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대자 D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온·오프라인이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성폭력은 피해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온라인 세상과의 단절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피해자들을 단속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다수의 피해자가 있는 사건의 경우 피해자 개인의 고통은 숫자로 인식될 뿐 누구 하나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특정’된 피해자는 합의·공탁 등 금전적 배상을 수용하도록 강요받거나, 일부 피해자의 의사만으로 가해자가 선처받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도 있다. 영상과 사진은 삭제를 해도 계속 떠돌고, 지속되는 피해로 인한 고통을 호소해도 왜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냐고 비난을 받는다.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을 위한 노력은 피해자에게 전가되며, 그렇게 방치된 피해자는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사회는, 시스템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실 디지털 성범죄는 수사기관이 제 역할만 한다면 수사 단계에서 물증을 확보할 수 있는 성범죄다. 문제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가해자 특정, 증거 확보 등 수사의 상당 부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관행에 있다. 그 결과 물증 확보만 하면 처벌이 담보되는 디지털 성범죄 수사도 엉망으로 흘러갔다. 그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와 조력자들의 전략은 몇 발 앞서나가 경찰 수사 관행의 절차적 위법성을 근거로 무죄까지 노리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기소와 공판을 담당하고 있는 검찰은 무엇을 했는가. 검경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과 힘겨루기하느라 바빴던 검찰 역시 2023년 이후 엉성한 기소와 불성실한 범죄 입증, 나아가 상소권 포기 등을 하며 가해자 선처에 힘을 보태고 있다. 범죄단체죄 적용, 교사범 및 공모공동정범 적용 등 조직화·집단화된 디지털성범죄의 구조를 파헤칠 수 있는 법리 적용은 고사하고, 사건 파악조차 못한 공판검사가 법정에 있는가 하면, 정상참작감경 등을 남발하는 법원의 판결에 상소로 대응조차 안하고 있다. 실제로 ‘n번방’의 경우 2020년 운영자 ‘갓갓(문형욱)’이 검거되기 전 공범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외부 감시가 없던 때다 보니 그들의 평균형량은 3.2년이었고, 전부 다 정상참작감경 적용되었으며, 검사는 단 한 건도 상소하지 않았다.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박사방’ 공범에겐 ‘징역 13년’이 선고되었다.
법원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낮다. 성착취물, 불법촬영물 등과 관련해 명백히 ‘유포’, ‘영리적 목적’ 등을 요건으로 한 별도의 범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포하지 않았다, 영리적 목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등을 이유로 감경하던 부적절한 관행을 이어온 게 바로 법원이다. 허위영상물과 관련해서도 해당 행위(유포, 영리적 목적 등)를 하면 가중처벌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형하고 있다.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기 때문인지 피해에 대한 이해도 피해자 숫자에만 반응하며, 합의·공탁 과정과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피고인들은 재판부에 각종 부당감형자료(꼼수감형자료)를 제출하고, 기습·착오 공탁을 하고, 아동청소년에겐 부모를 통한 합의 등을 강요하고 있다.
올해 국회에 발의된 법안의 상당수는 이미 2022년 해체당한 법무부 TF의 권고안 내용에 불과하다. 또한 국회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의 개정안 통과 이후 할 일을 다했다는 식으로 나오면서 TF 존속 당시에도 지적됐던 입법 공백은 그대로다. 가해자 개인의 처벌만 신경 쓸 뿐(심지어 개정안으로도 제대로 처벌하기 어렵다), ‘구조적 해법’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여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등장한 이번 정권은 디지털 성범죄를 양산해 왔음에도 책임은 지지 않고 있다. 영상 삭제 등 피해자 지원을 위한 각종 예산을 깎거나 없애고, 법무부 TF를 해산시켰으며, 국제 공조와 연대가 필수적임에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은 뒷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 속 반디지털성폭력운동도 동력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한국형 인셀1의 표본인 이준석 등이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고, 여성가족부의 존폐를 국정 운영의 키처럼 활용하는 반여성주의 정권의 득세로 사회 전반에 걸쳐 백래시가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길은 찾으면 되고 광장은 만들면 된다.
길과 광장
반디지털성폭력운동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기성세대의 디지털 성착취, 성폭력을 상징하는 ‘소라넷’의 행태를 추적·고발하고, 결국 폐쇄까지 이끌어낸 이들은 2015년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DSODigital Sexual Crime Out,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단체를 설립·운영하면서 피해자 지원, 모니터링을 통한 고발 등을 이어갔다. 그러나 잠재적 혹은 실제 피해자였던 젊은 여성들이 삭제 지원이나 모니터링 작업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2017년 이후 국가가 디지털성폭력피해자지원센터를 설립하며 뒤늦게 개입하기 시작했으나, 너무 많은 여성들이 피해자로, 활동가로 소진되다 사라졌다.
그러던 중 2018년 혜화역에 ‘붉은 길’이 만들어졌다. 온라인 연대에 이어 직접 단체를 만들고 운영하던 시민들이 이제 사법 시스템을 정조준해 길을 내고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불편한 용기’라는 이름의 연속 집회는 온라인 활동에 집중하던 젊은 세대를 오프라인 광장으로 모이게 만들고, 필요성을 각성하게 한 계기였다. 그리고 그때 그 거리에, 광장에 모였던 젊은 여성들이 2024년 다시 각자의 위치에서 반디지털성폭력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19년 한국에서 ‘웹하드 카르텔’로 명명된 디지털 성폭력 사업 구조가 고발되고 관련자(양진호)가 기소되었다. 미 법무부의 공소장이 공개(손정우, 웰컴투비디오)되며 다크웹 등을 기반으로 한 한국 남성들의 디지털 성폭력이 국제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n번방’으로 대변되는 텔레그램 기반 디지털 성범죄는 추적단 불꽃, 그와 협업한 한겨레의 연속 기사에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시민 중심의 반디저털성폭력운동의 구심점이 약화되거나 사라진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ReSET이 등장했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알리고 싸우기 위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각종 해시태그 운동과 청원 독려가 이어지자 관망하던 언론·방송도 힘을 보탰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조차 없었던 2020년 초반, ‘디지털 성범죄라는 용어가 적절하냐’로 한가롭게 논쟁하고 있던 양형위원회가 부랴부랴 양형 기준을 만들었고, 국회가 이른바 ‘N번방 방지법’을 통과(물론 누더기지만)시켰으며, 검경은 TF를 만들어 수사와 기소, 입증 등을 위한 적극적 움직임을 보여줬다.
2018년 혜화역 시위를 재현하고자 모였던 시민들은 코로나로 인해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자 내게 조언을 구했다. 2017년 이후 시민들의 재판 모니터링에 ‘방청연대’라는 이름을 붙여 참여를 독려하고 시민 대상 교육을 하고 있던 나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은 ‘eNd’라는 팀을 만들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진 ‘n번방’, ‘박사방’, ‘프로젝트n번방’ 등 일당들의 재판을 서울, 수원, 춘천, 안동, 대구 등을 오가며 모니터링했다. 춘천, 창원 등 수도권 외 지역에서 지역 기반 반성폭력운동을 하던 활동가들과도 협업하며 시민에 의한 사법감시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이렇게 외부 감시가 이어지자 검찰은 구형 후 변론 재개를 요청하며 구형량을 올리거나 추가 기소했고, 법원은 ‘음란물’이라는 표현 대신 ‘성착취물’이라는 표현을 쓰며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은 재판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툭하면 정상참작감경을 남발하던 과거와는 달리 두 자릿수 이상의 중형 선고도 이어졌다.
버티고 준비하자
그러나 ‘여성가족부 폐지’ 등 안티페미니즘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운 정권이 들어서고, 단 한 명의 대법관을 제외한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전원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사법 시스템은 보수화되어 갔다. 외부 감시가 활발하던 때 각종 TF 등을 만들어 수사부터 신경 쓰던 경찰과 검찰은 이후 관성적으로 수사, 기소, 입증을 이어갔고, 외부 시선 때문에 중형 선고를 이어갔던 판사들도 다시 감형을 남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2024년 여름 ‘다시’ 온라인을 중심으로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다. 수사기관이 외면한 피해자들이 직접 가해자를 특정하고 증거를 수집하며 외부에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온라인 연대에 익숙한 세대들이 관련 사건들을 수집·분석하고, 이를 국내외 언론에 알렸으며, 각종 해시태그 운동, 청원 등도 이어갔다. 재판 방청을 통해 연대해 왔던 시민들이 다시 단체(연대단F 등)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재판 모니터링을 이어갔고, 추적단 불꽃, ReSET 등의 활동가들도 여론을 이끌었다. 조직력을 갖춘 단체들도 힘을 더했다. 이런 온라인 연대는 오프라인 시위로도 이어졌다. 종로 보신각에서, 혜화역에서 다시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났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음에도 여전히 외부 활동이 어렵다던 그들은 광장에서, 길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시민 연대자들을 직접 접하고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만하면 됐잖아요. 조용해지겠죠?”
국회에서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 개정안이 통과·시행된 후 수사기관 등 일선에서 나오는 말이다. 언론·방송 역시 이내 관심을 끊고 다른 이슈를 찾아 떠난 상태다. 작은 성과를 보상 형태로 제공하고 구조적 문제를 감추는 전략이 이번에도 통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철저히 부술 준비를 시민사회에서 하고 있다. 2020년 이후의 상황은 다수자, 가해자, 강자만이 경험한 게 아니다. 시민들도 지난한 싸움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을 잘 안다. 소수자, 피해자, 약자도 숨을 고르며 전략을 수립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
백래시의 광풍 속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버티고 준비하겠다고.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활용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며 또 기다리겠다고. 변화는 저절로, 알아서, 당연히 오지 않는다고. 변화를 위해 길을 찾고, 없으면 만들며, 그렇게 걸어 광장에서 만날 것이라고.
그러나 언제나처럼 길은 찾으면 되고 광장은 만들면 된다.
- Incel.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을 뜻하는 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 온라인 하위문화와 밀접히 연결하여 반사회성, 여성혐오적 성향을 보이며, 범죄까지 저지르는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 혹은 사용자를 지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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