은 10억원을 피고인(이남기)에게 직접 교부하라는 손길승 회장의 지시에 따라 피고인에게 그 의사를 전달하였으나, 피고인은 이를 거부하고 ○○사 신도회장인 ○○○을 통하여 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손길승 회장의 뇌물제공 지시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이 SK그룹측으로부터 뇌물자금을 받았다고 알려진 것은 2002년말이었다. 그리고 그 1심 재판결과는 2003년 7월에 알려졌다. 그러나 여태껏 손길승 회장이 그 사건에 개입했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황당함’은 이런거다. 어찌 검찰은 김창근 본부장은 기소하고 또 언론에 범죄행위를 공개하고서 손길승 회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비록 돈을 직접 전달한 사람은 김 본부장이지만 돈을 주라고 최종 지시한 사람은 손 회장인데 왜 손 회장의 행위는 공개되지 않고 있었을까?
역사는 우연에 의해 진행되기도 한다지만 만약 이번에 이남기 전 위원장의 출마를 반대하는 측에서 그의 유죄를 입증하는 그 판결문을 참여연대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참여연대 경제개혁팀에서 그 판결문을 읽어보지 못했더라면 손길승 회장의 범죄행위 한 가지는 여전히 미공개되었을 것이다.
요즘 기업인들중에 가장 곤혹을 치르고 있는 이가 바로 손길승 회장이다. 하지만 그것도 2003년 2월부터 서울지검이 SK그룹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를 벌인 이후다. 따라서 그 이전 2002년까지는 손회장은 검찰로부터 괜찮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 손 회장과 김 본부장이 뇌물로 사용한 자금이 SK텔레콤의 자금이었다는 점도 판결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SK텔레콤 이사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면 SK텔레콤은 왜 이런 사실을 주주와 회사관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1심재판만 끝난 단계라서? 아니면 아무도 몰랐나? 검찰도 가야할 길이 멀지만 기업도 가야할 길이 멀다.
장면 2.
국민연금은 사회복지를 다루는 이들의 주요 관심대상이지만 자본시장과 관련된 이들의 주요 관심대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자본시장에 투자하는 금액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규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산운용과 관련하여 국민연금이 기업지배구조를 고려할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일반 개미투자자들보다 큰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들, 그러니까 투신운용사나, 각종 연금 및 기금펀드들이 지배구조개선을 투자지침에 반영한다면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좀더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점이므로 국민연금이 이런 계획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환영받을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민연금이 지배구조를 고려하여 자산을 운용할 것이라는 말이 과연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지 볼 수 있는 기회가 필자에게 있었다. 그것은 불법행위 혐의로 1심 유죄판결을 받았고 또 본인도 범죄혐의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손길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SK텔레콤 이사직에서 자진사퇴할 것을 권유하는 참여연대의 활동과 관련해서였다.
국민연금은 자진사퇴를 권유안건을 SK텔레콤 주주총회 안건으로 제안하자는 참여연대의 요청(주주제안 참여요청)을 거부했다. 사실 국민연금뿐만아니라 국내 기관투자자(투신운용사)들은 모두 거부했다. 반면 외국계 기관투자자들중 다수는 참여연대의 제안에 일언반구의 추가 요구없이 선뜻 동의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산운용에 있어 지배구조개선 원칙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국민연금의 계획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사실 국민연금은 지난 2001년 참여연대가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제안했던 이사후보에 대해 찬성을 표한 바 있다. 당시 참여연대는 국민연금의 이런 행동은 기업측의 요구에만 따르지 않고 기관투자자가 지배구조 개선원칙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호평한 바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국민연금은 왜 달리 판단을 했을까? 아직 지배구조개선 원칙에 따라 자산을 운용할 것이라는 방침을 확고히 세우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이번 사안이 지배구조개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판단해서일까? 아니면 실무진들의 의견을 국민연금 고위층이 눌렀기 때문일까?
어쨌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검찰과 기업에게만 가야할 길이 더 남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기관투자자, 특히 연금운용 기관투자자들에게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가야할 길은 한참 남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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