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이용길 회원
김수 영화인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참여연대를 찾은 이용길 회원. 도착하자마자 얼굴이 익은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담당했던 간사에게 후원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인터뷰 후에는 간사들을 챙겨 밥을 대접한다.
8만 958명. 서울시에서 공표한 서울광장조례개정 청구인 숫자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서명을 받아내기란, 시민들 스스로의 활발한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란 예측을 뛰어넘고, 서울 시민들은 광장을 품안으로 되찾아왔다. 서울광장을 되찾는 운동의 중심에 ‘서울광장을 찾는 사람들’ 공익로비단장으로 활동한 이용길 회원이 있었다. 좀 더 역할을 하지 못해서 아쉽고, 집회에 그저 머릿수 채우러 나간다는 이용길 회원의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화법을 돌이켜보면, 앞서 사용한 ‘중심’이라는 표현이 머쓱하다. 8만 5천여 명으로 마무리된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서명 하나하나엔 서열도, 좌우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역 촛불 활동에 열심이고, 광장조례개정 운동 수임인 역할을 했으며, 한미FTA, 반값등록금 등 다양한 이슈로 1인시위를 하는 그의 활동에 감탄하는 것이 공치사는 아니리라.
참여연대에 도착하자마자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담당했던 간사에게 후원금부터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이용길 회원. 잠시 숨을 돌리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시민운동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전 시민운동이라곤 전혀 몰랐던 사람이예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였던 시절에 김민석 후보와 했던 TV토론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의료보험료 문제가 나오더라고요. 당시 이명박 후보 재산이 400억 가량이라고 들었는데, 재산이 1억도 안 되는 내가 (의료보험료를)6만원 넘게, 그 사람보다 두 배가 넘게 많은 돈을 낸다는 사실이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법적으론 하자가 없다고 말하는데 도덕적인 문제는 없나요?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시장이 됐어요.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이게 시민운동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사람 찍지 말라고 선거운동 아닌 선거운동을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운동이다 뭐다 개념이 없었어요.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딸이 2008년 촛불집회에서 물대포 쏜 첫날에 참여한 이후에요. 딸이 전화해서 동영상을 보래요. 물대포 쏘고, 시민들 짓밟는 영상을 보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제가 일본 화랑이랑 거래를 하는데, 그때 통역해주던 친구가 촛불집회에 한번 나가보자고 권유를 했어요. 그날 나간 게 동기가 돼서 매주 나가게 됐죠.
광우병 발병 시 미국 소 수입을 전면 중단하겠다던 약속 안 지키고 있는데, 화가 많이 나시겠어요?
화도 안 나요. 전혀 안 믿었기 때문에.(웃음) 약속을 지키는 마인드가 안 되어 있어요.
2012년 2월 6일, 곽노현 교육감 석방 기념 모임에(촛불네티즌과 함께) 참석한 이용길 회원.
우리는 소리 낼 곳이 필요하다
서울 시민에게 서울광장이 갖는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미를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서울광장은 서울 시민의 것이잖아요. 거기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회를 자유롭게 했는데, 차 벽으로 막고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그럴수록 현 정부에 대한 적개심은 커지고.
2010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하는 조례개정안이 통과됐지만 오세훈 전 시장이 무효라며 대법원에 제소를 했었죠.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참관하면서 시의원들이 회의하는 과정을 봤는데, 그게 워낙 뻔해요. (당시) 행정자치위원회 의원 9명 전원이 한나라당 소속이었어요. 말들은 좋게 하지만 회의 결과는 항상 제자리였어요. 그런 행태 보면서 기대를 전혀 안 했죠.
(현재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세훈 전 시장의 대법원 제소를 취하하고 신고제를 시행하고 있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계신데, 광장 찾기에 특별히 애정을 쏟은 이유가 있나요?
처음이잖아요. 운동에 참여한 게 처음이니까. 거기에 뜻이 있다고 생각했고, 처음이라서 더욱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서울광장 사용 조례개정 청구를 위해 청구인 서명을 받는) 수임인 신청은 사실 나도 모르게 한 거였어요.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한 게 아니에요. 노무현 대통령 장례 즈음인 걸로 기억이 나는데, 수임인 신청 받는 게 서명 하나 하면 되는 간단한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다음에 전화가 왔는데, 수임인 교육을 받으러 나오라고 해서 참여연대에 처음 왔어요. 그렇게 알게 되고, 해봐야지 하고 생각했죠.
그때 당시 촛불들이 지역으로 스며들었어요. 저는 당시 도봉에 살면서도 성북촛불을 먼저 알았어요. 성북촛불 할 때마다 광장조례개정 서명을 받았죠. 그리고 좀 있다가 도봉촛불도 알게 됐어요. 성북이 수요일, 도봉이 목요일이어서 번갈아 갈 수 있어서 서명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죠. 그렇게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 3, 4개월 넘어갈 때만 해도 4만 명 겨우 넘었던가. 그래서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해보자 마음먹었죠. 동네 가게 같은 곳에 맡겨놓고 2, 30장씩 받기도 하고.
서울광장에 이어 광화문광장도 신고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근에 미 대사관이 있어 집시법상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조례안이 부결되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혀 설득력 없죠. 제가 볼 때는 청와대가 가까우니까 막는 거예요.(웃음) 모든 게 청와대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생각 한 번만 바꾸면 되는 건데…….
광장을 시민들에게서 빼앗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 상징성 때문에 반발심은 강해지게 마련인데, 왜 이렇게 무리해서 막으려 들까요?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쳤어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면서 놀다 가는 건데, 거기다 대고 경고방송, 과잉진압 등 자극을 해요. 멍청한 거예요.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 두뇌 집단이 모여서 왜 그렇게 멍청한 짓만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2009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셨는데, 계기가?
도봉촛불 60~70%가 민주노동당 당원들이었어요. 3년 전인가, 송년회 따라갔다가 가입을 하게 됐죠.
부정경선이 불거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통합진보당에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사실 저는 잘 몰라요. 그래서 얘기하긴 힘든데, 제 개인 입장을 말하자면 민주통합당에서 원인을 제공했다고 봐요.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을 너무 견제했어요. 통합진보당이 30석을 요구했는데 민주통합당이 5석을 준다고 했을 때, 너무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명의 당원인)저조차도 위기감을 느꼈어요. 그런 위기감에서 (이번 부정경선이) 촉발된 것 같아요.
정체성이 다른 세 가지 세력이 힘을 합할 때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통합진보당이 출범할 때 어떤 입장이셨나요?
성북촛불이 겨우 20~30명인데 그게 깨지는 과정을 봤어요. 크나 작으나 똑같아요. 진보신당이랑 합치려고 할 때 대의원 대회에 가서 봤는데 ‘왜 저래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북촛불에서도 힘을 합쳐보려고 노력을 해봤는데, 결국 통합이 안 됐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맞구나, 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그림으로 생계를 잇고, 이제 더 나아가기
시민의 소리를 내는 데에 그저 머릿수만이라도 더한다는 생각으로 각종 집회에 참여한다는 이용길 회원.
약력을 보니까 화가시던데요?
화가는 아니고요. 할 게 없으니까 그림을 배우게 돼서, 직업 삼아서 평생 먹고 사는 사람이예요.
그림은 언제 배우셨어요?
옛날에 극장에 있었어요. 유화를 시작한 지가 40년 가까이 됐어요. 그림을 그려서 팔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다행히 좋은 여건에서 일하게 됐고 일본과 계약을 해서 그림을 수출했죠. 요즘은 일본 경기가 나빠져서 힘들어요.
어떤 그림을 그리세요?
풍경화 위주로 그렸어요. 지금까지는 팔기 좋은 그림만 그렸고, 꿈은 전시회 한번 하는 거예요. 근데 전시회가 만만치가 않아요. 전시를 하려면 2, 30점 정도가 필요한데 그걸 모으는 게 장난이 아니거든요.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림을 다 팔아서 모아놓은 그림이 없어요. 새로 작품 준비를 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림 그리는 일이 선생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나요?
아직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에요. 내가 그걸로 가정을 이끌고 자식들을 키웠으니까, 그냥 평범한 거예요. 뭐랄까, 직업인이죠. 그림 자체는 내가 좋아서 시작을 한 거니까. 그래도 대기업에 가서 돈 많이 받으면서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는 것보단, 돈은 못 벌었지만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생각은 해요. 싫으면 못하죠.
그림 그리면 행복하세요?
그렇죠. (그림 그릴 땐)아무 생각 없어요. 피곤한지도 모르고. 작업장이 내 숙소예요. 아침 10시부터 앉아서 그리기 시작하면 밤 10~11시까지도 하니까.
거의 12시간을요?
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꿈꾸는 작품 세계는?
요새는 전과 좀 달라졌어요. 민중미술을 하고 싶어요. 88년도에 파리, 런던 두 군데 견학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인솔자가 ‘거기 가면 붓대 꺾는단 소리 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곳 미술관에서 고전 명화들을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웃음) 배운 게 없으니 어렵겠지만, (명화에) 근접할 수 있는 민중미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의 만평을 좋아해요. 그걸 민중미술로 만들어보면 좋겠단 생각도 했어요.
촛불시민을 그린 이용길회원의 작품
“MB 덕분입니다”
참여연대 회원으로서 바라는 점이나 느끼는 바가 있나요?
저는 행복하죠. 좋은 분들 많이 만나고. 여기 와서 보면 다 좋은 분들만 계시더라고요.
보통 연세가 많은 분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데, 선생님께선 굉장히 진보적인 삶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또 이명박 대통령이죠.(웃음) 저는 그래요. 이명박 대통령한테 굉장히 고마운 점도 있어요. 이전에는 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활동을 할 만한 계기가 없었어요. 한국에서 그림 그려서 먹고 살려면 생업에만 생각을 쏟아도 정말 힘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활동을 하게끔 만들어 줬으니까.
한 사람의 활동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저는 계획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이명박 정권이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가겠거니,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어느 정권이 들어서나 목소리 내는 사람은 필요한 것 같고, 아마 그때도 내 역할이 필요하면 나오지 않을까요? 그게 정답 같아요. 특별한 사회적 직책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평범하게나마 소리 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나올 거예요. 그만두진 못할 것 같아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이 생업인 이용길 회원의 작업장은
거리이기도, 누군가의 영업장이기도, 그의 집이기도 하다.
초보 인터뷰어에게 남은 것
인터뷰를 맡으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다양한 회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나의 내면에도 귀 기울이겠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용길 회원과의 인터뷰는 많은 걸 남겼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레토릭이 진실이라는 것. 영화학도로서 ‘이야기’를 갈구하던 습관이 되살아났다는 것. 지식의 언어보다 지혜의 말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것.
초보 인터뷰어라는 부연을 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간사들의 식사를 직접 챙기고, 조용히 쌍용차 분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용길 회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요한 건 결국 주어진 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실천임을 새삼 느꼈다. 초보니, 프로니 하는 것도 결국 스스로 세워놓은 마음의 벽에 불과하니까. 차분하게 마음을 강타했던 이용길 회원의 마지막 답변처럼, ‘평범하게나마 소리 낼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보련다.
김수
합리적 낭만주의자. 10년 넘게 영화에 대한 외사랑을 지키고 있는 나름 순정파. 인터뷰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며 나 자신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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