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과 사회구조는 점점 더 미국화(Americanized)되고 있다. 제너럴 모터스의 대량해고와 아웃소싱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고, 월마트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인사관리는 우리의 유통업 전반에 침투되고 있다. 아울러 채 갖추지도 못한 사회보장 시스템은 승자독식의 아메리칸 스타일에 짓눌리고 있다. 여기에 맥도널드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맨파워(Manpower Inc.)의 ‘3M’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비정규화’ 전략은 바로 오늘의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미 연방국세국 기업의 비정규직 채용 추세 비난
미국의 노동자 가운데 파트타임, 파견, 임시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contingent worker)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노동인구의 30%, 수로는 3,9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사회보험을 관장하는 연방국세국(GAO)이 지난해 9월에 발표한 수치이다. GAO는 이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사회보험료 부담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며, 특히 우리나라 보험설계사의 경우처럼 사실상 고용·피고용 관계에 있는 일부 노동자들을 이른바 독립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라는 이름으로 종업원 명부에서 누락시키는 편법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세국의 이같은 입장 표명은 그동안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노조와 시민단체의 입장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이기도 한데, 에드워드 케네디를 비롯한 개혁적인 상하원 의원들은 이 문제를 미 의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AFL-CIO를 비롯한 노동조합들도 이 문제를 향후 미국 노동운동의 향배가 걸린 중요한 쟁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노조원 수는 1999년말 현재 1,650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3.9% 수준이다. 2차 대전 이후 70년대까지 35%에 이르던 노조조직률은 1973년을 고비로 80년대 이후 급감했다. 특히 1990년 이후에는 제조업의 해외이전과 무노조 기업의 증가로 노조운동은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노조가 조직된 부문의 일자리는 계속 감소한 반면,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는 비정규직과 여성·이민노동자 등 그 동안 노조가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은 저임금 노동자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경기호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70년대보다도 10% 이상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인들은 경제가 나아지고 있음에도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빈부격차도 더 심해지고 있다. 따라서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민노동자를 조직하지 않으면 노조의 영향력 감소와 생활조건의 하락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기본 인식이다. 한편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는 시민운동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여성과 이민자, 그리고 젊은 세대들로 채워지고 있다. 임시직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20∼35세의 청년층에 집중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료보험 가입률은 88%인데 비해 비정규 노동자들의 가입률은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사업주가 보험료를 부담하는 경우는 9%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규직의 47%가 연금혜택을 받고 있는 반면, 비정규직의 적용비율은 13%에 불과하다. 이것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 비정규 노동자에게 치명적인 불안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종에 따라 직업과 계층은 물론, 거주지까지 확연히 나뉘는 미국 사회에서 이같은 문제는 곧바로 지역사회의 이슈가 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지금 노동조합과 학생운동, 시민단체, 나아가 지역사회의 다양한 공동체 조직이 비정규 노동자의 권익을 확보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운동에 함께 나서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민운동에서 쟁점으로 부각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0년 5월 23일, AFL-CIO를 비롯해 미조직 노동자 조직확대에 적극적인 산별노조와 지역조직들, 보스턴의 비정규 노동자캠페인(CCW), 나인 투 파이브(9 to 5)와 같은 여성노동단체, 2030센터와 같은 청년단체, 그리고 주민조직과 교회, 인권단체 등 다양한 노동사회단체들이 결성한 ‘공정고용을 위한 전국동맹’(NAFFE)이다. NAFFE는 비정규노동자들을 노조원으로 조직하는 데 공동의 노력을 벌이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법률의 제정을 상하원과 각 주의회에 촉구하고 있다. 아울러 기업윤리강령(Code of Conduct)을 제정해 이를 파견업체나 용역업체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지방정부와 공공부문에서 이같은 내용을 모범적으로 준수할 것을 선언하게 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부 조직들은 상업적인 인력공급사업의 대안으로 캘리포니아주의 사이스배이에 있는 투게더앳워크(Together@Work)와 같은 비영리업체 또는 노동자가 직접 운영하는 파견업체 설립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무엇보다 비정규노동자들을 노조로 조직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비정규노동자들의 노조결성 투쟁은 부쩍 활기를 띄고 있다. 워싱턴주 시애틀의 웹디자이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등 수천 명의 파견 노동자들은 지난해 초 마이크로소프트에 맞서 워싱턴기술노동자연맹(WashTech)을 결성했다. 그들은 한 회사에서 수년 간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직의 지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고, 저임금에 의료보험, 연금, 스톡옵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수년 간의 투쟁 끝에 이들 노동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용자의 책임을 져야 하며, 법률이 정한 수당들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올해 들어서는 아마존(Amazon.com)에서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대학강사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스턴에서는 58개 대학의 1만 명의 시간강사와 보조강사들이 기본급도 없이 한 학기당 약 2,200 달러를 받고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에 매사추세츠대학 보스턴분교의 시간강사들은 노조를 결성했고, 3년 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의료보험과 연금을 전면 보장받고, 강좌당 4,000 달러의 임금을 확보했다. 테네시산업부흥네트워크(TIRN)는 공공기관의 아웃소싱을 규제하는 법률의 제정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업무를 외부에 위탁할 경우 생활임금을 보장하도록 하고 파견업체를 통한 임금삭감을 막기 위한 노력을 벌였다. 이 운동을 통해 테네시주의 사회복지 활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의 네트워크가 탄생했고, 이들은 현재 녹스빌, 내쉬빌, 테네시대학에서 생활임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LA의 한인노동상담소(KIWA)는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지역에서 건너온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몇몇 한국인 사장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KIWA는 하청업체의 임금체불에 대해 원청업체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임금보장법(Wage Guarantee Act) 제정을 촉구하고, 이 법이 캘리포니아주 의회를 통과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노동조합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조금씩 나서고 있다. 지난해 4월 건설노동조합은 마침내 일용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전국적인 캠페인에 시동을 걸었다. 같은 시기에 LA에서는 7만4,000명의 간병인 노동자들이 10년 간의 오랜 노력 끝에 서비스노조(SEIU) 지부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미국의 노조원수는 26만 명이 늘어 1980년 이후 20년 간 최고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해마다 50만 명의 노조원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현재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조직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매년 100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를 조직해야 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최근 장기호황이 막을 내리고 있고, 보수적인 공화당 정권이 등장하면서 노조운동은 이중 삼중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확보하고 부당한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미국의 노동조합들은 시민운동과 지역운동 단체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비록 인종문제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독특한 구조가 반영되어 있긴 하지만, 노동자의 문제를 사회 정의를 확립하는 운동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미국인들의 노력은 동시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의 비정규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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