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7년 12월 2017-12-04   734

[통인뉴스]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글. 김건우 참여사회연구소 간사

 

 

촛불

 

광장을 가득 메웠던 촛불은 이제 사라졌다. 그 많은 시민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고, 퇴진행동도 해산했다. 1년 전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 모았던 일련의 사건은 이제 법원과 검찰로 옮겨졌다. 촛불은 역할을 다했고 광장의 분노는 어디론가 흩어졌다. 광장은 본디 유동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공간이며, 광장을 통해 서로 만났다 흩어지길 반복한다. 시민들은 그 많던 불씨만큼 모였다 흩어졌다.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는 지난 17일 촛불 1주년을 맞아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라는 제목으로 집담회를 개최했다. 그 불씨의 향방과 의미를 구하기 위함이다. 불씨는 또 다른 탈 것으로, 다른 사건을 찾아 전이되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촛불은 그 본연의 미약함을 따라 사그라진 것일까.

 

규정에 대한 강박과 ‘텅 빈 촛불’

광장이 정치의 공간이 되면서 많은 학자들은 그 특이성과 단절성에 주목하고, 이를 정치개념화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렇다면 이번 촛불은 이전의 운동과는 무엇이 달랐으며, 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이는 ‘팬덤정치’, ‘반지성주의’, ‘정치의 소비화’ 등 비판적 규정에서 ‘2017년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의 탄생을 거쳐 촛불시민‘혁명’으로까지 급진화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학자들 간의 온도차는 사태해석에 대한 강박이 무리한 개념화나 해석과잉으로 드러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패널로 참석한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 또한, 지금의 시점에서 지난 촛불광장을 거대담론 차원으로 규정짓는 것에 대한 경계를 요청했다. 단절을 유발한 사건이었는지, 역사에서 반복되는 대중봉기의 레토릭(rhetoric)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프랑스 혁명과 제1공화정 선포까지의 개방된 근대정치의 시간과 유사하다고 덧붙이며 당장의 국면에서는 디테일에 집중하기 위해 망원경 보다는 현미경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촛불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부터 한국 대중운동사에 등장한다. 이후 촛불은 여러 광장을 옮겨가며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시민정치의 등불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승원 사회혁신리서치랩 소장은 ‘촛불’을 정치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로 지목했다. 촛불이라는 기표(記標)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닌 게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촛불은 시민이 체험하고 실현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촛불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대로 굳어져 추상화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워가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표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촛불시민이 아닌 민주주의시민, 촛불광장이 아닌 민주주의광장과 같이 구체적인 기표로 호명할 때 이후 시민정치의 방향을 실체화해나갈 동력을 얻게 된다. 

 

운동과 정치를 결합하자

‘적폐청산’이란 구호를 앞세우며 부패한 권력에 대한 분노로 모인 시민들은 혼군(昏君)의 탄핵 이후 촛불을 내려놓고 개혁 작업의 공을 입법부와 사법부의 손에 넘겼다. 하지만 정당에 대한 지지도와 의석수 불비례, 정치공학적 변수 등으로 말미암아 제도개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직접민주주의적 장치를 확대하자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또한, 진보진영 내 조직된 시민사회운동과 조직을 거부하는 시민들 간의 전술적 갈등, 운동과 정당 간의 불협화음 등이 이어지며 진보의 외연적 팽창과 동시에 분란 또한 지속되고 있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미국의 성공한 운동들은 모두 정당과의 협조 수준이 높았다”며 “운동과 정치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났고, 결합을 기획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힘을 창출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운동과 정치,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각 영역의 선명성을 키움과 동시에 서로 간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진보진영의 통합적 힘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다른 패널들도 비슷한 논의를 이어갔다. 이승원 소장은 정치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주 실패하고 이를 고백할수록 정치의 외연은 확대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정치가 의회에 정박된 것이 아니라 거리와 일상에도 생동하고 있다는 걸 시민 스스로 목격하는 기회가 된다.

 

질문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촛불은 무엇이었나?’. 이 질문은 많은 이들이 가진 심층적 불안감의 징후일 수도 있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힘이 소진된 건 아닐까, 가진 역량을 쏟아 부었지만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 텅 비어버린 광장이 앞으로는 결코 다시 채워지지 않을 거 같은 두려움, 전능할 것 같았지만 도리어 무능에 더 가까운 듯한 좌절감 등 말이다. 강렬했던 지난 촛불은 1년 만에 부메랑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변화에 대한 조급증 혹은 강박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촛불을 규정하기 위해 반복적인 질문을 되뇌는지 모른다. 이에 김윤철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긍정적 비관주의’라는 형용모순적 인식을 제시했다. 이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의지적 낙관주의’에 대당(對當)하는 표현으로 녹록치 않은 한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가자는 의미다. ‘긍정적’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비관적 인식은 허무주의와 닿지 않고 구성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며 현실에 기반한 운동 조건이 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촛불은 지난겨울 광장을 밝혔던 촛불의 수만큼 우리 삶이 힘들었다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고, 우리 사회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수만큼 우리 삶이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투영하는 투사지다. 결국 촛불이 지시하는 것은 우리 삶과 사회였고, 그렇기 때문에 촛불은 광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매개하고 연결했던 것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로 이전되어 또 다른 불화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원석처럼 빛나던 촛불은 구체적인 삶의 모양으로 제련되어 각각의 삶의 공간에서 다시 빛나야 한다. 그래야만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라는 질문도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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