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폭주하는 기업과 소비자의 대응
: 반복되는 집단적 소비자 피해, 왜 소비자는 늘 혼자 싸워야 하는가
오랜 시간 현장에서 소비자운동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기업보다 약해서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었을 때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반복해서 집단적 소비자 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소비자운동을 시작했던 1990년대에는 불량식품, 허위표시, 방문판매 피해가 주요 소비자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소비자들이 마주하는 위험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해졌다. AI의 일상화, 국경 간 거래, 디지털과 개인정보 활용, 거대 플랫폼 시장 등 소비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고 한 번의 사고가 수천 명이 아니라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피해를 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소비자 보호 제도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막대한 법무조직을 갖추었지만 소비자는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고, 기업은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소비자는 그 자료를 요구할 권한이 충분하지 않다. 한국소비자연맹이 지난 50여 년 동안 현장에서 만난 집단적 소비자 피해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보자. 안전하다고 믿었던 생활용품이 국민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기업의 책임을 인정받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피해자들은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기업의 책임을 입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 소비자단체들은 단순히 기업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소비자연맹을 비롯한 소비자단체들은 옥시 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며 소비자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에는 시장에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당시 불매운동은 단순한 구매 거부가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기업의 무책임한 태도를 바꾸기 위한 시민사회의 행동이었다. 소비자의 선택이 시장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의미 있는 소비자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불매운동이 기업에 사회적 압박을 줄 수는 있어도 피해자의 건강을 되돌려 놓거나 소비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게 할 수도 없었고, 기업이 끝까지 감춘 자료를 공개하도록 강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피해 회복은 다시 법정으로 돌아갔고, 소비자는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때 소비자 운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불매는 소비자의 힘이고 소비자의 분노는 기업을 흔들 수 있지만, 소비자의 권리는 법과 제도가 있을 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라돈침대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침대는 가장 안전해야 할 생활공간이지만 소비자들은 발암물질이 검출된 침대 위에서 생활했고 건강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7년이 넘는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티몬·위메프 정산 사태에서는 수많은 소비자가 환불받지 못한 채 플랫폼과 판매자 사이에서 방치되었다. 머지포인트 사태에서는 56만 명이 넘는 소비자가 2,5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입었지만 피해회복은 매우 더뎠다. SK텔레콤 유심 정보 유출, KT 해킹, 쿠팡 개인정보 유출 등 한 번의 사고가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의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렸지만 기업의 대응은 비슷했다.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만 소비자가 체감하는 배상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소비자피해가 반복되는 이유는 기업의 도덕성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지금의 법과 제도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기업에게 더 유리한 구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연맹은 2015년 이동통신 3사를 상대로 ʻ개통하면 청약철회를 할 수 없다’는 불공정 약관에 대해 소비자단체소송을 제기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ʻ약관이 소비자의 청약철회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판단을 받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다. 다른 소비자단체소송의 과정에서도 기업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소비자단체는 공익을 위한 소송을 하면서도 패소하면 수천만 원의 소송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한국소비자연맹은 소비자공익소송센터를 운영하며 여러 건의 소비자단체소송을 제기했지만, 현행 제도로는 소비자단체가 소비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 자체가 매우 큰 부담이었다. 소비자를 위한 소송을 제기하는 제도조차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소비자운동을 하면서 가장 허탈했던 순간은 같은 기업의 같은 위법행위에도 한국 소비자와 해외 소비자가 전혀 다른 보호를 받는 현실을 확인했을 때였다. 폭스바겐 디젤게이트가 대표적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작동하면서 소비자들은 차량 환매와 실질적인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차량을 구입한 한국 소비자들이 받은 권리구제는 훨씬 제한적이었다. BMW 화재 사건 역시 한국 소비자는 기업보다 훨씬 불리한 위치에서 결함을 입증해야 했다. 이 두 사건은 하나의 사실을 보여준다. 글로벌 기업은 국가에 따라 윤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묻는 제도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같은 기업의 같은 위법행위에도 한국 소비자가 해외 소비자보다 덜 보호받는 현실은 결코 정상적인 시장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의 권리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는 우리의 법과 제도에 있다.
반복되는 소비자 피해의 본질은 개별 사건이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으로 발생한 피해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기업은 집단적으로 이익을 얻는데 소비자는 개별적으로 싸워야 한다. 기업은 조직적으로 대응하는데 소비자는 혼자 입증해야 한다. 기업은 시간을 벌수록 유리하지만 소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포기하게 된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제2의 가습기살균제, 제2의 티몬·위메프, 제2의 쿠팡 개인정보 유출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불매운동은 중요한 시민의 의사표현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업의 책임을 끝까지 묻기 어렵다.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를 표현하는 권리가 아니라 기업에게 반드시 책임을 지게 만드는 권리다.

글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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