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0년 09월 2000-09-01   1235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

“대추 따먹지 마시오. 대추에 독약을 뿌렸으니 먹지 마시오.”

옛 안기부 터. 남산 애니메이션센터로 올라가는 길에 아름드리 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 달린 하얀 종이에 써 있는 말이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씨발 연놈들아, 니들 카메라 설치해 놓을 테니 첫 번째 걸린 놈들은 각오해라.”

사무실 골목어귀에 있는, 쓰레기가 가득 쌓인 여관 담벼락에 붙어 있는 글이다. 남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 글귀를 보게 되었다. 이 글을 봤을 때는 화가 나기보다 피식하고 웃음이 먼저 나왔다. 아마도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나온 대사 한마디가 생각났기 때문이리라.

“난 한 놈만 노려”. 그렇지만 웃음 뒤엔 짜증과 함께 내가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길거리의 대추 하나도 남에게 주기 싫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집 앞에 자신들은 쓰레기를 버려도 남이 버리는 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나라에서 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간다고 한두 해 얘기한 것이 아니지만, 이젠 이기적인 것에도 익숙해지지만, 간혹 만나는 이런 일들엔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다. 그저 허름한 쓰레기통 하나와 ‘대추 몇 알을 누군가 먹었네’ 하고 허허 웃으면 되는 문제인데, 저런 글들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혐오감 내지는 불편함을 끼쳐야 하는 걸까? 글쎄 그런 것들을 바란다는 것이 더 이기적인 생각일까? “너나 잘해”라고 누군가 욕을 할 것 같아 덜컥 겁부터 난다. 나도 이 세상을 그리 열심히 살고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저 남에게 폐만 끼치지 말자는 주의니까. 나도 이기적일까? 누구나 지나는 길가에 있는 나무에 독약을 뿌린 채 “먹지 마” 하고 광고판을 붙여 놓아 오히려 더 먹게 만들고 무슨 일이 생기면 먹지 말랬잖아 하고 말하는 친구들…. 쓰레기통보다 휠씬 비싼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쓰레기를 버린 첫번째 놈을 잡고 의기양양할 사람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들의 사는 재미는 그런 것에 있나? 이런 생각과 반 협박적인 글들을 보고 나면 동성애자로 살아가야 하는 내 처지가 더 비관적이고, 비참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이제 2000년이니 동성애자들도 세상 살아가기가 많이 편해졌으리라 지레 짐작들을 하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그저 내 집 앞의 쓰레기를 걱정하고, 맛있는 대추가 남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은 쓰지만, 타인의 성 정체성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저 내 가족이나 내 친구들, 내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저 그 몹쓸 질병(?)에 감염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 문제를 사회문제의 마지노선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동성애만 허용(?)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건 여전히 힘들고 벅찬 핸디캡 중의 하나이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들과 나의 성 정체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것이다.

퀴어영화제 준비로 바쁜 사무실에 많은 친구들이 방문한다. 그 중엔 자원봉사자들도 있고, 자신의 성 정체성 문제를 의논하려는 친구도 있고, 순수하게 영화가 좋아 영화공부를 하기 위해 오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 모두가 동성애자인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성애자이다. 20년 이상 이성애 교육만 받고 살아왔던 그들이지만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나에겐 그들이 오히려 세상 사는 의미를 부여해준다. 간혹이지만 그 중에는 정말 고마운 친구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고대하면서 2000년 퀴어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

박기호 2000년 퀴어영화제 사무국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