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센터(종료) 미분류 2002-08-01   2573

과학기술의 민주화

<번역> 김병윤 | 우리 모임 회원

<편집자주>

이번의 기획번역은 포괄적인, 이론적 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글은 2000년에 다니엘 리 클라인만이 엮은 {과학, 기술, 민주주의}의 결론에 해당되는 글이다. 클라인만은 과학기술의 민주화, 과학기술의 시민참여를 하나가 아니라 과학자들의 자기통제와 지식생산의 민주화를 양 극단으로 하는 연속선상에 배치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연속선상에 배치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그는 단지 분류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개별 사례에서 드러난 과학기술의 민주화의 장애물과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이 글의 장점이다.

과학기술영역의 민주적인 참여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다보면 흐릿한 불분명함과 그에 따른 오해로 인해 종종 핵심을 잃곤 한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경계가 불분명하고 흐릿한 논의를 명료하게 하고 과학기술영역의 시민 참여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나는 이를 위해서 [이 글에서] 세 가지 작업을 하려고 한다. 우선 기존의 사례연구와 사례분석을 점검하면서 과학기술영역에서의 시민참여의 몇 가지 형태를 구별하려고 한다. 나는 이런 구분 작업을 통해 과학기술영역의 시민참여라는 쟁점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용어에 대한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논쟁 참여자들이 과학기술 문제에 대한 민주적 참여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토론 참여자들이 서로 다른 정의를 갖고 있다면 토론과정에서 드러나는 의견의 불일치는 다양한 가치나 평가때문이 아니라 오해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토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함으로써 미사여구를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캐리커처같은 이미지로 토론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차이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의 두 번째 목표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기술영역의 시민참여를 반대하는 입장은 대체로 일반인들이 기술의 뉘앙스나 과학의 방법론적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cf. Levitt & Gross, 1994b).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묘사한 사례들에 따르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가정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으로부터 일반인들을 배제하는 선험적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민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논쟁에서 [도덕적이거나 감정적인 측면이 아닌] 지적인 측면에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과연 어떠한 조건에서 가능할 것인가는 결정적인 물음이며, 내가 고려하는 세번째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앞의 여러 장에서 다뤄진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최적의 시민참여를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적 여유와 다른 자원들 ― 뿌리깊은 가정들을 검토할 수 있는 기회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불평등의 효과를 약화시키는 메커니즘 등 ― 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과학기술의 민주적 참여를 향상시킬 수 있는 제안들의 개략적인 틀을 잡아볼 것이다.

민주화된 과학의 여러 변이들

기술과학영역에서의 시민참여의 사례는 여러 차원으로 구별할 수 있다. 우선 일반인들이 참여한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배타적인 영역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활동 영역이나 의사결정 영역에 일반인들이 어느 정도까지 참여하는가? 일반인들은 어떤 지점에서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가? 둘째, 우리는 전문가 참여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시민-과학자 상호작용의 조직적 동학을 고려해야만 한다. 개별 집단들의 참여의 본질을 정의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논의 또는 참여의 용어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반인들은 자료, 측정수단, 분석 등을 전문가들에게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의존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여 행위자들이 얼마나 ‘기술적’

인 측면과 ‘비기술적'(사회적이거나 윤리적)인 측면을 얼마나 구분된 것으로 인식하며 그들이 일반인들이 고려하기에 적합한 ‘기술적’ 사안으로 생각하는 정도를 평가해야 한다. 과학공동체의 고전적 입장은 기술적 문제는 전문가들의 고유한 영역이며 비기술적 쟁점만이 일반인들에게 적합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들을 고려할 때, 과학영역의 시민참여의 여러 형태들을 연속선상에 있는 변이들로 볼 수 있다. 단일한 차원에 배열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이 글에서 나는 네 차원을 다루고 있다 ― 이런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엄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네 차원들이 실제 사례에서는 매우 긴밀하게 상호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전혀 실익이 없지는 않다. 실제 사례들을 연속선상에 놓고 내가 제시한 네 차원으로 평가해보면서 각각의 경우들을 구별짓는 특징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사례들은 과학자 자기통제(self-governance)에 대비되어 정의되고 있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과학자 자기-통치를 잘 정의하고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어떤 환경에서는 ‘연구주제의 선택과 실제 행위의 선택은 전적으로 과학자 개인의 책임이다. 발견에 대한 권리주장은 집단으로의 과학자들에 의해 표현된 과학적 견해의 관할영역 하에 있다'(Polanyi, 1951, p.53).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런 경향은 전문가들만이 과학 및 과학의 방향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대중들의 의지’는 이러한 판단에는 전혀 기여할 수 없다(Polanyi, 1962, pp.67, 72).

이러한 연속선의 끝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의 사회적 차원을 인정하고 모든 당사자들이 이것을 비과학자의 영역이라고 인정하면서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가들이 고려해야한다고 인정하는 상황이 한쪽 끝단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연방정부의 연구예산 지원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전통적인 절차를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연방기구가 연구예산을 받아야 하고 어떤 프로그램에 예산이 할당되어야 하는 지는 선출된 대표자들이 결정한다. 과학자들은 실현가능한 연구를 분별해내고 구체적인 연구제안의 ‘기술적’ 장점들을 평가한다.

다른 끝에는 일반 시민들이 과학적 방법의 규칙들에 도전해서 지식의 생산과 평가에 참여하는 사례가 있다. 이런 사례들은 일반인들이 전통적으로 숙련된 과학자들의 권한이라고만 여겨지던 의사결정이나 다른 실천에 참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급진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례들은 기술적인 것과 비기술적인 것이 구분되는 영역이라고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민들은 적절한 연구의 설계와 자료수집과정은 비기술적인 고려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학정책의 민주화

내가 제시한 ‘민주적 과학’의 사례들이 이런 연속선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나는 기존의 문헌들에서 두드러진 몇몇 사례를 선정했고 과학영역의 시민참여에서 무엇이 쟁점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중요하고 두드러지는 요소들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이 기술적 실현가능성과 장점들을 규정하고 선출된 대표자들이 사회적인 관심을 부여하는 연구우선순위 결정 과정을 연속선의 한쪽 끝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례와 바로 인접해서 과학연구에 대한 자원배분을 결정하는 데에 시민들의 참여를 증대하려는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사례가 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국립보건원은 연구제안서를 평가하는 자문패널에 소비자들을 참여시키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연구제안의 평가는 두 단계를 거치는데, 첫번째 단계에서 과학자들이 제안서의 기술적인 장점들을 점검하면 과학자들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연구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여부를 미국 국립보건원의 우선순위와 사회적인 고려와 더불어 첫 번째 단계에서 수행된 과학적 평가에 의해 기초하여 결정한다 (Dickson, 1988, p.327).

이 사례에서 의회는 연방예산을 할당하는 데에 따르는 헌법상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단지 대표자를 뽑는 것만으로 간접적으로 권리만을 보장받기 때문에 의원들이 [과학기술정책에] 관련된 절차에 참여해서 수행하는 역할과는 구별된다. 게다가 예산에 관련된 의회의 결정은 법적인 강제력을 갖고 있지만 이 위원회에서 시민들이 내린 결정은 엄격하게 말해 자문에 불과하다. 이 경우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술적인 기준이 여러 사회적 고려보다 우선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가의 순서를 바꾸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과학자들은 사회적 기준을 만족하는 제안들이라면 언제나 역시 기술적으로 수용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례가 과학을 민주화하려는 노력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방식과 거리를 두고 있는 사례로 분류되는 이유는 과학자들의 자기통제 원리를 인정하고 있고 연구제안의 기술적 장점 ― 공인된 전문가만이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다 ― 과 사회적 우선순위라는 가치내재적 물음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결정과정은 일반인들이 비기술적인 사안을 다루고 과학자들은 기술적인 사안을 다루는, 전통적인 책임의 분업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게다가 과정 상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과학자들은 비기술적인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는 결국 과학자들의 자기통제라는 전통적인 관점에 대해 진지하게 도전하지 않고 기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사고를 당연시하고 있다.

생명공학 또는 유전자재조합(recombinant DNA) 연구의 위험에 대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논쟁에서는 대중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과학 연구의 규제과정에 대한 시민참여의 문제가 쟁점이었다 (Krimsky, 1982; Wright, 1994). 몇몇 눈에 띄는 경우에, 일반 시민들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한 지침을 설정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앞서 논의한 우선순위 결정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속선 상에서 볼 때, 과학자들의 자기통제보다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시킬 수 있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는 비과학자들이 비기술적인 기준을 토대로 세금을 할당하는 결정을 내리는 게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이지만 기술적 차원과 비기술적 차원에 대한 평가는 서로 구별되는 행동으로 간주되며 일반 시민들은 기술적 차원의 평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지침을 설정하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하려면, 시민들은 기술적 문헌과 씨름을 해야만 한다. 시민들이 고려해야 하는 지점은 ‘사회적’이거나 윤리적 문제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래에 설명할 두 사례에서도 드러나지만 사회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논의에서 정당하지 못하다고 간주된다. 여기에서는 아직도 과학자들이 무엇을 위험으로 간주되는 지를 정의하고 일반인들은 수용가능한 위험의 수준을 결정하는, 전통적인 분업이 남아있다.

연방정부 수준의 사례를 보면, 1974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유전자재조합연구행위에 대한 연방 지침을 작성하고 실행과정을 조정하기 위한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RAC, Recombinant DNA Advisory Committee)를 구성했다.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를 구성했던 미국 국립보건원 관료들은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를 전문가위원회라고 생각했다 (Wright, 1994, p.165). 사실, 초기에 불붙었던 유전공학연구에 대한 대중적 논쟁은 사회적 영향이나 윤리적인 고려는 제쳐두어야 하며 과학자들만이 보건 및 환경에 대한 잠재적 위험에 대해 기술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Wright, 1994; Krimsky, 1982).

1976년 4월에는 대중들의 압력에 힘입어 과학자가 아닌 위원이 한 명 참여하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이들 일반 참여자의 시각은 위원회 내에서 상당히 주변화되었다고 한다 (Wright, 1994, p.214). 결과적으로 1976년 6월에 발표된 최초의 미국 국립보건원의 유전자재조합연구에 대한 공식적 지침은 생명의료 연구공동체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었다 (Krimsky, 1982, p.154-162; Wright, 1994, p.190).

나중에 미국 국립보건원 지침이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에 의해 수정되는 과정에서는 새로운 지침을 위해서는 위원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폭을 확대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반대운동이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위원의 20%는 ‘관련 법률, 전문가들의 행위와 실천기준, 공공보건 및 산업안전, 환경문제에 관련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Wright, 1994, p.310에 인용된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 문서). 위원회는 확대되었지만 ‘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블록에서는 [지침의 완화를 기대했고] 소수만이 보다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Wright, 1994, p.354). 게다가 위원 대다수는 연구에 있어 절대적인 [과학공동체의] 자기통제를 옹호했고 노동자나 환경에 대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Wright, 1994, p.356). 마침내 위원회가 분할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과 위원회 내의 동료들이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의 의제를 결정했

고 위원회의 진행과정은 위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집단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렵게 했다.

어떤 수준에서 보면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는 과학적 작업에 시민참여의 사례로서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를 분석한 연구자들은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기는 했지만 정작 시민들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Krimsky, 1982; Dutton, Preston, & Pfund, 1988; Wright, 1994). 실제로 초기의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는 전문가들의 자기통제적 기구였고 민주적 참여의 연속선에서는 한쪽 극단을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 비과학자들이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미약했고, 기껏해야 약한 시민참여의 사례에 불과했다. 다시 한번 반복하면,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위원회는 실제로 과학자들의 자기통제가 지배했기 때문에 민주적 참여의 연속체의 한 극단에 있는 [과학공동체의] 자기통제에 가깝다. 과학자들이 의제를 결정하고 일반인들의 영향력을 주변화시켜 비기술적인 문제들이 진지하게 숙의되지 못하도록 배제했다.

매사추세츠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CERB, Cambridge Massachusetts Laboratory Experiment Review Board)는 유전자재조합자문위원회처럼 유전자재조합연구를 규제하는 데에 수반하는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Krimsky, 1982; Krimsky, 1986a; Goodwell, 1979; Lear, 1978; Waddel, 1989; Dutton,

Preston, & Pfund 1988).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는 전체 위원들이 비생물학자들이어서 유전자재조합연구위원회보다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유전자재조합연구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사안에 대해서만 제한적인 책임을 가졌다.

1976년 봄, 하버드 대학 내의 한 실험실을 개조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연구실에서는 당시에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moderately risky)’ 종(種)들의 유전자스플라이싱을 하려고 했다. 대학에서의 논쟁은 지역사회로 퍼져나갔고 캠브리지 시장은 이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계획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우려때문에 캠브리지 시의회는 높은 수준의 유전자재조합연구에 대해 일시적인 실행중지(moratorium)라는 억제정책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전자스플라이싱연구 규제에 대한 시당국의 정책을 제안하기 위한 평가위원회의 설립을 결정했다.

위원회의 구성은 생물학자를 배제한 캠브리지시의 지도층 인사로 구성되었다. 생물학자를 배제한 이유는 이 사안에 대해 생물학공동체 내부가 분할되어 있었고 이들이 이미 이해집단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원들은 캠브리지 전역에서 고르게 선출되었고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균형을 맞췄다. 위원으로는 건축엔지니어, 의사, 과학철학자, 간호 및 병원행정가, 간호사, 사회복지사, 지역활동가, 전 시의회 의원, 기업가, 전 시장 등이 포함되었다.

위원회는 1976년 후반기에 4개월에 걸쳐 매주 2회의 모임을 가져, 전체적으로 100시간 정도를 논의했다. 시민배심원 시스템을 활용해서 대략 1/4정도를 유전자재조합연구 옹호론자와 반대론자의 주장을 듣고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으로 할애했고 나머지 시간은 집단 학습을 했다. 그리고 위원들에게는 해당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 배포되었고 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읽어야만 했다. 위원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의 초안에는 유전자재조합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미국 국립보건원의 억제 지침보다 엄격한 기준을 도입하고 있었고 캠브리지시 내의 실험실을 감시하는 생명재해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보고서가 발표된 후 위원회의 진행과정 및 최종적인 결과에 대해 폭넓은 동의를 보였다. 당시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어떤 분과장은 위원회의 보고서가 ‘일반 시민들이 복잡한 기술적 쟁점을 지적이면서 솔직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한 의구심을 확실히 잠재울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Singer, 1977, p. 30; Jennings, 1986).

지식생산의 민주화

과학자들의 자기통제로부터 연속선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하면 필 브라운과 에드윈 미켈슨(1990)이 ‘대중역학(大衆疫學, popular epidemiology)’이라고 부른 실천이 있다. 역학은 질병의 분포 또는 이러한 분포를 설명하는 물리적 조건과 요인들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역학에서 다루는 현상을 연구하는 기술은 교육받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지만 대중역학은 ‘일반인들이 과학적 데이터 및 기타 정보들을 수집하여 전염병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지식과 자원을 지도하고 정렬한다’

(Brown & Mikkelson, 1990, pp.125-126).

위험이 존재하는 공동체에 사는 시민들은 과학자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이 알기 전에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일상적으로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수행하는 과

정에서 얻어진 관찰자료들은 주민들이 공동체 내의 질병의 발발과 어떤 오염물질과의 관계에 대한 가설을 발전시키도록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주민들은 교육받은 연구자들과 함께 스스로의 연구 및 작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매사추세츠 워번의 지역주민들은 워번 일대에 백혈병이 밀집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Brown & Mikkelson, 1990; Krimsky, 1984a, pp.253-255). 주민들은 (그들이 악취가 나고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지역의 물과 백혈병과의 관계를 가설로 만들었고 공무원들에게 검사를 촉구했다.

검사결과 물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되었고 하버드 대학의 생물통계학자와 주민들이 함께 작성한 조사보고서와 검사결과는 물과 백혈병 사이의 주민들의 가설을 확증했다. 조사도구와 조사설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시민들에게 통계학 및 역학의 도구를 가르쳤고 주민들은 질문들을 일반인들에 맞게 수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추가적인 연구 주제를 지적했다.

대중역학은 ‘질병의 인과연쇄의 일부로 사회구조적 요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역학과 차이가 있다 (Brown & Mikkelson, 1990, p.126). 이런 사실은 지역 주민들이 전통적인 역학자들보다 정치경제적 요인 ― 기업들이 오염을 유발하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해야하는 유인의 결여, 규제당국과 오염유발기업 사이의 친밀한 관계, 정부감시예산의 부족 등 ― 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런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에 따라 기업의 관행과 정부정책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공동체에 위험이 닥치게 되면 대중역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무언가가 있는데 실수로 어떤 연관을 간과하기 보다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여러 변수들 사이의 연관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연구방법의 용어를 이용하면 대중 역학은 부정의 오류(false negatives, 유형 2)보다는 긍정의 오류(false positive, 유형 1)을 선호한다. 역학의 전문가들은 유형 2를 더 선호하는데, 이는 [대중역학의] 연구과정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뉴욕주 보건국에서 일하는 비버리 페이건(Beverley

Paig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는 가치판단의 문제이자 우리들이 오류의 결과를 무엇으로 인식하는 지에 달려있다. 어떤 일이 사실이 아닌 데에도 사실이라 결론짓는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잘못된 경로를 따라가거나 이후에 오류가 밝혀진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해당 과학자들의 평판이 의심을 사거나 나빠질 수도 있다. 대조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과학자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은 상당히 실망스럽지만 과학자들의 평판을 해치지는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유형 2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Brown and Mikkelsen, 1990, p.126에서 인용).

대중 역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민주적 과학이라는 연속선상에서 과학자들의 자기통제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고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전형적으로 공인된 과학자들의 영역이었던 실천영역에 일반인들이 참여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한 위험수준을 결정하고 사회적 우선순위에 대한 결정을 내릴 뿐만 아니라 가설, 연구설계, 자료수집, 자료분석에 참여한다. 둘째, 대중 역학은 기술영역과 비기술영역 사이에 해석학적 경계가 있다는 사고에 도전한다. 대중 역학 연구를 수행했던 사람들은 전통적인 역학연구에서의 연구설계, 자료수집, 자료분석이 연구자들이 사전에 갖고 있던 가정이나 참여정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가설에 도전한다. 게다가 대중 역학연구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자신들이 참여한 작업에 매우 강한 개인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고 그들은 이러한 [개인적] 투자가 그들이 추구했던 물음과 그들이 찾고자 한 수용가능한 확실성의 기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노력이 공인된 과학자들과 전혀 관련을 맺지 않고 일반인들에 의해서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연속체의 가장 끝에 있는 경우는 아니다. 대중 역학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전형적으로 전통적 역학자들이었다. 이러한 일반인들의 지식생산은 전통적 역학자들의 지식생산과는 달랐지만 그들은 전통적 역학의 기준에는 부합했다. 대중 역학처럼, 에이즈 치료활동가들이 생의학 지식의 생산과 평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보면 과학자들의 자기통제라는 극단적 형태의 요소들을 거의 찾을 수 없는, 민주화된 과학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장에서 스티븐 엡스타인이 설명한 것처럼, 에이즈 치료활동가들은 전통적으로 공인된 과학자들에게만 한정되었던 실천 ― 실험설계, 자료수집 등 ― 에, 때로는 과학자들과 협력하거나 아니면 과학자들 없이 참여해왔다. 또한 활동가들은 기술영역과 비기술영역이, 특히 에이즈 연구에서는 과학영역과 윤리영역이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에게 설득시키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활동가들은 에이즈 치료 임상실험 승인율과 ‘주류 연구의 속도 및 시야’를 보고 좌절이 심해져갔고 (Indyk & Rier, 1993, p. 6; Epstein, 1995), 전통적인 임상연구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례로 활동가들은 2상 AZT 실험에서 플라시보(placebo, 僞藥)을 사용하는 연구는 ‘성공을 위해 충분한 수의 환자가 죽기를 원하는 연구다.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플라시보 집단의 사망자들을 통해 적극적인 치료가 상대적으로 이롭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한다’며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Epstein, 1996, p. 202). 활동가들은 진료기록이 상이한 에이즈 환자들을 해당 실험집단과 비교하는 방법과 이게 어려울 경우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치료집단에 있는 환자들 자신의 진료기록과 대조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런 방법은 다른 영역의 생의료학계에서는 이미 사용되는 임상실험 방법이었다.

이런 논의는 플라시보 사용의 윤리적 문제만을 제기하는 게 아니다. 활동가들은 자신이 플라시보 [투약]집단에 속할 것을 우려하는 임상실험의 대상이 약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찾게 되면서 통제의 ‘순수성’이 감소된다고 주장했다. HIV 보균자나 에이즈 환자들의 지지를 얻는 실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활동가들의 시각을 통해 활동가들은 여러 연구자들의 존중을 받았고 임상실험의 설계에 대한 논의에서도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Epstein, 1996, p. 249).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은 표준적 연구관행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 기반 신약실험을 설계하는 지역 의료전문가들과 협력했다. 암연구에서 확립된 표준을 따르는 샌프란시스코 카운티공동체컨소시엄은 지역기반실험을 조직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엡스타인은 이런 사고를 ‘의사들이 약을 배포하고 환자를 모니터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련의 활동을 환자와의 정규적인 진료활동의 일부로 통합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pstein, 1996, pp. 216-217).

뉴욕의 공동체연구계획(CRI, Community Research Initiative)의 작업은 공동체 실험 모델에서 상당히 돋보이는 사례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에이즈 환자나 HIV보균자들은 어떤 실험이 수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실험들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제약회사들은 점차 공동체연구계획에 관심을 높여갔고 지역기반연구를 수행하는 집단들과 몇몇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Epstein, 1996, p. 217).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펜타마이딘(pentamidine)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연구계획과 카운티공동체컨소시엄이 수집한 자료를 활용한 점은 의미있는 일이다. 식품의약청장은 공동체연구계획의 실험 모델을 칭찬하기도 했다. 이 모델은 이후에도 미국 국립보건원이 후원한 몇몇 실험에서 이용되기도 했다. 식품의약청이 지역기반 실험으로부터만 획득된 자료에 의존해서 어떤 약을 승인하기는 이 사례가 처음이었다 (Epstein, 1996, p. 218).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은 의학자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Epstein, 1995, p. 417). 1장에서 엡스타인이 이미 설명한 것처럼 활동가들은 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지만 에이즈에 관련된 생의학의 기초를 학습할 수 있었다. 활동가들이 에이즈 연구와 임상실험을 이해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Epstein, 1995, p. 419; Epstein, 1996, pp. 230-232).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은 공인된 전문가만이 생의학의 일상적 연구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관념에 도전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들의 경험은 공인된 과학자가 되지 않고도 임상실험의 언어와 추론양식을 이용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이들 활동가들은 기술영역(연구방법)과 비기술영역(윤리적 문제)을 정확하게 구분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이런 두 영역의 흐릿한 경계에 대한 관심이 ‘더 나은 과학’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과학의 민주화의 장애물

내가 앞에서 설명한 사례들은 과학민주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주요 논의들 ― 일반인들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기술적 문헌을 이해할 수 없다 (Levitt & Gross, 1994b) ― 이 선험적으로(a priori) 수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전문가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사안에 때로는 지적인 참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기술이 진정으로 민주적이 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은 만만하지 않다.

이런 장애물들은 미국의 사회조직의 일부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다. 미국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성이 팽배하며 공인된 전문가의 판단이 우월하다는 신념이 만연한 사회다. 이런 맥락에

서 시민참여는 자유시간(Krimsky, 1984b, p. 48)과 시민들이 접근가능한 경제적 자원(Nelkin, 1984, p. 34) 등의 이유로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반인들로 구성된 심의기구에서도 성적 불평등에서 기인한 사회동학이 심의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Bohman, 1996).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CERB) 사례는 이런 류의 장애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위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협소한 책임을 승인했다. 그들은 전문성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에 따라

(Goggin, 1986b, p. 264; Kleinman & Kloppenburg, 1991), 기술적 쟁점과 비기술적 쟁점을 분명히 구분했다. 그들은 유전자조작유기체의 안전성에 관련된 문제와 유전자조작유기체를 보관하는 물리적 구조물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만을 다루었다. 위원들과 참관자들이 윤리적·사회적 문제들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은 공식적 논의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구분은 바로 해당 분야의 지도적 과학자들이 원했던 바였다. 유전자조작 논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생물학자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는 ‘가치의 문제나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질문들이 토론에서 빠져있다고 말했다 (Krimsky, 1982, p. 106에서 인용). 이는 가치의 문제나 정치적인 동기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논의를 제약했던 결정은 ‘가치의 문제나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수용가능한 위험수준의 결정이나 위험과 편익의 조정은 필연적으로 가치내재적일 수 밖에 없다 (Krimsky, 1986b). 그러나 이런 쟁점들은 고려되지도 않았다.

과학자들이 정의한 논쟁의 용어를 받아들이는 한편,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의 설립은 전문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하기 보다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원회는 공인된 과학자들의 증언만을 들었고, 이런 절차상의 선택은 위원회의 결론 뿐만 아니라 위원들 자신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원들도 인정한 것처럼 이런 결정이 전문가들이 증언한 실제 내용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자격조건에 의해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Goodell, 1979, p. 40).

일반인들이 몇몇 사람들을 전문가들로 인정했고 관련된 영역에서의 그들 주장의 타당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고 해서 전문가들의 발언이 언제나 거부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스티븐 셰핀의 책(Shapin, 1994)은 신뢰는 지식이 존재하기 위한 기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발언’에 의지해야만 한다. 지식을 방어하면서 셰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의존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현재 지식과 맺고 있는 관계가 도덕적인 색채를 갖고 있고 이러한 도덕적 관계를 지시하는 … 단어는 신뢰’라고 설명했다 (Shapin, p. xxv). 따라서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이 ‘평판이 좋고 진실된 원천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증언에 부합되는 행동을 한다’면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셈이 된다 (Shapin, 1994, p. 9).

과학자들의 경우, 우리가 그들이 대표하는 제도를 신뢰하는 지, 그리고 [제도들이] 일상적인 규칙위반을 억누르기 때문에 신뢰하는 게 아닌지를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규칙 위반은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옛말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 말과 관계가 없다면 그 사람을 보증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이 자유롭게 결정된다면 자유로운 행동을 삼가하는 것은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다’ (Shapin, 1994, p. 39). 우리가 고려하는 사례를 생각해보면 전체적인 묵인은 자기검열(self-policing)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세계에서 어떤 사람의 ‘발언’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다. 나는 대중 역학과 에이즈 치료 활동에 대한 논의에서 의미있는 발견으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이며 정당한 연구 규약을 구성하는 것이 구체적인 제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실제로 과학자의 발언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생각되는 규범, 그 자체

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물론 일관성있고 냉정한 회의주의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동안에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뢰가 적절한 대응이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 가족, 개인들의 미래가 문제가 된다면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를 갖는 게 건전한 태도이다. 어떤 의사의 진찰을 의심하고 제2, 제3의 의견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이성적인 행동이다. 시민들은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자격조건만으로 어떤 문제를 틀지우고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이 타당하거나 적합하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외부 전문가의 지위의 문제 이상으로 위원회 내부의 권력동학은 외부 사회에 존재하는 권력동학을 반영하고 있다. 캠브리지 시당국에서는 위원들의 일부를 전문성을 기초로 선정했다. 그러므로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는 이론적으로는 건강 상 위해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의료전문가와 당시 제안된 보관시설의 구조적 유효성을 평가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포함시켰다. 이런 결정은 다른 위원들에 대한 위원들 자신의 태도에 의해 강화되었다. 위원들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일반인의 영역과 전문가의 영역 사이의 구분의 정당성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전통적 전문가들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했다. 위원회의 역사에 대한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위원들의 확신은 ‘이내 연구의 옹호자가 되었던 두 명의 말많던 의사로부터 “반대만 하는 사람(devil”s advocate)” 노릇을 했던 터프트(Tuft) 대학의 과학철학자[셸던 크림스키(Sheldon Krimsky)―역주]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던 간호사와 수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 연구자에 따르면 위원회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기술적인 난점에 대해서는 두 명의 의사에게 의존했고 의사들의 입장에 약점을 찾으려면 철학자에게 의지했다’ (Goodell, 1979, p. 39). 위원이기도 했던 철학자인 셸던 크림스키는 위원회에 대해 ‘위원회에 대한 의료계 인사들의 강력한 영향력의 정당성은 그들의 지식때문에 부여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Krimsky, 1982, p. 302). 여기에서 크림스키는 의료전문가들의 [현재의] 사회적 지위가 타당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정보에 대한 어떤 전문가의 평가도 이해관계(과학연구의 명확한 이득), 신뢰(의사의 상대적 무오류성), 가치(위험과 편익의 적절한 균형)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위원회의 내적 동학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전문가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게 아니다. 가장 말이 많았던 위원이 남성이고 여성은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Goodell, 1979) 젠더와 관련된 동학도 작동하고 있었다.

캠브리지 실험연구평가위원회 사례에서 진정으로 개방적인, 그래서 민주적인 논쟁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하나는 위원회의 임무에 필요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위원들과 지식을 체계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 (Krimsky, 1982, p. 302). 다른 하나는 검토중인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시야를 가지려는 시민들은 이견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문제에 공통적으로 직면했다. 구델(Goodell, 1979)은 위원회의 과학자들이 동료로부터 소외되기를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례말고도 브라운과 미켈슨의 저서(Brown and Mikkelsen, 1990, p. 139)에서는 시민을 돕는 과학자들이 징계를 받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인가받는다는 게 심각한 위협이 아니더라도 득이 되는 유인은 없었다. 학계의 과학자들은 지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쟁점에 대해 해당 지역의 단체들과 일하는 게 정교수가 되거나 승진을 하거

나 동료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속선상의 끝에 있는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의 사례가 보다 급진적인 민주적 과학의 사례이지만 미국 내의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권력동학과 전문성의 정치학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엡스타인은 이 책 1장에서 에이즈 치료운동의 중핵을 이뤘던 경제적으로 부유한 백인 게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의학계의 에이즈 전문가들과 [그들의] ‘지지자 집단(constituency)’으로 부터 인정을 받는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Epstein, 1996, p. 294도 참고할 수 있다). 에이즈의 인구학적 분포가 변화하고 정맥주사를 통한 마약 사용자나 유색인종에서는 에이즈가 늘어나는반면 중산층 게이 집단에서 에이즈 환자의 증가가 둔화되면서 백인 게이들이 생의학계에 진입할 때와 동일한 능력을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pstein, 1995; Epstein, 1991).

결국 이러한 치료운동이 사회 전체에 존재하는 일반인/전문가 동학을 에이즈 환자 공동체 내에서 재생산하거나 보다 좁게는 에이즈 활동가 공동체에서 재생산 할 것이라는 전망은 성공적인 치료활동가가 될 수 없는 ― 시간이 없거나 경제적 자원이나 사회적 자원이 없기 때문에 ― 사람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일이다 (Epstein, 1991, pp. 52, 53, 60; Epstein, 1996, p. 294). ‘과학의 전당’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정보, 자문, 대변을 위해 활동가에게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엡스타인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Epstein, 1996, p. 288). 물론 다른 연구자들도 민주주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표성 문제가 중산층 백인 게이가 에이즈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가 활동가만 대표하는가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Indyk & Rider, 1993, p. 11; Epstein, 1995). 에이즈 치료 운동 내부의 여성이나 유색인종들은 에이즈 치료운동 지도자들이 에이즈나 HIV보균자 내의 ‘마이너리티’ 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대해 비판적이다 (Epstein, 1996, . 291).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

기존 사회질서 내에 존재하고 있는 과학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어마어마하고 이런 장애물들 중 몇 가지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장애물들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의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거나 과학을 민주화하려는 노력의 결과를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전략들이 있다.

대중 역학에서 노동자 시민이 참여했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자원들 ― 시간, 경제적 ― 의 결핍은 시민자문위원회에서 에이즈 치료운동에 이르기까지 과학을 민주화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사회적 대표성의 진작을 어렵게 했던 중요 장애물이었다. 우리는 노동이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참여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만 하고 시민들이 공인된 전문가의 증언에 참석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기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한 경우(에이즈 치료운동의 경우)에 요구되는 자원의 크기는 더욱 많아진다.

미국에서는 민사, 형사 법정의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으로 수용되고 있고 배심원 활동에 대해 일당이 지불된다. 연방자문위원회도 이와 유사한 급료를 지급하고 있다. 배심원의 경우 제공되는 보수는 그리 합당한 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중요하다. 지역사회위원회, 합의회의 실험 등의 정부, 경제지도자,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시민기구에서 일종의 일당 시스템은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경제적 장애물을 약화시켜왔다. 이 책에서 리처드 스클로브는 미국에서의 전국합의회의를 개최하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을 50만 달러 정도로 추산했다. 이 액수는 연방예산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선출직 대표자들이 여러 종류의 민주적 기술과학을 위한 실험에 필요한 소액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정적 압박이나 정치적 장애물때문에 이런 실험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불가능하더라도 공공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공공정책의 민주주의를 진작하거나 당면 사회문제와 관련된 과학기술을 위한 민간 재단의 지원이 정부 지원을 대신하는 유용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워번의 대중 역학의 시도나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의 작업 등의 사례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따라서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시민들이 ‘다른 공동체의 다양한 필요를 이해하고 그들 사회의 일반적 이해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실험적 기초를 [줄 수 있는] … ‘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리처드 스클로브는 ‘시민 안식년’을 제안했다. 스클로브는 이 제도를 대학 교수들이나 미국 평화봉사단에서 시행되고 있는 관련 제도에 비유했다. 그는 이런 안식년 제도를 통해 ‘개인들이 그/그녀의 가족 공동체로부터 떠나서 1년에 한 달 또는 10년에 1년 정도 다른 공동체, 문화, 지역에서 살고 일하도록 권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봤다 (Sclove, 1995, p. 43).

같은 맥락에서 과학지식과 기술의 생산과 평가에 일반인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시민 특별연구원 제도도 만들어져야 한다. 정부 기금을 이용할 수 없다면 민간 재단이 제한된 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떠나서 과학관련 프로젝트에서 이런 시간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관련 프로젝트를 하는 비영리기구, 기업, 정부, 대학연구소, 과학관련 학과 등은 재정지원을 하는 기관에 의한 데이터베이스에 관련된 일자리를 등록하고 시민들은 여기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지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면 지원서가 평가되고 다양한 이해관계 및 사회·경제·전문적 배경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로부터 선출될 것이다.

민주화라는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프로그램이 갖는 미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참여하는 시민이나 조직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는 열려있는 물음이며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특별연구원으로 선출된 농민이 인근 대학캠퍼스에 있는 농생물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농민과 과학자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친교와 존경을 늘려가면서 이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대한 공감이 깃든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연구소에서 이후에 수행되는 연구는 농민이 연구소에 가져온 농업에 밀착된 지식과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전형적으로 수행하던 전통적인 생물학과의 시너지의 이득을 누릴 수도 있다

(Krimsky, 1984a). 에이즈 연구자인 안토니 파우치(Anthony Fauci)는 에이즈 치료 활동가들과 함께 했던 연구소에서의 시간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활동가들은 ‘실험실 과학(bench science)’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연구자들은 에이즈라는 질병의 실체에 대해 직면하게 되었다. 에이즈에 대한 기초

연구에 활동가들이 참여하는 데에 대해 몇몇 과학자들이 기쁘게 맞이하면서 서로 다른 전문분야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Epstein, 1996, pp. 321, 322).

과학영역에서 시민참여가 성공적이려면 참여자들이 그동안 당연하게 수용하던 전문성에 대한 태도를 성찰할 수 있도록 가능한 넓은 ‘지식기반’을 획득할 수 있는 기제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만 하고 (Laird, 1993, p. 354) 참여자들 모두가 동등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동등한 참여를 위한 기제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경관이 상대적으로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는 캐나다의 한 지역에서 천연가스를 채굴하기 위한 제안의 비용과 편익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서는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거의 1,000명의 원주민들로부터 증언을 확보했다. 어떤 연구자는 ‘가족과 인근 주민들의 교제와 지역 환경에 대한 친숙성이 자발적이고 솔직한 증언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Sclove, 1995, p. 29).

다른 맥락에서 어떤 대학 교육자들은 구조적으로 학생들의 참여가 배제되지 않은 학습 환경을 권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는 수강생이 많은 강의를 몇 개의 토론 그룹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 이 그룹들은 선생님의 감독없이 얼마동안 작업을 한 다음, 수업을 통해 전체 수강생을 대상으로 발표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체 수강생 앞에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실천을 다소 변형하면 과학기술 시민평의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강의에서 이용되는 또다른 방법으로는 역할극이 있다. 시민 기구에서는 전체적으로 해당 쟁점에 대해 가능한 여러 입장들을 생각해볼 수 있고 구성원들을 무작위적으로 여러 입장에 할당해서 해당 입장을 대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발표력이나 언어구사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나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데 자신있는 사람, 또는 자동적으로 주목을 받을 만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자격요건을 갖고 있지만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에 대해 계속 얘기하거나 집단적 숙의를 이끌어나가게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숙련된 감독관이 있으면 집단의 논의를 관찰해서 집단적인 자기성찰을 하기 위해 그룹 모임에서 특정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다. 감독관은 누가 논의를 주도하고 누가 근거를 주장하려고 하는 지를

결정하는 집단의 동학을 연구할 것이다. 어떤 입장이 어떤 참여자들에 의해서 거부되어 논의에서 어떤 입장이 평가도 없이 수용되는 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물론 감독과 평가를 위한 방법론도 개발되어야 하지만 유사한 실천이 이미 효율적인 교수법과 학생들의 평등한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 전역의 강의실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 (Sadker & Sadker, 1994).

기술과학에 참여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민이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는가라는 문제는 유용하고 성공적인 참여를 달성하는 데에 가장 곤란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에이즈 치료운동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외부인으로서의 시민들이 과학자들이 페기하고, 간과하고, 무시하기 쉬운 연구방법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장에서 제시한 스펙트럼의 극단에 있는 과학자의 자기통제에 가까운 기술과학에 대한 시민참여의 사례는 전문가가 설정한 틀을 수용하도록 구조화되어있고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비판적 접근이 성장하기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색다른 해법을 제시할 것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앞에서 제안한 여러 실천들은 색다른 접근방식의 부상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에이즈 치료운동의 사례는 상당히 복잡하다. 엡스타인이 {순수하지 않은 과학 Impure Science}(1996)에서도 말하고 이 책에서도 말한 것처럼 일단 시민이 기본적인 지식기반을 획득하면 주류 과학자들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들은 더 이상 외부자의 시각을 도입하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일반인 전문가’ ― 전문가로서의 인증은 없지만 필수적인 ‘기술적 지식’을 갖고 있는 ― 가 참여하는 민주적인 기술과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이득을 실현하는 한가지 방법은 내가 앞에 설명한 것같은 기제를 만드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지식을 확보하지 못한 참여자들의 경우에는 일반인 전문가의 시각에 도전할 수도 있고 일반인 전문가들은 공식적 지식을 획득해감에 따라 자신의 시각과 변화에 대해 성찰할 구조적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위에 서술한 ‘치료방법’들은 과학을 민주화하기 위한 실천에서 시민참여의 장애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합의회의, 대중 역학, 에이즈 연구에 이르는 이런 류의 성공적인 노력들은 과학자와 일반인들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시민들과 협력하면서 자신의 대중적 정당성을 향상시킬 수도 있지만 이런 협력을 저해하는 요인도 있다. 그동안 이런 참여에 동참하는 과학자들이 동료들로부터의 추방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대학의 과학자들의 승진이나 정교수를 결정할 때 고려하는 봉사부문의 일부로 시민단체와의 협력 기록을 포함시킨다면 과학자들은 기꺼이 협력을 하려할 것이고 적대적인 동료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과학자의 협력연구에 대해 정부나 재단의 지원이 일반인들과 과학자들의 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연구가 전통적으로 학술공동체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결과물(예를 들어 동료들의 심사를 받은 논문)로 이어진다면 더욱 가능할 수도 있다.

일반 시민과 대학 과학자들 사이의 협력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민주화된 과학 옹호자들이 참고해야 하는 현대적이면서 역사적인 유산이 있다. 대학당국은 대학의 생물학자와 기업의 협력을

매우 바람직하며 진흥시켜야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봉사’가 종종 평가절하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 승진을 결정하는 데 공식적으로 고려되고 있으며, 특히 토지양허대학은 농촌 사회에 대한 사회 활동(outreach)이라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학의 과학이 기업에 참여하려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관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이 되기 때문이지만 시민들이 대학에 재정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유권자이며 주립대학들은 입법의원의 선의(善意)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실 입법의원들의 호의를 얻으면 대학당국들이 교수들의 승진의 요건으로 시민과의 협력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고 연방 토지양허대학들이 현재의 사회활동의 관행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용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실질적인 장애물에 대해 몇몇 실용적인 전략을 제시했지만 이런 제안을 실행하기가 쉽다거나 이를 제도화하면 이런 장애물로부터 벗어나서 일반인-전문가들이 협력하고 ‘더 좋은’ 과학이 된다거나 보다 생동하는 민주주의로 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책은 대학도서관 서고에 가득하다. 내가 그동안의 격렬한 논쟁들과 수세기 동안의 딜레마들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논의가 논쟁에서 약간의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이 글은 목표를 다한 것이다.

결론

이 장에서 나는 과학기술계에서 과학기술을 민주화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구분하고 논쟁이 되는 용어들을 명료하게 하여 시민참여의 문제에 관련된 대화에 공헌하려고 했다. 또한 과학영역에서 몇몇 형태의 시민참여가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도 했고 과학기술의 기술적 속성이 언제나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아니며 시민참여가 가장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극복되어야만 하는 다른 장애물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과학기술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위상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예측가능한 미래에 크건 작건 모든 사람의 생활방식에 긴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기술영역에서의 시민참여라는 문제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를 해야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이다.

이를 위해서는 합의된 용어를 사용하는 집중적 토론이 필요하다.

감사의 글

이 글은 {정치와 생명과학}(1998, 17, pp. 133-145)의 [과학전쟁을 넘어 : 과학의 민주화에 대한 고찰 Beyond the Science Wars: Contemplating the Democratization of Science]를 고친 것이다. 수잔 베른슈타인(Susan Bernstein), 로렌스 코헨(Lawrence Cohen), 스튜어트 그린(Stuart Greene), 게리 존슨(Gary johnson), 제랄드 클라인만(Gerald Kleinmann), 스티븐 발라스(Steven Vallas), {정치와 생명과학}에 대한 논평자, 그리고 수정하기 전의 논문에 대한 유용한 지적과 제안을 해준 뉴욕주립대학 출판부에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연구를 도와준 재너 론버거(Jana Lonberger)의 노력은 매우 유용했다.

다니엘 리 클라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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