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래피라는 ‘상식’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대한 책인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구분한 적이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스투디움’은 사진을 기존의 문화적 코드를 통해 해독하는 일을 말하며, ‘푼크툼’은 특정한 사진이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강렬하고 구체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스투디움’이 일반적이고 코드화되어 있는 평범한 읽기라면, ‘푼크툼’은 개인적, 구체적, 탈 코드화된 특수한 읽기의 영역에 속한다. 바르트에게 있어 사진이 가진 힘은 ‘스투디움’이 아니라 ‘푼크툼’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개념을 ‘포르노그래피적인 것’과 ‘에로스적인 것’을 구분하면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전자가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존 사회의 코드를 재생산하는 단조로움 속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우리에게 존재의 본질을 현현해주는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지루한 반복으로서의 포르노그래피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성의 코드는 바르트의 구분에 따른다면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이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도시의 골목에는 ‘미녀 여대생 항시 대기’라는 간판이 버젓이 달린 단란주점이 곳곳에 있고, 텔레비전의 음악 프로그램 속에서는 개성 대신 상품성만을 가진 ‘각종’ 아이돌 그룹들이 허벅지와 엉덩이와 복근을 내세우는 춤을 연일 추어대고, 연예인들은 토크쇼에서 ‘야동’을 본 경험을 얘기하면서 킥킥거린다. 7~80년대의 문화적 보수주의 속에서 성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 개인의 ‘해방’을 드러내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음에 비춰볼 때, 90년대 이후 지금 한국사회에서 성은 해방을 만끽하면서 도처에서 활개 치는 형국이다. 하지만, 성에 대한 이 넘치는 표현들은 하나같이 단조롭고 평범하고 코드화된 ‘스투디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생긴 남자 스타의 돈 냄새 풀풀 나는 ‘식스팩’이나 어여쁜 여자 스타의 매끄러운 ‘꿀벅지’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어디든 퍼져있어 최초의 신선함을 상실한 지 오래 되었다. 강남역이나 홍대입구에 가면 이들과 비슷한 ‘섹시한’ 남녀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으며, 이들의 ‘섹시함’ 속에서는 유행하는 몸매나 패션에 관한 동일한 코드만이 있지 심장을 파고드는 강렬함은 찾기 힘들다. ‘해방’은 일회적인 것이어서, 한번 해방되고 나면 그 이후에는 몇 차례의 일시적 변종을 제외하면 지루한 단순함만이 이어지기 십상이다. 한국의 거리와 대중문화를 휩쓸고 있는 성의 이미지들이 내게는 그런 단순함이다. 그것은 ‘야동’ 혹은 포르노그래피 속에 담긴 성행위의 반복적 이미지들이 주는 지루함이기도 하다. 한 번의 흥분이 지나면,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그리고는 다음번의 흥분을 위해 이미지들은 다시 지루하게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은 그래서 ‘욕망’이 아니라 ‘지루한 반복’을 뜻한다. 사실 그 지루한 반복은 ‘일상’의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침이면 일어나 직장에 가서 종일 노동을 하고, 짧은 휴식 후에 다시 직장에 나가는 생을 수십 년간 계속한다. 이 ‘반복’은 ‘지루’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지루한 반복을 지속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이야말로 거의 모두를 임금노동자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또 서비스현장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감정을 반복하여 판매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삶을 영위한다. 자본주의의 꽃인 ‘소비’ 역시 비슷한 패턴을 가지며, 가요나 상업영화 같은 대중문화의 장르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아이템’이 잘 팔리면 비슷한 아이템들이 등장하고, 어느 순간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하면서 사이클은 이어진다. 지루한 반복으로 가득 찬 일상과 문화가 포르노그래피적인 성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고된 삶의 쳇바퀴를 돌며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린 개인들에게 잠깐의 짬에서 필요한 것은 자기 삶을 걸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분출되지 못한 성욕을 푸는 짜릿한 기회다. 그리고 이런 ‘기회’들 대부분은 역시 판매되고 소비되는 상품의 매커니즘 속에 있다.
포르노그패피적 상식과 에로스적 정치
우리 주변에 만연한, 갈수록 빈번해지고 갈수록 강력해지는 ‘성폭력’들은 이러한 포르노그래피적인 성, 단순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인 스투디움의 문화, 곧 여성의 성이 소비와 거래의 대상일 뿐인 문화를 배경으로 번창한다. 스폰서 검사들이 ‘합법적’으로 단란주점 여성의 성을 소비한다면, 교장이나 목사는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학생과 신도를 ‘딸처럼 어루만짐’으로써, 앞날이 막힌 실업자는 재개발 골목을 걷는 여중생을 납치함으로써 성을 강탈해간다. 판사는 각각의 경우에 각기 다른 형을 구형하겠지만, 내게는 이 모든 사례들이 동일한 몸체를 지닌 샴쌍둥이들처럼 보인다.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이 여대생들에게 했다는 술자리 발언 역시 내게는 ‘정신 나간 의원’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법조계와 엘리트 상층부에 만연한 포르노그래피적 성문화가 잠시 그 맨얼굴을 드러낸 것일 뿐으로 보인다. 그가 ‘여대생’과 ‘아나운서’와 ‘예쁜 여자’와 ‘사모님’에 대해 한 발언들을 보라. 그것은 한국 남자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일종의 ‘상식’들이고, 그런 점에서 어쩌면 강용석은 지극히 ‘상식적’인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정부나 법원은 성에 관한 문제들이 이슈가 될 때마다 ‘CCTV를 더 많이 설치하겠다.’든가 ‘전자발찌를 채우겠다.’든가 ‘형량을 높이겠다.’는 식의 ‘일벌백계 의지’를 천명한다. 이런 식의 정책들은 성과 일상과 노동과 소비와 대중문화의 영역들에 복잡하게 걸쳐있는 포르노그래피적인 문화 전체를 보지 않고, 그저 개별 사건의 행위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문제를 전적으로 개인화함으로써 어긋난 사회의 환경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전형적인 회피와 기만의 논리다. 가득 쌓인 오물은 그대로 놔두고 몸집이 큰 똥파리들만 잡는다고 해서 그곳의 악취가 사라지거나 똥파리들이 나타나지 않을 리는 없다. 문제는, 우리의 시스템은 매순간 오물을 배출해놓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빡세게’ 일했으니 ‘빡세게’ 풀어야 하는 것이다. OECD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자살률과 최고의 성범죄율 사이에는 그럴만한 관련성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둘러싼 포르노그래피적 문화는 최대의 효율과 속도를 위해 다른 모든 가치들을 희생해 온 수십 년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오물이다. 그 시스템을 지켜야 할 권력기관이 오물 자체를 없애는 일을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이 불가능성에 맞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라 할 수 있다. 포르노그래피적인 ‘상식’이 아닌,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강렬한 힘인 에로스적인 ‘정치’를 상상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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