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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버마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을 선포하고, 버마 여성과 아동 인권 개선을 촉구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
*군사독재를 부정하고 민주회복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국내외 언론 및 시민사회는 1989년 군사정권이 정한 국호 미얀마 대신 버마를 써왔다. 이후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군사정권과 협력하고 이후 NLD가 집권해서도 미얀마든 버마든 상관없다고 밝히면서 미얀마라는 국호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2024년, 빛나는 활동 – ‘버마 민주화 연대 활동’을 업데이트 하면서 연대체 이름이나 당시 캠페인명에 사용된 ‘버마’ 표현을 제외하고 국명을 미얀마로 통일하였음을 밝혀둔다.
┃ 배경과 문제의식 ┃
참여연대는 2004년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년을 향한 참여연대의 5대 비전을 담은 ‘희망과 비전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국경을 넘어서는 참여와 연대, 특히 아시아 연대를 중심으로 국제연대를 활성화한다는 것이 5대 비전 중 하나였다. 이러한 논의 결과에 따라 2005년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전략 간담회를 연중으로 진행했다. 마침내 ‘우리 속의 아시아, 우리가 만드는 아시아’라는 활동 기조와 사업 방향을 수립하고, 아시아 민주주의 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버마 민주화와 인권’ 지원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이에 앞서 2004년 태국에서 미얀마 민주화 활동을 하는 아시아의 단체들 간의 전략 회의에 참여하면서 미얀마를 둘러싼 국제적인 동향과 단체들의 활동을 익힐 수 있었다.
미얀마는 1962년 군부의 쿠데타 이후 40여 년 동안 군부 독재정권의 폭압정치로 국민의 정치적 자유는 극히 제한되었고 경제는 침체를 거듭하여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수많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도 거셌다. 이러한 가운데 미얀마 민주화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를 기해 미얀마에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른바 ‘8888 버마 민주화운동’이었다. 시위가 확산되자 군이 진압에 나서고 이 과정에서 약 1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정권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나라 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강제 개명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얀마 국내외에서는 ‘버마’라는 이름을 고수하였다.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민족민주동맹)가 미얀마 민중의 절대적 지지로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 총칼로 정권 이양 을 거부했으며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가택 연금 조치하였다. 미얀마 활동가들은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하자 해외 망명의 길에 올랐으며, 해외불법체류 이주 노동자가 되었다. 삶의 터전을 파괴당한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피난민이 되어 정글을 유랑하거나 태국 등 국경 근접국의 난민캠프로 흘러들었다.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을 겪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한국 시민사회에 있어 미얀마의 이러한 상황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아시아 연대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또한 한국에는 이미 NLD한국지부, 버마행동 등 미얀마 활동가들이 조직되어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 주요 활동 경과 ┃
참여연대를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2000년대 초반에도 아웅산 수치 석방과 미얀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활동을 간헐적으로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공동행동은 2005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군사독재정부를 피해 한국으로 피신하여 이후 10여 년 간 국내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활동가 9명에 대해 한국 정부가 2005년 난민 인정 불허 결정과 함께 일방적인 출국 통보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참여연대, 함께하는 시민행동, 국제민주연대, 나와우리,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 한국앰네스티, 민변, 버마민주화-부찌계 등 11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 정부의 결정을 철회하도록 정부와 국회에 탄원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며 ‘버마 민주화운동가들을 내쫓지 말라’ 공동캠페인을 벌였다. 9명의 미얀마 난민 불허자들은 이후 2006년 법무부를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결정처분 취소소송에서 승소하였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로 한 국제연대위원회는 먼저 ‘버마와 우리’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하였다. 미얀마에 대한 각종 정보와 관련 국내외 단체 소개, 신문기사 등을 모아 종합적인 정보를 축적하고 제공하기 위한 한국 시민사회 최초의 웹사이트였다. 그리고 여기서 모은 소식들을 간추려 이메일 뉴스레터를 발행하였다. 2006년에는 8888민중항쟁 18주년을 맞이하여 새사회연대, 인권실천시민연대,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등 공동행동 단체들을 확대하여 ‘버마 민주화를 촉구하는 인권주간’을 선포하고 다채로운 캠페인을 벌였다. 여의도 공원에서 아시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미얀마 민주화촉구 자전거 캠페인, 한남동 미얀마대사관 앞 기자회견, 인사동 거리에서 미얀마의 진실을 알리는 사진전, 미얀마-태국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는 미얀마 활동가 초청 간담회, 미얀마 난민 지원을 위한 후원행사 등이다. ‘미얀마에 민주화를! 아시아에 평화를!’이라 외치며 무엇보다 한국 시민사회에 미얀마의 상황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그동안 미얀마 민주화 문제에 묻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미얀마 여성과 아동의 인권 실태를 직접 듣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을 감시하는 국제민주연대를 중심으로 한국기업의 미얀마 가스개발로 인한 인권 침해 우려 문제를 알려나갔다. 이미 프랑스와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투자한 미얀마 가스개발사업이 미얀마 주민들의 강제노동, 강제이주, 강간 등의 인권침해를 낳아 국제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 합의에 이르는 소송까지 치러야 했던 사례가 있었다.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가 추진하는 슈에 지역 가스개발사업도 인권유린과 같은 문제를 가져올 것이 예상되었기에, 실태 파악에 나서고 예상되는 인권침해와 환경파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대책을 촉구한 것이다. 게다가 대우인터내셔널이 방위산업 물자를 미얀마에 불법 수출한 혐의로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언론 보도가 있어 철저한 수사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였다.
2007년에는 승려들이 촉발한 비폭력 민주화 요구를 군부가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 데 대해 국내 종교계를 포함한 각계 인사들을 모아 군부의 학살 중단을 요구하는 긴급 행동에 나섰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연대의 의미로, 미얀마 승려들이 입는 가사와 비슷한 붉은 색의 천을 두르고 참여하였다. 참여연대는 일련의 공동행동에 적극 결합하는 것은 물론 2008년에는 미얀마 사이클론 피해 모금활동을 벌이고, 태국으로 피신해있는 미얀마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모은 책자를 구해 「양지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번역은 모두 참여연대 자원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산 수치 여사가 2012년 4월 1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NLD도 재보선 대상 45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둘 때까지 참여연대를 비롯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미얀마 군부의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드디어 실현될 것이란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히 깨졌다. 장기간의 군부독재를 끝내고 들어선 문민정부조차 미얀마 내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에 대한 공격과 차별, 탄압을 자행했다. 2017년 일부 로힝야 무장세력이 미얀마 경비초소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미얀마 정부가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로힝야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접경지역 난민으로 내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얀마 군부 탄압을 피해 199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민주화운동을 이어가던 재한 미얀마인들이 서울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앞에서 ‘로힝야는 미얀마의 소수민족이 아니다’라며 로힝야 탄압을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동안 재한 미얀마인들의 민주화 운동에 연대했던 참여연대를 포함한 한국 시민단체들은 ‘로힝야와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로힝야 탄압 중단을 촉구했다. 국내 거주 로힝야족 미얀마인으로부터 로힝야 인권침해 실태를 듣는 간담회를 개최하거나 유엔 미얀마 인권특별보고관 초청 강연을 개최해 한국 시민들의 관심과 연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로힝야 탄압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당은 총선에서 연달어 승리했는데, 2020년 11월 총선에서는 전체 의석의 62.4%를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NLD는 군부에 개헌을 요구했지만 미얀마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얀마헌법에는 국회 의석의 25%를 군부에게 할당해 주는 내용과 함께 사실상 군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NLD의 개헌요구에 반발한 군부는 2021년 2월 또다시 쿠테타를 자행했고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쿠데타 반대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총탄으로 학살했다. 이에 참여연대를 포함해 106개 단체들은 긴급히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모임’을 꾸리고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고 한국 정부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행동에 나섰다. 8888항쟁을 기리며 군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의 시민불복종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국제사회의 규탄 목소리에 내정간섭이라며 미얀마군부를 지지하던 중국과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도 항의 1인 시위를 릴레이로 이어갔다.
참여연대는 포스코와 한국가스공사에 미얀마 군부와 단절할 것을 촉구하는 활동에도 집중했다. 서명과 1인시위를 비롯해 미얀마 군부의 자금줄이 되고 있는 한국 기업들과 그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을 압박하는 서한을 발송하거나 국제라운드테이블, 규탄대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총탄으로 자국민들을 짖밟은 미얀마군부 인사를 한국 정부가 무기수출 홍보행사에 초청해 전차에 탑승시킨 일과 관련해서도 항의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
┃ 성과와 의미 ┃
참여연대는 창립했던 1994년부터 동티모르의 독립과 인권 보장을 촉구하며 인도네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다른 국가의 인권문제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후 필리핀 인권옹호자들에 대한 무차별적 납치, 암살 등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과 공동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으나, 미얀마 민주화 연대 활동만큼 한 나라에 대해 여러 해 동안 다양한 이슈를 제기하고 진지하게 토론했던 적은 없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고통 받고 있던 미얀마 민주화운동가들은 자신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한국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을 기대했다. 그렇게 보면 참여연대는 국내에서 오랜 세월 고군분투하던 미얀마 활동가들의 손을 뒤늦게 맞잡았다 할 수 있겠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활동은 한국 정부와 아세안 같은 지역기구의 미얀마 정책이나 외교 활동을 꼼꼼히 감시하는 것도 중요했다.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향과 입장을 알리고, 한국 정부와 국회의 관심을 추동하며 기업에 대한 항의행동 등을 지속해야 한다. 실질적인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한 국가의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개입에 관한 많은 토론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국제 사회가 미얀마 군사정권의 종식과 경제착취를 중단하기 위해 원조와 투자를 중단하거나 줄여가는 압박을 진행할 때, 미얀마 민주화운동 세력이 미얀마에 민주화가 올 때까지 투자를 중단하고 관광도 오지 말라고 주장할 때, 한국 시민사회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경제적 제재가 미얀마 민중들의 삶에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지, 일방주의적인 인권외교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외교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얀마 민주화운동 세력이 소수민족인 로힝야를 탄압하는 미얀마 정부와 같은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미얀마 군부에 의해 자행된 로힝야 학살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미얀마 시민들의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미얀마 민주화 연대활동은 참여연대 활동의 장점인 정부와 기업 감시 활동방식을 모두 활용했던 다시 갖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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