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1년 01-02월 2021-01-01   828

[보자]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고?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고?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82호)

 

빛나는 Radiance

드라마 | 102분 | 2017 | 일본, 프랑스 

감독      가와세 나오미 

출연      나가세 마사토시, 미사키 아야메

 

 

“상상도 안 돼요” 같은 말 

세 명의 남자가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모두 사진작가다. 그중 한 명, 나카모리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마도 업계에서 손꼽히는, 명망 높은 작가였던 것 같다. 말투의 가시를 숨기지 않으며, 나카모리를 대단히 견제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동석자를 보니 알겠다. 나카모리를 의식하던 동석자는 가방에서 잡지 <래디언스>를 꺼내며 표지 사진을 맡았다고 자랑한다. 나카모리가 축하를 건네며 표지에 대한 묘사를 부탁한다.

 

“전체적인 느낌은 초록이에요. 숲속에서 한 여자가 배회하고 있고, 그 인물과 풍경, 빛과 그림자, 바람이 균형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배치된 순간이랄까? 그 순간을 포착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나카모리가 상상에 빠져 미소 짓는데, 대화의 주제가 시각 장애로 넘어간다.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젊은 남자가, 딱히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지극히 무신경한 태도로 묻는다. 

 

“‘그걸’ 어떻게 견뎌요?” 

“어떻게 견디긴….” 

“전 상상도 안 돼요. 대단하세요, 정말.” 

 

나카모리는 미소를 유지했지만, 지치는 듯 점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영화 <빛나는>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며 화가 났다. “어떻게 견뎌요?”, “대단하세요” 같은 ‘칭찬’ 때문이다. 이게 정말 칭찬일까? 나카모리는 ‘대단해서’ 견디는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자신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상상도 안 돼요” 같은 말이 어떻게 들릴까? 상상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상상을 안 해본 것은 아닐까? 나카모리를 타자화하는 말과 태도는 그를 외롭게 했다. 나카모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친근하고 무던한 대화였을 것이다. 

 

멋대로 짐작하는 일방적 선의는 오지랖일 뿐 

나카모리는 영화 <빛나는>의 두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영화음성해설 작가 미사코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음성해설 원고를 함께 완성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음성해설 모니터링 모임에서 나카모리는 가장 날 선 비판을 하는 사람이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음성해설을 통해 영화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 작업은 섬세하면서도 절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설명이 과잉되면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음성해설자가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느낌을 전하면 감상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나카모리에게는 “있을 리 없는 도키에”, “살아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같은 문장이 그랬다. 미사코는 잇따르는 나카모리의 지적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발끈한다. 

 

며칠 뒤, 미사코가 선배의 부탁을 받고 나카모리의 자택을 방문한다. 나카모리는 차를 내오려다가 그릇을 깨뜨리고, 미사코가 그릇을 치우다가 우연히 버려진 청첩장을 발견한다. 잘못 버린 것 같다며 청첩장을 다시 나카모리에게 건네는 미사코. 잘못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거듭 청첩장을 내민다. “이 호텔 괜찮아요. 장애인 시설도 잘 돼 있고.” “내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나카모리가 까칠하게 말하자 그제야 미사코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 앞으로 주먹질하는 시늉을 한다.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닌 나카모리는 미사코가 뭘 하고 있는지 대충 알지만, 귀엽게 봐준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귀엽게 볼 수가 없었다. 미사코가 얄미웠다! ‘장애인의 사정’ 때문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며 일방적인 선의를 거듭 베푸는 것은 그저 불쾌한 오지랖이다. 시각장애인 앞의 ‘벽’은 보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타자화하거나 시혜적으로 대하는 결례를 포함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이렇게 감정이입하며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나카모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그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느끼는 감정을 가까이서 응시하며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일상에서 충분히 시선을 주지 않고 흘려보낸 타인의 감정과, 사정 모르고 함부로 던진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도 누군가에게는 미사코이고, 후배 사진작가였을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화면을 감상한다고 하기보다는 광대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 같죠. (…)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음악을 듣고 여러 체험을 느끼며 영화를 보는 거예요. (…) 그 거대한 세계를 말로써 작게 만들어 버리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음성해설 모니터링 모임에서 또 다른 시각장애인이 미사코에게 한 말이다. 음성해설에 대한 지침이지만, 영화가 지닌 힘에 대한 예찬으로도 들린다. 다른 사람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며,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영화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할지도 모른다. 나도 살면서 많은 순간 다른 이들을 ‘빡치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영화를 본다. 이 영화도 그중 하나다. 이 영화를 본다면, 적어도 이전보다 나은 태도로 시각장애인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한국어 배리어프리 버전은 2020년, 장건재 감독이 연출하고 최유화 배우가 음성해설을 맡아 완성됐다. <빛나는>의 배리어프리 버전은 공동체상영을 통해 관람 가능하며, 관람 문의는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를 통하면 된다. 일반 버전은 현재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1,500원, 유튜브에서 1,000원에 볼 수 있다. 

 

❶  베리어프리란 장애물을 뜻하는 ‘배리어barrier’와 없다는 뜻의 ‘프리free’가 합쳐진 말로, 기존 영화에 화면 해설과 대사, 음악, 음향 등의 소리 정보가 포함된 자막을 추가하는 등 시청각 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영화를 말한다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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