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5년 07월 2015-07-02   1454

[듣자] 말이 먼저? 음악이 먼저?

말이 먼저? 음악이 먼저?
헨델 <세르세> 중 ‘시원한 네 그늘’

 

글. 이채훈 mbc 해직 PD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등.

 

내 사랑하는 나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잎사귀여, 
운명이 네게 친절히 미소 짓길, 천둥, 번개, 폭풍이 
네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길, 바람이 너를 모욕하지 않길.
달콤하고 사랑스런 그대의 시원한 그늘.

헨델 오페라 <세르세> 중 ‘시원한 네 그늘’

        

이 음악을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ombra mai fu bartoli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KqIHPWg53vs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7월, 무더위를 잠시 피하게 해 주는 시원한 그늘이 고맙다. 그늘은 삶에 지친 사람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재앙이 닥쳤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신처가 된다.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내모는 한국 사회는 그늘이 없다. 불볕더위 속에서 지쳐가는 국민들은 우울하다.

 

헨델의 <라르고>로 널리 알려진 이 선율은 그의 오페라 <세르세>(1738)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원한 네 그늘’이다. 막이 오르면 페르시아 왕 세르세가 등장해서 이 아리아를 부른다. 지친 주인공이 평화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나무 그늘에서 부르는 이 노래는, 결국 백성들의 ‘그늘’이 되겠다는 왕의 다짐으로 들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옴브라 마이 푸(시원한 네 그늘)’라는 노랫말이 아니라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노랫말이 아니라 음악에 담겨 있는 진정성이다. 이 아리아에서 음악을 빼고 노랫말만 읊조린다면 이렇다 할 감동이 없을 것이다. 선율은 고귀하고 진지하며 엄숙하다. 사람들은 명상에 잠긴채 천천히 흐르는 아리아에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을 투영하며 위안을 받아 왔다.

 

독일의 음악학자 마르틴 게크는 이상향을 자아내는 정서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을 소프라노가 불르더라도 관객들이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1738년 초연에서는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Castrato, 노래 실력이 뛰어난 남자 아이를 변성기 직전에 거세하여 여성의 목소리와 남성의 파워를 겸비하도록 키운 성악가 카파렐리Cafarelli가 주역을 맡았는데, 가수의 애매한 성 정체성이 청중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어 노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마르틴 게크 <혹등고래가 오페라극장에 간다면> p.119)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목소리 또한 세르세 왕의 진정성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18세기 초, 사람들은 주저 없이 런던을 ‘세계의 수도’라 불렀다. 런던의 음악활동은 더 이상 궁정 안에 머물지 않고 극장, 연주장, 유원지, 개인 저택에서 널리 이뤄졌다. 국왕과 귀족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오페라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헨델은 25살 되던 1710년, 런던행을 택했다. 그에게는 오페라로 단번에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재능과 노력으로 거뜬히 꿈을 이뤄냈다. 그는 ‘울게 두소서laschia chio pianga’로 잘 알려진 <리날도>(1711)를 필두로 약 30년 동안 런던에서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했다.

 

참여사회 2015년 7월호 (통권 224호)

헨델의 ‘시원한 네 그늘’을 부르는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오페라Opera는 라틴말로 ‘작품’이란 뜻이다. “내가 작품 하나 했지”라고 하면 곧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뜻이었다. 1607년 몬테베르디가 최초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발표한 뒤 비발디,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은 예외 없이 오페라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사이의 열띤 경쟁은 오페라가 급속히 발전하는 동력이 됐다.

 

헨델 시대에 오페라 팬들은 수퍼스타인 카스트라토의 초인적인 테크닉에 열광했다. 이 때문에 오페라는 질서 있는 드라마가 아니라, 카스트라토들의 실력 경연장처럼 보였다. 여기에 극적 질서를 부여하여 오페라를 개혁한 사람은 빈 궁정악장 글루크(1714~1787)였다. 그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요즘도 널리 사랑받는 걸작이다. 

 

오페라의 역사에는 “가사가 먼저냐 음악이 먼저냐”라는 논쟁이 늘 따라다녔고 이 논쟁 자체가 오페라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1786년 빈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오페라 경연이 벌어졌을 때 살리에리가 출품한 오페라의 제목은 <음악이 먼저, 말이 먼저>였다. 이 경연에서는 모차르트의 <극장지배인>이 승리했고, 그 결과 혁명적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시즌 개막작으로 채택됐다. 모차르트는 “시는 음악에 순종하는 딸이어야 한다”며 오페라에서 음악의 우위를 강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오페라를 개혁했다. 모차르트의 불후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는 훌륭한 대본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대본만 읊조려서는 결코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본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이 있었기에 그의 오페라들은 불멸의 고전이 될 수 있었다.

 

‘시원한 네 그늘’은 헨델 사후 잊혔다가 19세기에 다시 발견되면서 헨델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됐다. 글루크, 모차르트가 이끈 오페라의 개혁이 일어난 뒤에 발견된 이 노래 덕분에 헨델의 <세르세>라는 오페라가 부활한 셈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헨델, 글루크, 모차르트 뿐 아니라 베르디, 바그너, 푸치니 등 후대의 오페라까지 모두 즐길 수 있게 됐다. 어느 오페라든 훌륭한 가사가 있고, 이 가사에 날개를 달아 주는 위대한 음악이 있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다. 

 

공허한 말만 무성한 요즘, 오페라가 더욱 와닿는 건 음악에 담긴 진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진실과 정의에 목마른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음악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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