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1681

구로구청 부정선거규탄 농성사건 양원태

‘철학’이 아닌 ‘삶’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꿈꾸며

“역사적으로, 87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중운동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결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어요.”양원태 씨(34세)의 말은 단호했다. 그는 지난 87년 12월, 13대 대통령선거 때 봉인되지 않은 부재자 투표함을 발견하고 구로구청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5층 건물에서 추락, 하반신이 마비됐다.

지난 87년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이른바 ‘6·29 선언’으로 국민들의 항쟁에 ‘화답’했다. 이 선언은 정권의 항복문서이자 동시에 정치적 위기탈출의 해법이었다. 문제는 이 선언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6월항쟁을 주도했던 세력은 ‘다수의 야당인사’와 재야 원로들이 모인 ‘국민운동본부’였고, 지도부들은 6·29선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노태우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 패배에 대해 양원태 씨는 아직까지도 당시 지도부들에 대한 섭섭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야당의 약진 속에서 민중이 주도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은, 운동을 했던 명망가들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야당과의 관계에서 독자성을 갖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심하게 말하면 야당에 팔아먹었다고까지 생각해요. 그러니까 선거에서 졌죠. 사실 선거에서 가장 피해를 본 건 민중운동세력이잖아요.”그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것이 참 싫다고 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입은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구로구청 사건’ 당시 후유증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막노동을 하면서 한 달에 몇십만 원씩 평생 약을 사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구로구청사건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비록 신념에 의한 행동이었더라도 왜 후회가 뒤따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는 전혀 의외의 대답을 꺼냈다.

“사고 후에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는 안했어요. 끓어오르는 분노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부모님들께 잘못했다는 죄책감, 그런 느낌. 그리고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랄까, 미안하다 그럴까. 그런 생각은 했어요.” 사고가 나기 전,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20대 때 그의 유일한 꿈은 ‘선진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었다. 최소한 자기가 노동해서 먹고살고, 동료 노동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양원태 씨는 사고를 당하고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일’에 대한 욕심만은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어떤 강박 때문이었을까. 그는 8개월간의 병상생활을 털고 일어나 곧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뛰어들었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 국회, 장애인인권사업단에서 일하면서 그는 생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혁명을 하기엔 강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철학을 하기에는 근본적이지 못하고, 운동을 하기에는 활동력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운동이라는 게 결국은 생활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소한 것 하나부터 스스로 챙길 줄 아는 것 말이죠.” 그런 가운데 그는 장애인운동단체에 있으면서 ‘다른 세상’을 느꼈다고 했다. 장애인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철거’라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다던 그들. 노점상을 하던 장애인들은 일상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빠뜨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부모님께 손내밀며 한쪽 머리로 ‘혁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 볼 때, 87년의 사건은 스스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막연한 가치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점에서 출발해야 하는 상황. 그 가운데서 그는 운동이 ‘철학’이 아닌 ‘삶’으로 귀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 ‘삶’에서 어떤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양씨는 자신이 가진 회한과 공포의 윤곽을 조금이나마 들려주었다.

“그전까지는 삶은 도외시하고 운동이냐 혁명이냐, 그런 거창한 것들만 생각해 왔었는데, 기본적으로 생활인이 돼야 하니까. 당장 운전면허 하나 따는 것처럼, 변호사 면허 하나 따 놓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노동자로서의 자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격증 하나 딴다’는 생각을 가지고 고시공부를 시작했어요.” 경기도 신도시의 작은 도서관에서 3년째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아직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끊이질 않는 모양으로, 기자에게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386세대들은 뭘 하느냐, 시민단체들은 잘 돼가고 있느냐. ‘참여연대’에 대한 질책과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부러워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뒷받침해 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체제 안정성을 위한 안전망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안이 아니라, 진보적인 문제들에 집중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87년 6월은 그에게 가혹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더욱 강건해진 386세대의 건강성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87년 6월의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이유진 전『사회평론 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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