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1년 12월 2021-11-30   1414

[여성] 여성의 초현실적 상상

여성의 초현실적 상상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는 식사

 

세 명의 뱀파이어가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전체적으로 오렌지빛이 감도는 이 작품은 식욕을 자극한다. 수박, 토마토 등으로 보이는 붉은 과일과 장미 같은 붉은 꽃에 빨대를 꽂아 과즙을 빨아 먹는다. 식탁 아래에는 개의 몸과 닭의 머리로 이루어진 흰색 동물 두 마리가 있다. 이들의 반려동물일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얼굴이 뾰족해질 정도로 살이 찌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피를 빨아먹지 않는다니. 아무도 죽이지 않는 뱀파이어라면 두려울 필요가 없어 보인다.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 1908~1963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Vampiros Vegetarianos>이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91호)

레메디오스 바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Vampiros Vegetarianos> 85.7×60.3cm, 캔버스에 유채, 1962 

이미지 출처 wikioo.org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는 식사의 가능성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과일을 먹는 뱀파이어들은 어쩐지 비쩍 말라서 기운이 없어 보인다. 레메디오스 바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고기를 안 먹으면 이렇게 비쩍 마른다고? 나는 식탁 밑의 동물에 눈길이 간다. 다양한 종이 함께 사는 집이다. 뱀파이어들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착취를 덜어내고 함께 어울려 산다.

 

레메디오스 바로는 채식주의자였을까. 그가 쓴 글에는 “우리들 거의 대부분이 금주가인 동시에 반은 채식주의자입니다.”라는 언급이 있다. 초현실주의에 참여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역시 사실관계를 알 수 없는 장난스러운 글을 즐겨 썼다. 실제로 바로가 채식주의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채식주의에 관심을 보였음은 분명하다.

 

바로는 마드리드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했지만 1930년대 프랑코의 집권으로 벌어진 스페인 내전을 피해 1937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스페인에서 만난 프랑스 시인 벤자인 페레를 비롯하여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초현실주의 그룹과 교류했다. 그러나 1940년 페레에 이어 바로까지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바로에게 이 경험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6개월가량 수감됐다가 출소했으나 이번에는 파리가 나치에 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남프랑스로 이주했던 바로는 나치를 피해 돌고 돌아 멕시코로 망명했다.

 

살림과 상상력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쥘 베른과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탐독하던 바로의 작품은 역시 환상으로 가득하다. 바로의 그림 속에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 생명체는 지구인지 외계인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희한한 행동을 한다. 공중에 떠 있는 오선지 위에서 작곡을 하고, 새장에 갇힌 달에게 음식을 주거나, 책상 위에 나무를 심는다. 바로가 보여준 이러한 상상은 연금술에 대한 그의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많은 남성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여 그저 작품 속의 ‘오브제’로 활용했다면, 바로의 그림 속 인물들은 무언가를 만들고 변형시키며 실험하는 창조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베로나를 짜는 사람La Tejedora De Verona>(1956)에서 한 여성은 집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그 뜨개질로 만들어진 또 다른 여성은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막 나가려 한다. 이처럼 바로는 주로 여성들이 하던 노동/예술에 창조적 숨을 불어 넣는다.

 

특히 바로는 부엌을 마술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많은 실험이 벌어지는 장소로 여겼다. 실제로 가정에서 부엌은 마술적인 공간이다. 무언가를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공간이 부엌이다.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커다란 것을 작게 만들고, 부패 직전의 것을 쓸모 있게 만드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이 벌어지는 곳이다.

 

언어유희와 게임을 즐기던 바로는 요리와 살림을 활용한 유머를 만들어냈다. 연금술이나 마술, 타로 등에 관심을 가진 바로의 상상력은 그의 회화는 물론 글에도 잘 나타난다. 꿈을 기록하고 말도 안 되는 조리법을 진지하게 적었다. 예를 들어 ‘영국 왕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한 조리법’에는 양고기 발 12개, 계란 20개, 벽돌 40장, 천연 비단 3.5미터, 커다란 밍크 털 솔 1개가 재료이다. 그 외에도 에로틱한 꿈을 꾸게 해주는 조리법, 악몽을 사라지게 하는 조리법 등 엉뚱하고 기발한 조리법을 남겼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91호)

레메디오스 바로의 생전 모습

이미지 제공 Herry Lawford

 

바로가 파리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활동하던 시기에 그는 앙드레 브르통이나 폴 엘뤼아르 같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가까웠고 함께 그룹 전시도 했다. 그러나 당시 초현실주의를 주도하는 남성 작가들은 젊은 여성의 작업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바로는 파리 시절에 상대적으로 많은 작업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제대로 예술적 세계를 열어준 장소는 멕시코다. 오늘날 알려진 그의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 멕시코에서 이루어졌다. 

 

바로의 예술은 특히 그의 말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레메디오스 바로가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완성한 해는 1962년이다. 그는 그 다음해인 1963년에 사망했다. 전쟁의 광기를 피해 잠시 머무를 줄 알았던 멕시코에서 그는 오히려 새로운 창조적 힘을 얻으며 작업했고 영원히 멕시코시티에 묻혔다.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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