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기피의 문제를 사회전체의 진보의 측면에서 접근할터
1. 2003년, 귀 단체에서 생각하고 있는 시민들이 주목할 만한 과학기술과 사회의 쟁점은 무엇이 있습니까?
일단 과학기술계 내부에서 시작할 수 있는 쟁점 두 가지만 일단 소개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문제를 부각시키는 한 주체가 되겠다는 것이고, 이미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① 이공계기피현상
우선, 2002년 벽두부터 과학기술계의 주요 이슈로 부각되어 대선 과정까지 과학기술계를 휩쓸며 맹활약(?)을 했던, 이공계 기피 ‘현상’이 곧 이공계 위기라는 즉자적 인식의 문제를 어떻게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규정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과학기술계 일각에서 지적되기도 했지만, 이공계 기피라기보다는 소위 돈 되는 분야(경영대, 의대, 약대, 한의대)로 집중되는 경박한 시장숭배적 행태에 불과하며, 학문과 교육의 시장화, 그리고 그로 인한 기초학문의 붕괴가 심각한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학문의 위기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고, 인간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원으로 써먹을 존재로서 인간을 교육시키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이 교육의 위기를 우리는 더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과학기술노동자들의 위기는 90년대 이후에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즉, 지난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에 과학기술은 산업자본(재벌)의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쓰여질 것을 강요당했고, 과학기술정책은 시장논리에 충실했습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IMF 이후 진행된 인원감축, 연봉제, 계약제, 정년단축을 비롯한 무수한 구조조정 또한 그 연장선 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산업자본과 상층 관료들, 일부의 관변 엘리트 과학자(때로 행정학, 경영학과 교수들)들이 그러한 상명하복식의 정책을 독점했고, 그들이 바로 과학기술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공계 기피현상은 그야말로 과학기술현장을 휩쓸어온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결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작 과학기술계에서는 이공계 기피현상 자체를 곧 이공계의 위기로 치환하고 그 원인을 이공계 출신 인력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 수준 하락 때문이라고 쉽게 규정하고 있으며,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것처럼 과학기술부 장관의 부총리 격상, 과학기술자에 대한 국회의원 비례대표 할당, 과학기술자에 대한 대폭적인 처우 인상, 정부부처의 과학기술자 채용 확대 등으로 이공계 위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는 과학기술계 전체가 이공계의 위기론에만 매달리고 있고, 또한 이 사회가 그것을 용인하고 있는 것은 가뜩이나 미약한 과학기술(자)운동의 현실을 견주어 볼 때,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공계의 위기는 실로 현대 과학기술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일반 대중은 배제된 채, 첨단의 기술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오로지 이익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쓰여지고, 그리하여 기술 자체가 지배권력의 핵심장치가 되어버리는데, 그에 저항할 진보적 인식이나 운동조직이나 국민적 이해나 모두 턱없이 부족한 현재, 과학기술 자체의 위기는 참으로 심각하고 그것은 곧 과학기술에 대한 순진한 환상에 빠져 사는 전체 시민 대중의 위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공계 위기의 문제의 해법을 과학기술계 일부의 문제로만 한정하느냐 아니면 사회 전체의 진보의 측면에서 접근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2003년에, 우리 과기노조의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 현장과 일반 시민들이 사회 진보의 측면에서 이공계 기피현상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② 연구개발예산 배분의 문제
KISTEP에서 발표한 2002년 정부연구개발예산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부가 차세대 성장산업의 기반으로 설정하고 있는 IT, BT, NT, ET, ST, CT 등 이른바 미래 유망 신기술 분야에 무려 전체 연구개발예산(일반회계 + 특별회계)의 26.0%(13,418억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IMF 이후 98년과 99년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과학기술투자는 계속 두 자리수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앞에서 보다시피 국민적 합의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정부와 산업자본, 관변의 일부 엘리트 과학자들에 의해 선택된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특징적입니다.
(구체적인 조사가 더 필요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고 또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위험성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안전방재기술, 위험측정기술, 복지 중심의 보건의료기술, 대안에너지연구개발 등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예산의 적정한 배분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과학기술계의 이슈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정권 초기에 연구개발예산의 중복투자와 비효율성 문제가 통상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더라도, 지금은 무조건적인 과학기술투자의 확대나 중복투자에 대한 시시비비보다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배분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우선이며,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관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2.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2003년 귀 단체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려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1번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나서 보니 도리어 여기에서 답할 내용이 앞으로 간 것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부분들은 독자들께서 현명하게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하나만 더 추가하겠습니다.
우리 노동조합의 정책위원회와 민주노동당의 (아직은 구성되지 않고 있지만) 과학기술위원회가 연계하여 진보적인 과학기술정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조합원과 당원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 정책위원회 활동을 개방할 생각입니다. 연간 4회 정도의 과학기술에 관한 토론회나 강연회를 가질 예정이고, 가능하다면 진보적 과학기술정책을 제안하기 위한 기초조사사업을 연구용역예산으로 편성하고자 합니다. 한편, 과학기술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와 소통의 공간을 일상화하기 위하여, “사이버정책연구소”를 두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이버정책연구소”는 노동조합 일상활동의 매개로 활용되고 있는 과기노조 홈페이지와 독립적으로 과학기술과 사회, 과학기술정책의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공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일정을 포함한 구체적인 계획은 현재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3. 새 정부에게 거는 기대는 무엇입니까?
그리 큰 기대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굳이 얘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투자확대나 전문가 중심의 과학기술정책에서 벗어나, 전체 과학기술자와 국민 중심의 과학기술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에 대한 과학기술자의 이해와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높이고 과학기술의 저변을 확대해 줄 것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란다고 썼던 적이 있습니다.
②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국가과학정책의 실질적인 최고의사결정기구가 될 수 있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현재로서는 기획예산처와 경제 부처가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 과학기술현장의 대표성을 갖는 민간위원들의 참여를 전체 위원 수의 절반까지 대폭 확대해야 합니다.
③ 정부출연기관의 고유한 특성을 인정하고, 연구인력에 대해 인건비 등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때, 국가 연구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각 연구회들이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전문가에 의한 자율적 관리기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장 시급한 숙제입니다. 당연직 이사(현재 각 부처 차관급 5명/ 전체 이사 11명)를 없애고, 연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출연연구기관의 예산 편성에 관한 연구회의 권한을 강화하되, 연구회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연구현장에서 갖도록 하는 것(예,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이사 참여 등)이 필요합니다.
④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기 전에, 과학기술 관련법들이 실질적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국가과학기술기본법에 이미 근거를 두고 있는 기술영향평가제도를 보더라도, 그 대상 기술을 선정하는데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그 평가결과의 반영 또한 대단히 임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4. 지난 대통령선거는 과거 선거에 비해 과학기술관련정책이 풍성했습니다. 실제 현장과학기술자들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 종사자들은 이런 정책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각 당이 과학기술현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은 갖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올바른 해법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예컨대, 연구개발투자는 GDP의 얼마까지, 정부예산의 몇 퍼센트까지 하겠노라고, 후보들은 쉽게 답하지만, 그게 과학기술정책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연구현장에 있는 과학기술자 자신들 또한 자신이 해당하는 분야의 각론의 차원에서는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국가과학기술의 총론의 입장에서 보면 관심이 아예 없거나 무지하기까지 한 것도 현실입니다. 그래서, 대선을 통하여 이전보다는 과학기술 관련 논의가 풍성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여전히 자발적 참여가 떨어지고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폭넓은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최근에 과학기술계의 세대교체 절실, 연구기관장의 경영마인드 부재, 연구원들에 대한 재교육프로그램 부족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개적으로 하고 있는 대덕연구단지의 어떤 온라인 뉴스매체에서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연구원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더라며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자신의 일에만 파묻혀서 사회와 소통하기를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과학기술자들 사이에서, 그래도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이를테면 한국과학기술인연합과 같은 모임은 자신들의 속내를 비교적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선에서 제기된 정책에 대한 풍성한 논의의 자리를 갖고 차분하게 실질적인 후속장치를 마련하는 것보다는 당장에 아무 것이나 주워담은 정책(요구)보따리를 들고 인수위로 달려가고 있는 (노동계를 포함한) 개인이나 집단들이 보여서 불만스럽기도 합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