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4년 07월 2014-07-01   2177

[역사] 식민지란? 따로 또 같이

식민지란? 따로 또 같이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참여사회 2014년 7월호

 

식민지란 뭘까?

 

‘일본의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 한마디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라 밖,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도 함께 놀랐다. 종교적 발언일 뿐이란 변명은 더욱 큰 비웃음을 샀다. 이 망언을 도덕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순리’였다는 뜻일 게다. 어떻게 이런 뒤틀린 역사 인식을 할 수 있을까? 식민지배 35년의 경험은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에 일본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새겼다. 이 반일정서 반대편 극단에 맹목적인 식민지배미화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양 극단 사이에서 일본 식민지배의 전모와 한국인의 삶의 변화를 냉철하고도 성찰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아직 역사학 분야에서조차 부족하다. 역사 교과서도 여전히 증오와 저항의 단어로 그 시대를 담아내고 있다. 오늘날 사회 분열의 상징이 된 ‘반일 대對 친일’ 프레임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새삼 묻는다. 식민지란 뭘까?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그 시절 일본과는 도대체 무엇이 같고 달랐을까? 이런 상식적 의문을 차분하고도 꼼꼼하게 풀어가면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비로소 탈脫역사적인 반일정서나 반反역사적인 식민지배미화론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평사水平社와 형평사衡平社

 

20세기 전반의 한국사는 일본의 식민지배 대對 한국인의 독립운동, 즉 수탈 대對 저항으로 구성된다. 둘은 마치 절대 섞이지 않고 따로 노는 물과 기름 같다.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현실이 그렇게 단순할까? 물론 아니다. 저항운동조차 일본의 사회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수평사와 형평사의 예를 들어보자.  

 

일본에는 부락민으로 불리는 천민이 존재했다. 1871년의 제도적 해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민 대우를 받던 부락민들이 모여 1922년 전국수평사를 결성했다. 이후 각지마다 수평사가 설립되고 차별 규탄 투쟁이 일어났다. 1923년에는 청년 지도자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수평운동세력은 볼세비키파와 반反볼세비키파로 분열했다. 볼세비키파는 사회운동과 연대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정부가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며 볼세비키파 지도부를 체포하고 사회적으로 반反수평운동이 확산되는 위기에 처하자 수평운동세력은 다시 합쳤다. 1931년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계급투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수평사를 해소해야 한다는 해소론이 등장했다. 이후 수평사는 점차 융화=동화정책에 협력하는 관변단체로 변질되어갔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수평운동의 소식을 들은 백정 출신 유지와 지식인들이 1923년에 진주에서 형평사를 만들었다. 백정 출신들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한 제도적 해방에도 불구하고 인습적 차별에 고통 받고 있었다. 형평사는 창립 1년 만에 68개 지사와 분사를 갖춘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1924년에 사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급진파가 등장하면서 분열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반反형평운동이 번져가자 다시 뭉쳤다. 급진파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가운데 1931년에는 형평사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소부르주아집단이니 해소하고 각 지역의 형편에 따라 노동조합 혹은 농민조합을 조직하자는 것이다. 1933년에는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으로 급진파가 검거되었다. 이후 형평사는 이익과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로 변질되었다.    

 

제국의 잔재, 식민지의 변혁

 

일본 ‘제국 권력’ 하에서 수평사와 형평사가 걸었던 길은 흡사하다. 수평사와 형평사 간의 연대활동이 미미했음에도 둘이 거의 같은 길을 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은 다르다. 일본 수평사는 1941년에 정부의 해산 요구에 따라 사라졌다. 조선 형평사는 1935년 친일융화를 표방하는 대동회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일본에는 지금도 부락민이 존재하고 부락 해방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는 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평운동은 실패했고, 형평운동은 성공한 것일까? 식민지민은 제국 권력으로부터 배제당하고 차별받는 소수자다. 백정 출신은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고 차별받는 소수자다. 결국 백정 출신은 민족적 차별과 사회적 차별이라는 이중고에 놓여 있었다. 민족주의는 그들을 함께 독립을 쟁취해야 할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민주주의는 그들을 만민평등의 인민으로 품었다. 그렇게 백정 ‘해방’은 관철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식민지를 포함한 제국 전체의 위계질서 위에 군림하는 제국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부락민 차별은 극복될 수 없었다. 부락민은 동화의 대상일 뿐이지, 해방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패전으로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부락 해방 문제를 외면하면서 지금도 일본에는 차별받는 천민이 살고 있는 것이다!      

 

식민모국이란 말이 있다. 실제 식민지는 제국의 영향 아래 움직인다. 그렇다고 제국과 식민지가 완벽히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건 아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섬세한 역사에 ‘반일 대對 친일’ 잣대만을 들이대려 한다면, 진실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진실이 사라진 곳에 거침없는 망언이 득세한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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