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계의 대응
지난 9월 23일 보건복지부가 오랜 숙고 끝에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생명윤리법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작년 5월 22일에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가 주최했던 ‘생명윤리기본법(가칭)’의 기본골격 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전후해서 사뭇 고조되었던 분위기에 비하면 지난 10월 9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공청회’는 전반적으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언론의 관심도 예상밖으로 적어서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를 했을 당시에만 일부 공중파 TV와 주요 신문들이 기사로 다루었을 뿐 이후 진행과정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생명윤리입법에 대한 논의가 5년여에 걸쳐 진행되면서 웬만한 쟁점은 모두 제기되었고(특히 언론의 입장에서는), 정작 중요한 입법 과정이 진행되지 않고 지지부진해지면서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 면이 있었다. 숱한 공청회와 토론회가 거듭되면서 이미 익숙해진 단골 발언자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저 사람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또한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법안이 지난해에 자문위가 제시했던 골격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어서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만 통과되어도 어디냐?’는 생각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외부적으로는 대통령 선거가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면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추세에는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첫째, 공중파와 일간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한결같이 ‘체세포 복제 금지’, ‘인간복제 전면금지’, ‘임신이외 목적으로 인간배아 못 만든다’ 등의 부정적(negative) 헤드라인을 뽑으면서 복지부의 입법안이 비교적 윤리와 안전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지향적(positive)으로 부각시키지 못했다(대한매일신문과 한겨레신문을 제외하고). 그 결과 기사 속에서 연구와 윤리는 항상 대립항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항상 윤리 타령만 하면서 연구자들의 발목을 잡는 사람들이고 연구자들은 윤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연구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인양 비쳐졌다. 특히 시민단체들이 윤리와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둘째, 이번 입법예고를 5년여에 걸친 생명공학자, 인문사회학자, 시민단체, 종교단체, 시민들의 진지한 논의라는 맥락에서 제기하지 못했다. 사실 입법안의 내용은 이미 작년에 과학기술부 산하에 인문사회과학(5명), 종교계(3명), NGO(2명), 생명공학(5명), 의학(5명) 등 각 분야의 전문가 20명으로 구성된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6개월에 걸친 토론을 통해 도출된 기본골격을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복지부가 입법예고한 법안의 주요 내용은 이미 1년여 전에 이루어진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런 역사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일반대중들에게 마치 갑자기 마련된 법안인양 불쑥 들이밀었다. 게다가 기사의 접근방식은 천편일률적인 평면 대비였다. 기사의 날자만 바꾸면 1년 전의 것이나 이번 것이나 구분하기 힘들 정도이다.
과기부와 재계의 긴밀한 대응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면 작년에는 과학계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했고 연구자들의 대응이 주된 흐름을 이루었지만, 올해의 특성은 과학계 자체의 움직임이 거의 없고 과기부와 재계가 입법의 핵심 조항을 배제하거나 무력화시키기 위해 조용하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양상이었다. 작년에는 5월 22일 공청회가 있은 직후인 5월 24일 3백명의 연구자들이 ‘생명윤리법 시안에 대한 건의문(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 복성해)’을 발표했고, 6월 11일에는 대한불임학회 회장 이진용 외 13명의 학회 회장과 서정선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17명의 학자들이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에 대한 학계의 제언’을 발표했다. 또한 6월 28일에는 국회과학기술위원회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주최로 ‘대토론회, 생명윤리기본법(안)-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에 비해 올해에는 전경련과 과기부가 전면에 나섰다.
입법예고가 있기 하루 전인 9월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생명과학산업위원회(위원장 허영섭 녹십자 회장)는 ‘생명윤리관련 법률의 제정에 관한 의견’이라는 대정부 건의서를 발표했다(국민일보. 8월 22일). 신문 보도 내용을 참고하면, 건의서는 체세포 복제와 이종교잡의 허용이라는 구체적인 항목을 요구했고, ‘종교, 시민단체들의 반대로 기업들의 생명과학 관련 연구활동이 심각하게 저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전경련을 비롯한 기업들이 이미 보건복지부의 입법 추진과정을 예의 주시해왔고, 기업활동에 저해되는 핵심 조항(체세포 복제, 이종교잡)을 입법 배제하는데 노력을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기부는 복지부가 지난 7월 15일 ‘”(가칭)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 이후 입법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고, 국무조정실에서 복지부가 단일 법안을 만들도록 결정한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복지부가 입법예고를 하자 과기부는 작년에 자신들이 주도했던 자문위의 활동이나 합의 결과를 도외시한채 ‘복지부측이 부처간 협의 내용을 무시하고 복지부 입장만 고려한 법안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경향신문, 9.24)’. 과학계의 대응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보건복지부의 질의에 대해 체세포 핵이식(이종간 핵이식 포함)을 원칙적으로 금지할 경우 관련 연구 위축 및 신규 연구자 진입금지에 따른 형평성 논란이 예상되고 생명공학의 발전 저해 및 국제 동향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곤란하다는 회신을 보낸 정도였다.
입법절차에 대한 효과적인 영향력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올해 생명공학계의 대응은 차분하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작년 공청회 직후에는 법안을 마련하려는 시도 자체를 ‘연구 자율성 침해’로 규정하고 윤리 문제를 과학자 이외의 사람들이 논의하는 행위 자체를 ‘과학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반발했던 것에 비해, 올해는 대체로 입법을 전반적인 추세로 받아들이면서 핵심적인 조항을 무력화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공청회에서 한 토론자가 말했듯이 ‘국가의 강제 법규정에 의해 숭고한 연구의 영역을 제한받는 상황에까지 오게 된’ 사태를 개탄하는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입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생명공학계는 작년과 같은 집단적인 성명서 발표나 토론회 등을 여는 방식이 아니라 입법 진행 절차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특징은 지난 10월 9일에 열린 공청회에서 동물복제 연구로 유명한 H 교수가 했던 발언에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H 교수는 발언 모두에 이번 입법예고 과정에서 ‘국무조정실의 역할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묻고 싶다’고 국무조정실에 화살을 돌렸고, ‘우리나라 국가과학기술 정책의 종합 조정은 과기부 장관’에게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부의 의견이 좀더 작용했어야 하는데 비해 조정 역할이 소홀했음을 지적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과기부의 역할이 소극적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것은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에 비해 우월한 현실적인 영향력과 그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대응양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년에는 과학연구에 대한 윤리적 제약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당황하면서 상당한 위기감을 표출했지만, 올해에는 비교적 차분하고 현실적인 접근으로 고도화된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감을 내보이는 만큼이나 이 대응방식은 실효를 거두고 있다.
핵심적인 주장
생명공학계가 제기하는 주장은 거의 일관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윤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 → 생명공학 연구의 위축 → 생명산업 발전 저해 → 국가경쟁력 약화’이다. 이것은 과기부, 재계,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이 공명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핵심축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불치병 및 질병 치료이다. 공청회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번 공청회에서도 일부 토론자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무엇으로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반복했다. 지금은 정보기술로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미래에는 생명공학 연구가 유일한 대안이며 지나친 윤리적 규제는 연구와 산업을 모두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법에서 윤리는 항상 최소한으로 축소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불치병 치료와 질병 극복도 인간유전체(게놈)프로젝트 이래 계속 제기되어온 비젼이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연단에 올랐다. 불임클리닉의 P박사는 공청회에서 치료를 위한 연구로 비난받고 있는 연구자들의 억울함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이 주장 역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역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공청회 당일에도 불치병 아들을 먼저 보낸 한 여성이 발언자로 나섰듯이,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릴만큼 절박한 불치병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줄기세포 연구가 유일한 희망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것은 이 구도에서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에게 윤리가 연구를 가로막는 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결국 생명공학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자들의 주장은 언론의 주된 논조로 받아들여지고, 시민단체나 종교단체의 주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생명공학자들의 주장이 더 논리적이나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 정치경제에서 생명공학자들이 더 큰 힘과 발언력을 갖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획일적인 목소리 속의 한줄기 빛
이번 논의에서 아쉬운 점은 생명윤리 입법을 둘러싸고 수년 동안 논쟁이 계속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계 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70년대 중반 처음 논쟁이 시작된 무렵부터 여러 입장 그룹들이 형성되어 풍부한 담론을 생산해서 대중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입법을 둘러싼 논의가 5년이 지나도록 다른 입장을 가진 생명공학자를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러한 양상은 지난번 의약분업 사태에서 의사 집단이 보여준 놀라운 결속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향후 우리나라의 전문가 집단의 한 특성으로 연구 대상이 될 주제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서 지난 9월 23일 부산대학교 자연대 물리학과의 길원평 교수를 비롯한 수학과, 의과대학, 생명과학과 등의 교수 36인이 발표한 ‘인간복제, 배아복제, 이종간 교잡, 냉동잉여배아 실험을 허용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는 매우 뜻깊다. 서명자들은 그동안 생명공학계가 제기해온 ’14일 이후의 배아가 세포덩어리’, ‘배아실험은 난치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 ‘배아실험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 등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윤리 도덕보다 경제만을 우선시하는 국가 정책을 만든다면 국가가 앞장서서 비윤리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 . . 배아실험을 허용함으로써 인간을 세포덩어리로 보는 유물론적 사고가 사회에 확장될 때 경제적인 부는 오히려 타락과 방종만을 조장하게 될 것입니다. 즉 윤리 도덕에 기반을 두지 않는 국가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 결국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고 봅니다’라고 주장했다.
생명공학 이외의 과학계의 다양한 주장이 필요한 이유는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 이익에 대한 다양한 관점 이외에도 많다. 특히 현재 생명공학계와 시민, 종교단체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는 직접 당사자가 아닌 중재자의 역할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생명윤리법 제정 논의에서 생명공학자와 과학계 전체의 다양한 주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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