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4년 11월 2014-11-03   1209

[듣자] 홀로됨의 두려움을 질식시켜라

“홀로됨의 두려움을
질식시켜라”

이채훈MBC 해직 PD

참여사회 2014년 11월호 (통권 216호)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11월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Tchaikovsky Seasons Ashkenazy를 검색하세요.

http://youtu.be/7ABGZhFsXYI

망각의 세월, 깊어가는 가을에 마음이 시리다. 

‘표현의 자유’를 앞장서서 외치신 성유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1980년대 말 방송노조의 깃발을 처음 들었을 때 <방송민주화운동이란 무엇인가>란 소논문을 쓰며 선생의 말씀을 인용한 게 기억난다. 시민민주주의란 모든 사회 구성원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언론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소박한 모토였다. 선생의 꿈이 거의 이뤄진 것처럼 보였을 때, 더욱 심각한 과제가 우리 앞에 등장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현실은 논외로 하자. ‘표현의 자유’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광주 5·18 희생자들을 폄훼하고 세월호 농성장에서 폭식투쟁을 일삼는 패륜의 현장을 우리는 목격했다. 광화문 네거리, 생존권을 요구하는 일인시위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스피커의 굉음 앞에서 존재가 무색해진다. 선생께서 추구하신 민주사회가 단순히 말할 권리 뿐 아니라 모든 이의 생존과 평화가 보장되는 따뜻한 사회였다면, 선생은 필시 ‘표현의 자유’가 오용되고 남용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아파하셨을 것이다.

사람들은 살다 가지만, 1년 사시사철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가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12곡의 피아노 소품집인데, 러시아판 악보에는 곡마다 그 달을 묘사하는 시구가 붙어 있다. 10월 ‘가을의 노래’는 톨스토이의 짧은 시편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지만, 그림엽서 같은 두 행의 노래가 음악과 함께 가슴을 두드린다. 낙엽 지는 가을이라 더욱 아픈….“우리 가난한 과수원에 내리는 가을…. 노란 낙엽이 바람에 날리네.”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온다. 어느 계절이든 슬픔을 벗어날 수 없다. 4월에는 눈이 녹아내리고 꽃이 피어난다. 눈은 녹아서 눈물이 되지만, 그래도 꽃은 피어서 미소 짓는다.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다. 4월 ‘눈방울’은 마이코프의 시다.

“푸르고 순결한 눈방울꽃이 피어나고, 그 옆에는 마지막 눈이 내리네. 지나간 슬픔이 남긴 마지막 눈물, 새로운 행복의 첫번째 꿈….”

여름이 온다. <사계>에서 가장 귀에 익은 선율은 6월 ‘뱃노래’일 것이다. 원래 피아노곡이지만,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강수진이 주연한 발레 <오네긴>에 삽입되기도 했다. 결투로 목숨을 잃는 비운의 젊은 시인 렌스키가 발랄한 시골 처녀 올가와 함께 추는 아름다운 이인무에 나온다. 여기에는 플레세이어의 시가 붙어 있다.

“바닷가로 가자,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입 맞출 거야. 신비로워라, 별들은 우리에게 슬픈 눈빛을 던지네.”

다시 가을, 이제 11월이다. <사계> 중 11월 ‘삼두마차’에는 러시아 농민들을 깊이 사랑한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가 붙어 있다. 권력과 영예를 쫓지 말고 네 중심을 잡으라는 엄숙한 내용이다. 외로움을 자꾸 피하려 하면 더욱 나약해질 뿐이니, 어려울수록 네 운명을 사랑하고 껴안으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외롭다고 길을 바라보지 마라. 삼두마차를 따라서 달려가지 마라. 그냥 그리워하라. 홀로됨의 두려움을 단숨에, 영원히 네 가슴 속에서 질식시켜라.”(네크라소프)

포도농사꾼 김성순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는 해방과 전쟁의 혼돈에서 보도연맹 학살을 가까스로 모면한 뒤 55년 동안 포도농사에 몸 바쳐 온 어른이다. 참 오래도록 우리 현대사의 풍상을 겪으셨다. 그는 포도를 키울 때 저 혼자 길게 자라서 다른 가지가 열매 맺는 걸 방해하는 가지는 살짝 비틀어 놓는다고 했다. 그래야 다른 가지와 함께 골고루 잘 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인터뷰 기사에서 김 선생은 세상 보는 자세를 밝혔다.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하는 걸 기준으로 삼지 말라. ‘내가 어제보다 오늘 얼마나 더 좋아졌나’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 <이진순의 열림>, 한겨레 신문, 8월 22일

세상의 변화는 더디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늙어가고, 어제까지 곁에 계셨던 어른은 오늘 떠나간다.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기나긴 세월을 견뎌내신 어른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며 일으켜 세운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처럼, 우리네 삶도 계속된다. 

이채훈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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