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우전자에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자연스럽게 대우그룹 기업문화에 익숙해졌고, 소위 ‘대우맨’이 되었습니다. 당신을 ‘왕회장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해왔고, 계열사를 가족사라 부르며 우리 집안일처럼 잘 되기를 원했습니다.
동창들 술자리에서 대우자동차 우수성에 대해 억지 섞인 열변을 토하며 탱크주의로 무장한 대우전자 직원들을 상상해 보실 수 있다면, 당신은 대우맨을 조금 아는 것입니다. 그 대우맨 중에는 대우자동차를 1년이 멀다하고 새차로 바꾸며 월급의 반절은 아예 두세 대의 자동차할부금으로 고스란히 떼이고, 월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꿈과 비전을 먹고 산다면서 회사의 미래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온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회사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했고, 당장의 대가는 잊고 헌신적으로 일해왔습니다. 가끔은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회사에서 12시간 이상을 보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대우맨. ‘우리 왕회장님은 새벽 한 시에도 회의를 소집하신대’라며 꿈을 키운 대우맨. ‘언젠가는 청춘을 바친 이 회사에서 중역이 되어 왕회장님같은 멋진 경영인이 한번 되겠다’는 야심에 찬 충성파가 되어, 삼성맨과도 경쟁하고 동료 대우맨들과도 경쟁해왔습니다.
왕회장님의 대우맨
왕회장님, 그 대우맨의 삶을 이해하십니까? 대우가족을 정말 가족처럼 생각하신다면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대우맨의 삶을 안다면 대우전자 빅딜이 던진 충격과 배신감이 주는 고통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대우맨의 삶을 아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대우맨의 꿈을 충분히 이용한 사람입니다. 대우그룹의 모토가 창조, 도전, 희생입니다. 희생이라는 특이한 슬로건처럼, 계약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희생들이 바로 대우맨의 꿈과 충성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삶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했던 가족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장삿꾼의 본성을 드러낸 당신을 돌이켜보기 바랍니다. 법적 경제적인 책임을 지기 이전에 먼저,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대우맨에게 빅딜은 고용문제 이전에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며, 인간성과 자존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빅딜은 나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버린 왕회장님의 정신적 윤간입니다. 제가 말을 지나치게 하는 것입니까? 혹시 지나쳤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이렇게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 만든 대우정신의 결과입니다. 삼성으로 내쫓으면 순순히 가는 대우전자 직원이라면 그는 왕회장님의 충성스런 대우맨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에 남은 상처는 그 어떤 보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우맨이 빅딜반대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로서 자기 자신을 재정립하는 데에는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부끄럽고 비참했습니다. 자동차 강매 등 부당한 일들에 대해 침묵하며 충성만 했던 이전의 모습이 떠오르면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대우맨의 의식이 대기업의 우월감과 함께 자발적 노동통제를 위해 조작된 허위의식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이 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에게 왕회장님이 아니라 탐욕스런 재벌총수일 뿐입니다. 저는 노동의 권리와 정당한 대가 그리고 생존의 터전 대우전자를 지키는 노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대우전자를 다시 보았을 때, 일터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재벌 총수의 손에서 놀아나는 회사가 아닌 국민기업으로 되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당신이 벌려놓은 거대한 왕국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겐 대우전자를 팔아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대우전자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은 당신은 5.4%밖에 되지 않는 그룹지분으로 대우전자의 경영권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 신통한 능력이 부러웠지만, 이제는 그것이 무서운 범죄도구에 다름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40여 개 회사를 그런 식으로 거느린 당신은 독단과 전횡으로 언제든지 대우그룹 노동자의 삶을 지금의 대우전자 직원들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기업을 당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고, 국민경제에 앞서 당신의 제국에 충성하게 했고, 주주의 이익과 효율성에 앞서 당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합니다.
장삿속 채우는 빅딜
재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빅딜조차 당신은 당신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했습니다. 재벌개혁이 재벌적 경영권에 의지해서 재벌총수의 손아귀에서 결정나고, 그 모든 피해가 노동자에게만 돌아온 것은 재벌개혁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모든 대기업이 구조조정안을 만들고 있을 때 당신은 오히려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30개 계열사를 구조조정하겠다고 나선 당신은 재벌구조를 스스로 바꾸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구조조정하는 척하며 뒷돈을 노린 것입니까?
저는 당신이 국가경제를 볼모로 대마불사라는 원칙 아래 거대한 사기극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라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자동차와 무역에서 빚이 쌓여 대우그룹 전체가 거대한 부실덩어리로 전락했다는 루머들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대우제국이 차입과 매출 불리기에만 의존해온 결과,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멀쩡한 대우전자를 팔아서 당신 그룹을 살리겠다는 것은 너무 비겁한 짓입니다. 당신이 만든 부실을 대우전자 노동자가 뒤집어쓰고, 국민들의 세금을 수혈받아 되살린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대우전자가 없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수십 개의 회사들 중 하나에 불과한 대우전자일지 모르나, 2만 명의 대우전자 직원과 10만 명의 협력업체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존의 터전입니다.
자금 사정이 일시적으로 악화되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당신이 재벌구조에 집착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당당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룹경영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는 것이 가장 명예로운 길입니다.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회사나 그룹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업구조를 정립하고 새로운 세대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대우전자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나려 합니다. 제발 재벌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대우전자 빅딜을 포기하십시오.
빅딜반대운동에 지친 몸으로, 빅딜로 멍든 회사를 살리고자 더욱 열심히 일하면서, 위기에 처한 회사지만 우리들의 일터를 살리고자 모두들 다시 뛰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을 이제는 떠나 주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구조조정이며 재벌개혁이 될 것입니다.
1999. 3. 18.
대우전자비상대책위원회와
함께 투쟁한 지 101일째 되는 날.
노동자로 다시 태어난 대우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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