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과 문제의식
2014년 12월,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대한항공 총수일가의 심각한 갑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데 이어, 2018년 4월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 생일준비위원회, 각종 욕설과 폭행 정황이 연달아 쏟아졌다.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거듭되는 갑질에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참여연대는 이러한 사건들이 단순히 총수일가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적은 지분으로 그룹 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이사회 등으로부터 견제받지 않는 한국 재벌의 구조에서 기인한 문제로 보았다. 먼저, 대한항공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문제에 주목했다. 대한항공 상표는 애초 공기업이었던 대한항공공사로부터 유래했고, 국적기라는 특혜 속에 형성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 사장 등 총수일가의 사적이익을 챙기는 데 활용되고 있었다. 2013년 대한항공과 한진칼로 회사분할을 할 당시, 대한항공이 보유한 상표권 전부를 한진칼에 귀속시킨 뒤 한진칼에 연평균 300여 억원의 사용료를 지급하면서 그로 인한 수익을 조양호 회장 등 총수일가의 한진칼 지분율(29%)만큼 향유해온 것이다. 이에 2018년 7월, 참여연대는 조양호·조원태 등 총수일가를 배임 혐의로 고발하면서 재벌총수의 사익편취 및 이사회 등 회사 내부감시와 견제장치의 실효성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한항공의 지배구조 개선 운동은 대한항공의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촉구 활동으로 이어졌다.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발전을 위해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주들이 주식 투자로 이익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한국에서도 소수 지분으로 지배권을 남용하는 기형적 경영 행태를 견제할 효과적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고 국민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국가 사회보장제도 중 하나로, 국민의 돈으로 운용되는 국민의 노후자금이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일 뿐 아니라 국내 주요 기업들의 주요주주로서, 2018년 2월 말 기준, 운용 규모가 623.9조 원에 달했고, 그 중 국내주식 투자규모가 129.6조 원이었다. 당시 한국 유가증권 시장 전체 시가총액이 약 1,700조 원이었으니 국민연금의 투자규모는 주요 기업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특정 기업·산업의 부적절한 행위가 미래 세대에 악영향을 끼치거나 다른 기업 가치에 부당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을 때 기업의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이 이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수행할 것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참여연대는 2019년 3월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촉구 시민행동’을 조직하면서 국민연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각종 불·편법 행위와 갑질로 회사에 손해를 초래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막기 위한 소액주주 운동에 돌입했다.
주요 활동 경과
2018년 5월, 참여연대는 국민연금공단에 대한항공의 갑질·불법 의혹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요구했다. 재벌기업의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방치하고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방관하면 결국 기업은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이것이 곧 국민노후자금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결정했음에도 주주권 행사에 소극적이었다. 보다 적극적인 국민연금 압박 행동이 필요했고, 이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총수일가의 전횡과 회사 지배구조에 문제의식이 컸던 대한항공 조종사노동조합, 대한항공 직원연대지부 등과 함께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촉구 시민행동’을 조직했다. 국민연금공단이 국민연금의 ‘선량한 수탁자’로서 한진그룹 총수일가에 대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위) 위원들에게 편지쓰기, 연속기고와 기자회견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지분 7.34%를 보유한 한진칼에는 배임·횡령 등으로 금고형 이상을 받은 이사의 선임을 금지하는 정관변경 ‘제안’을 결정하면서도, 정작 11.68%를 보유한 대한항공에는 지분율이 10% 이상이고 경영참여 목적일 때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토록 하는 ‘10%룰’을 핑계로 경영 참여 주주권을 포기했다.
참으로 무책임한 태도였다. 더 이상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우리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민변 등과 함께 대한항공 주총 일자가 공시되자마자 소액주주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대한항공 주주들에게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과 ‘그 대리인의 이사 선임 반대 의결권’ 위임 권유 활동에 돌입했다.
2019년 3월 5일,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반대 주주활동 시작을 선포하고, 3월 8일 참여연대, 민변,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 이상훈 변호사가 금융감독원에 의결권 대리인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2주간, 대한항공 주주들에게 의결권 위임을 권유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참여연대 등이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활동을 시작하자, 대한항공은 팀장급 이상 간부들을 동원해 직원들에게 조양호 회장의 이사선임을 위해 의결권을 위임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호소와 제보가 빗발쳤고, 회사측의 보복이 두려워 이미 참여연대에 의결권을 위임한 직원들이 철회하는 일도 발생하면서,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와 직원연대지부는 강요죄 혐의로 대한항공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회사 측의 방해 공작과 위임장 원본을 보내야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멕시코·캐나다·홍콩 등 해외에서 보내준 위임장들이 참여연대로 속속 도착했다. 비행을 마치자마자 제복 입은 상태 그대로 참여연대 사무실로 찾아와 위임장을 전달한 조종사도 있었고, 본인과 동창들의 위임장을 모아 한번에 보내온 주주도 있었다. 방문을 요청하면 직접 찾아가 받아왔고, 주주총회 직전에 이 활동을 접하게 된 지방 거주자의 위임장을 고속버스 특송으로 받기도 했다. 불과 2주 동안 이러한 긴박한 과정을 거쳐 참여연대는 대한항공 기업가치를 훼손한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반대를 위해 의결권을 위임해 준 140여 명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주주총회에서 행사할 수 있었다.
2019년 3월 27일, 제57기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은 최종 부결됐다. 우리의 지속된 문제제기와 압박으로 국민연금 기금도 결국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고, 참여연대 등의 현장 표를 제외하고도 조양호 회장의 이사 연임은 부결된 것이다. 이로서 조양호 회장은 주주가 끌어내린 첫 총수로 기록되었다.
대한항공 주총 이후, 참여연대는 코리아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우리사회의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의 적극적인 운영을 위한 제도 개선 활동에 집중했다. 특히 한국 유가증권 시장에서 연기금 중에 투자 규모가 가장 큰 국민연금을 타겟으로 적극적인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고, 이들이 문제기업의 현황을 점검하고, 주주권 행사를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에 나섰다. 동시에 국민연금 투자기업 중에 지배구조 문제가 심각한 기업 리스트를 꼽아 제시하면서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 실행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 출범 후에 국민연금 기금의 의결권 행사에 주요 결정을 담당하는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의 가입자 단체 추천 몫을 줄이고, 정부 선임 전문가 몫을 늘려 정부 입맛대로 운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윤석열 정부는 확고한 지배 주주가 없는 포스코, KT와 같은 소유분산기업에 대해서만 스튜어드십코드를 선택적으로 적용해 관치 논란까지 초래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국민연금을 기업 통제 수단으로 악용하는 윤석열 정부 비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과와 의미
20년 동안 대한항공을 이끌어온 조양호 회장의 이사 연임을 막기 위해 회사측의 조직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문제의식을 확산시켜 결국 부결되게 한 것은 의미가 크다. 또한 대한항공 지배구조 개선 요구 활동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소액주주운동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연기금의 책임있는 의결권 행사’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자금으로 투자 활동을 하는 만큼, 그 의결권의 행사는 당장의 기업의 이해나 요구가 아니라, 사회 정의에 부합하면서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활동 이후로도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국민연금을 상대로 ‘수탁자 책임 활동’을 요구해오고 있다. 이 활동은 땅콩회항, 폭언과 갑질 등 총수 일가의 각종 일탈적 행위가 빈발했던 대한항공으로 시작해, 총수일가 횡령 문제가 불거진 효성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나선 포스코, 사고다발기업 HDC현대산업개발 등과 같이 기업가치 훼손으로 국민노후 자금의 안정적 수익 확대를 저해하는 기업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아직 요원하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취지에 걸맞는 주주권 행사는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제도 취지를 훼손하는 조치들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전근대적인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위한 활동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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