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정치적 계산
글 사진 김재명 <프레시안>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타임머신을 타고 꼭 60년 전으로 되돌아 가볼 수만 있다면,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 총을 겨누었던 6·25전쟁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터진다면 어떻게 될까? 21세기의 무기체계는 60년 전에 견주어 살상력이 훨씬 더 커졌으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게 뻔하다. 남북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한반도는 잿더미로 바뀔 것이다. 그럼에도 이즈음 전쟁을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군의 공격 탓이라는 굳센 믿음 아래, “보복을 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어떤 정당 지도자는 전쟁이 터질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문제는 얄팍한 정치적 계산으로 위기상황을 이용해 한 국가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리는 행위다. 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가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목숨을 잃은 사례들이 많다. 지난 1982년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3개월 동안 치러졌던 포클랜드 전쟁(또는, 말비나스 전쟁)도 그 한 보기다. 이 전쟁에서 당사국인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지도자들은 모두 각기 나름의 정치적 계산을 깔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용하려 들었다.
아르헨티나 전쟁 덕 본 대처 정권
아르헨티나 영토에 맞붙은 포클랜드 섬은 1700년대부터 영국이 식민지로 갖고 있던 땅이었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 섬을 ‘라스 말비나스’로 부르며, 심정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영토로 여겼다. 전쟁이 터질 무렵 아르헨티나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친미 군부독재정권의 민주화 탄압과정에서 무려 3만 명이 실종되는 ‘더러운 전쟁’을 치렀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고용불안 속에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이 깊어가는 중이었다. 한 마디로 국민들은 군부독재의 악정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판에 장군 출신의 독재자 레오폴드 포르투나토 갈티에리 대통령은 영국으로부터 포클랜드 섬을 빼앗기로 결정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민생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소수의 영국군 병력이 주둔한 포클랜드 섬을 점령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 소식에 열광했다. 아르헨티나 독재자 갈티에리 장군의 불순한 정치적 계산은 성공한 듯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 섬을 수복하겠다고 나선다면, 아르헨티나-영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갈티에리 장군은 영국 지도자들이 외딴 섬 하나 때문에 파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었다. 영국과 한동안 긴장관계는 이어지겠지만, 그러는 동안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움직임도 수그러들고, 정부에 대한 지지율도 올라가길 바랐다. 그러나 전쟁이 터졌다. 영국군이 대서양을 건너 몰려왔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중요 사실이 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치인들도 포클랜드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한 마디로 영국군의 파병은 “포클랜드 사태 덕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정치적 계산이 따른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군의 포클랜드 침공 당시 영국 정치지도자는 다름 아닌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지닌 마가렛 대처 총리였다. 영국보수당 지도자로서 전쟁 3년 전(1979년) 총리에 오른 대처는 그동안 노동자 파업, 경제난 등 국내문제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국내문제로 골치가 아파 뭔가 비상수단으로 국면전환이 절실했던 대처에게 포클랜드 사태는 하늘이 준 호기나 다름없었다. 대처는 즉각 영국군 파병을 결정했고,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전쟁이 터진 3개월 뒤 아르헨티나 군은 649명의 전사자를 낸 채 항복했다. 포클랜드 패전은 갈티에리 대통령의 군부독재 몰락을 재촉했고, 해를 넘긴 1983년 군사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영국에선 반대상황이 벌어졌다. 전쟁 전 영국보수당 지지율은 27%에 머물렀는데, 전쟁 승리 바로 뒤 44%로 껑충 올랐다. 때마침 불어닥친 경기회복 바람 덕에 대처 총리는 1983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1984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탄광노조의 파업이 일어나자, 대처 총리는 강경탄압에 나섰다. 그녀는 “우린 밖에서 외부의 적(아르헨티나)과 싸웠다. 그런데 안에도 적이 있다. 그들은 훨씬 위험한 자유의 적”이라고 주장했고, 그런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갔다. 영국 대처총리의 보수당 정권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데에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 군부가 한몫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젊은이들과 후방의 국민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프러시아의 군사전략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이란 책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을 가리켜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이란 정의를 내렸다. 줄여 말해서 전쟁은 곧 정치적 행위라는 얘기다. 다만 군사력을 비롯한 ‘다른 수단’을 동원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쟁은 분명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중요한 것은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포클랜드전쟁 당시의 영국이나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많은 국가의 정치지도자들이 지금껏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그들 나름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굳이 일으키지 않아도 될 전쟁을 일으킨다면 누가 고통을 받을 것인가. 전선의 젊은이들과 후방의 국민들이다.
천안함의 비극과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을 정치적 행위로 풀이한 클라우제비츠의 고전적 정의는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여러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특히 이 땅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남북 간의 긴장과 대결국면을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움직임과 △정치적인 이유로, 최후의 수단이어야 할 전쟁을 함부로 도발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땅의 평화시민들은 뜻을 모아 위와 같은 움직임들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런 노력이 바로 제 2의 6·25 참극을 막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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