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25년 11-12월 2025-11-05   74308

[이슈] 극우의 토양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극우 집회 사진. 각종 붉은 색의 깃발들이 보인다.
Choi Chulho, Unsplash

한국 극우는 어디서 실체화되는가? 윤석열 내란 사태가 한국 사회에 미친 근본적인 충격과 변화는 극우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거나 지지할 수 없는 계엄령 선포였지만 오히려 극우들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전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사회의 특정 블록에서 극우화가 심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는 일부라고 주장할 수 없을 만큼의 개신교와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남성 청년들, 이 두 그룹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들이 전부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거나 극우의 이념 전부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계엄령 자체를 지지하는 세력은 지난 대선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한 규모에 훨씬 못 미친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국민의힘을 지지한다기보다는 민주당이 싫어서 지지한다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김민하 정치평론가의 책 제목처럼 한국 정치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의 세력화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특히 개신교와 젊은 남성층에서 극우 이념은 ‘헤게모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 대형교회와 정통교단에서도 이런 극우 이념을 통제하거나 규제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방식이 극단적이고 문제적이라고 인식하더라도 내용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것은 각 교단에서 진행된 총회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며 ‘Save Korea’를 이끌던 세계로 교회 손현보 목사에 대한 장로교 고신 측의 태도나 전광훈 이단 지정에 대한 장로교 통합과 합동, 합신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청년층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남성 전체를 극우로 모는 것은 정치적 역효과를 부르는 전략적이지 못한 담론이라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며 새겨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극우가 헤게모니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중고등학교 교사들은 교실에서 남자 청소년들이 혐오 발언과 극우적 언사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반면 여기에 맞서는 젊은 남성들의 ‘대항 담론’은 가시적으로 관찰되지 않고 있다. 동의는 안 해도 침묵을 통해 적어도 담론 영역에서는 극우가 ‘헤게모니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한국은 계엄이라는 윤석열의 정치적 자해로 더 세력화되기 전에 가시화되어 극우 확산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진행된 양극화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게 하였고, 중산층들은 조세의 부담을 떠안았다는 불만을 폭증시켰다. 이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에만 천착하는 ‘리버럴’과 엘리트들로부터 피해자인 자신들이 오히려 문화적으로 낙후된 존재인 ‘비’문명인으로 경멸당했다는 분노까지 합쳐졌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모든 조건이 민주주의보다는 극우가 자라기 매우 좋은 토양이 됐다.

여기를 파고든 것이 극우다. 감정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극우가 대중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피해 서사’다. 피해 서사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정당성과 사회적 존재감을 부여한다. 피해자는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으며, 그 말이 사회에 들리는 만큼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다. 말하는 권리right to speak는 대나무 숲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들리는 권리right to be heard를 의미한다. 들리지 않으면 말한 것이 아닌데 피해 서사는 바로 이 들릴 권리를 획득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회는 피해자의 말을 들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극우는 피해 서사로 대중에게 들리는 자의 자리를 주며 소외당하는 이들을 ‘주체화’했다. 주체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들리는 자’다. 들어주는 쪽이 있을 때, 그리고 내 목소리가 들리도록 대변하는 사람이 있을 때도 ‘주체’가 된다. 내가 말을 하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대변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충분히 주체가 되고 사회적 존재감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저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이익만 대변한다면 대중은 자기의 이익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주체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감을 부여하는 대변인이란 ʻ나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공식적인 정치 영역에서 무시되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내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회적 존재감은 ‘이익’이 아니라 ‘말’에 있다.

이를 가장 잘 알고 활용하는 정치인들이 주로 극우들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억만장자다. 인생 경로와 사회적 위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몰락한 제조업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트럼프에 열광한다. 트럼프의 정책이 자신들의 이익에 ‘다소’(혹은 단기적으로) 반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지지한다. 트럼트가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무엇보다 ‘말’이라는 자신의 정치·사회적 존재감을 돌려줬기 때문이다.

리버럴과 엘리트들은 정반대 위치에 있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과 전문성이라는 명분으로 대중의 언어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말은 공식적인 정치·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는 말이라고 억압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로 ‘번역’되어야만 한다. 번역되지 않는 한 그들의 말은 도덕적 정당성이 없으며 사회적으로 ‘들릴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이 번역가들, 즉 말을 독점한 리버럴과 전문가들에게 사회적 존재감을 의존해야만 한다. 리버럴과 전문가는 ‘말’이라는 세계의 독재자들이다.

리버럴과 전문가는 대중의 서사 역시 부정한다. 각자 한명 한명의 서사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그 뒤에 큰 서사가 받쳐줘야 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큰 이야기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소설 《파친코》의 등장인물 선자와 이삭의 이야기는 식민지배와 해방이라는 민족사 없이는 서사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각자의 ‘소박한’ 작은 이야기는 항상 그 뒤에 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 말해진다.

그런데 피해를 호소하는 대중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큰 이야기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문제적 서사이기도 하다. 여성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이성애 중심주의, 인종차별주의와 이주민 혐오 등이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저 자기의 ‘소박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과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적 비판과 도덕적 비판이었다. 이에 짓눌려 있던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와 ‘피해 서사’는 완벽한 탈출구였다.

극우는 자신의 말이 억압되고 있다고 느낀다. 리버럴과 전문가에 의한 ‘말’의 독재 시대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극우 연대’를 만든다. 이들을 말의 독재에 맞서는 존재로 주체화한다. 소수자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서사의 주체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피해자로 완벽히 역전시켜 말 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며 사회적 존재감을 돌려준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자신의 말이 억압되고 있다고 느끼는 대표적인 두 그룹이 바로 남성 청년들과 개신교다. 먼저 남자 청소년·청년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자신들의 발언이 항상 문제시되며 제지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극우는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것이 인간과 사회에 가장 중요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며 실천 행위라고 말한다. 이것이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공산화하려는 세력과 맞서 ‘사상의 시장’을 지키는 위대한 투쟁이라고 추켜세운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차별금지법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자신들의 말이 억압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퍼트렸다.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면 처벌받는 말의 독재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우는 여기에도 똑같이 접근한다. 혐오이건 차별이건 상관없이 당신의 말을 검열하거나 억압할 수 없고 당신들은 완벽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이를 비난하는 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극우가 약속하는 것은 단 하나 모든 것에서의 ‘시장의 자유’다. 국가와 정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도 자유다. 그것을 규제하는 것은 시장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른 어떤 기관도 시장의 자유를 통제할 수 없다. 시장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것을 통제하는 것이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다. 그 결과 무제한적 자유를 얻는 것은 혐오와 차별 발언뿐이며, 그에 맞서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공산주의적’ 행동으로 철저히 억압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시장에서 공산주의자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

표현과 사상에서 ‘시장의 자유’가 바로 극우가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대를 이루는 지점이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사상(표현)의 자유 시장’라는 점이다.

그런 극우세력이 분노하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가 평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아닌 국가·정치의 보호에 기대려는 사회적 약자이며, 두 번째가 사회적 약자라고 주장하며 국가와 정치의 보호 속에 들어와 정체성을 흩트리는 존재인 이주민·외국인이며 세 번째가 이것을 정치적으로 촉진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사상의 자유 시장’을 망가뜨리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다.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 지점이 합체하여 나타난 것이 ‘혐중’이다. 남성 청년들에게 중국은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속박하는 실제적인 ‘적’이다. 그런데 ‘혐중’을 말하는 순간 혐오 표현이란 비난을 받는다. 표현과 사상의 자유 시장이 위협받는 것이다. 위협하는 세력은 그저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장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친중’, ‘공산주의자’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회의 입장과 일치한다. 특히 한국 개신교회는 오랜 반공주의 역사가 있다. 개신교 일각에서는 동성애가 한국 사회를 공산화하기 위한 도구라는 말까지 한다. 동성애 자체가 공산주의적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아가 차별과 혐오를 법적으로 제재하려는 것이 동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차별과 혐오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다. 이처럼 ‘혐중’은 한국 극우가 수렴되며 실체화되는 지점이다. 여기에 한국 극우의 정체성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혐오가 극우의 최종 종착지가 아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내부를 분할하는 것이다. 혐중의 최종 목표는 중국을 혐오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혐중을 중심으로 시민을 분할하는 것이다. 중국을 혐오하지 않는 시민, 중국을 혐오하는 것을 거부하는 시민들을 ‘친중’으로 몰아 내부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혐중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 짱X지?”, “너 조X족이지?” 등의 댓글이 바로 달린다. 혐중하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을 정치공동체에서 배제하려는 것이다.  

이런 극우의 정치는 갈라치기를 넘어 사회를 파벌화한다. 사회를 파벌화하는 정치는 정책의 혜택과 효과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정치공동체에서 정책은 당파적으로 수립될 수 있지만, 그 정책의 효과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반면 사회를 파벌화하는 극우 정치는 정책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며 정당성을 획득하고 존재하는 정치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극우가 정치공동체를 파괴하는 반정치의 정치이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한국 극우만의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극우의 헤게모니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중심에는 이주민/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배척, 그리고 리버럴에 대한 분노가 있다. 세금 부담에 대한 불만과 같은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안전의 문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리버럴’의 말의 ‘독점’에 대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있지만, 극우는 그 세계화의 현상이자 결과인 이주에 대한 혐오와 그에 대해 무능하면서 문화적으로 잘난 척만 한 리버럴에 대한 분노를 먹고 내부를 시민과 비시민으로 나누며 사회를 파벌화하며 정치공동체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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