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1095

DJ정부 재벌개혁 중간평가

5대재벌 몸집 더 불렸다

IMF 경제위기가 새삼스레 일깨워준 ‘상식’은 재벌도, 은행도 부실하면 망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지난 1년여의 기간동안 많은 재벌들이 워크아웃을 당했고, 부실은행들이 인수·합병되었다. ‘퇴출’이라는 말이 비단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재벌과 은행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시장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5대 재벌’이다. 5대 재벌에게는 워크아웃 대신 자율적 사업교환, 즉 빅딜이 구조조정방식으로 제시되었고 아직도 이는 진행중이다. 5대 재벌이 한국경제에서 갖는 위상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정책방향이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정부의 재벌정책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며, 실행은 똑바로 진행되고 있는가? 방향은 올바른데 실행이 되지 않고 있다면 책임의 상당부분이 5대재벌에 전가되겠지만, 만약 방향자체를 잘못 잡은 것이라면 정부 역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IMF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보다 더욱 강력한 제2의 위기를 맞이할 것인가는 경제위기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재벌개혁의 성패에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김대중정부의 재벌정책은 몇점이나 될 것인가?우선 5대 재벌들의 구조조정 진행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재벌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99년 1/4분기까지 재벌계열사의 숫자는 57개나 줄어들었고 부채비율도 98년말 현재까지 470. 2%에서 386.0%로 낮아졌다. 상호지급보증 역시 98년말까지 5대 재벌의 채무보증잔액은 약 6조 4,000억 원으로, 15조 1,000억 원의 채무보증이 해소되었고 이종업종간 채무보증액은 13조 1,000억원 전액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런 외형상의 변화 이면에는 여전히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부채비율은 축소된 반면, 부채총액은 오히려 98년말 현재 225조 1,000억 원 정도로 97년말보다 무려 4조 6,000억 원이나 늘었으며 부채비율의 축소방식도 대부분 국내 증자를 통한 자기자본 증대를 통해 진행되었다. 상호지급보증의 해소 역시, 원차입금 상환이나 계열사의 정리를 통한 것은 전체의 7% 수준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가산금리의 분담(46.2%), 우량피보증사(27.4%) 방식으로 이뤄졌다. 과연 채권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객관적 경영 및 재무구조 평가와 검증을 진행했는가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 심화되는 5대재벌 경제력집중

이러한 외형상의 변화 이외에 실질적인 재벌개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우선 한국의 재벌, 특히 5대 재벌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기업지배구조의 측면을 살펴보자. 재벌총수의 절대적 의사결정권,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철저한 무책임의 구조가 개혁되지 않고서는 재벌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 지난 한 해를 거치면서 물론 몇가지 중요한 제도적 성과가 있었다. 소액주주권의 강화, 총수의 이사 취임 및 이사의 충실의무 추가, 사외이사제도의 도입, 감사위원회의 도입예정, 결합재무재표의 도입, 회계기준의 국제화와 회계관계인에 대한 벌칙 강화 등은 과거에 비해 중요한 진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장하고 있는 단독주주권이 여전히 보장되고 있지 못하고, 소액주주의 권한강화를 위해 도입되게 되었던 집중투표제도가 정관 개정을 통해 유명무실해졌으며, 사외이사진은 여전히 최고경영진의 들러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김대중정부의 재벌정책이 몇가지 형식적 진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질적인 변화까지 이끌어내지 못하는 정책은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벌의 세습독재체제가 책임전문경영체제로 바뀌고 나아가 재벌체제가 발전적 해체에 이르게까지 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도높은 정부의 재벌개혁의지가 필요하다. 여전히 재벌총수들을 밀실의 협상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재벌개혁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김대중정부 재벌정책의 오류는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막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방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을 폐지하고 순수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함으로써 공정거래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정부는 금융기관의 변화, 부채비율 200%, 부당내부거래의 규제, 상호지급보증규제 등의 장치만으로도 충분히 재벌의 사업다각화 시도를 막을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은 이미 그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즉, 신규상호지급보증의 금지가 계열사간 대출로 대체되고 있고, 부당내부거래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경고에 그치거나 과징금 징수 역시 해당 기업의 소송제기로 실효를 못거두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재벌들의 계열사 숫자의 감소는 매각방식보다는 계열사간 합병으로, 그리고 계열사 숫자 증가의 경우 신규분야로의 진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정책적 판단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총액출자제한을 최소한 한시적, 제한적으로라도 부활시켜야 하고, 새로운 지배력 확장수단으로 사용될 여지가 큰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만 할 것이다.

정부가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제대로 제어해내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공기업 민영화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아직 공기업의 민영화가 구체적 성과물을 내놓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문제를 진행하면서, 국민적 합의도출과정을 배제하고, 기획예산위원회 주도로 민영화, 고용조정 위주의 일방적 구조조정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중공업 민영화 논의의 예와 같이, 건실한 공기업을 현대나 삼성과 같은 재벌들이 손쉽게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정부이다. 재벌의 부실을 국민과 노동자의 부담으로 탕감시켜주면서 건실한 공기업까지 인수토록 하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정책방향이라 할 것이다. 이는 자칫 ‘특혜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태도이다. 실제로 정권 초반에는 현대의 독주(기아자동차 인수, 금강산 개발권 독점 등등)로 의혹을 샀고, 지금은 LG그룹의 데이콤 지분제한조치를 해제함으로써 5대재벌들에 대한 특혜를 의심받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그것이 ‘빅딜에 대한 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기 충분한 실정이다.

빅딜대가로 공기업 불하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재벌, 특히 5대 재벌로의 금융자금 편중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금리의 신용경색 상황에서 5대 재벌이 회사채 발행과 유상증자를 독점하고 있고, 오히려 개별기업별 신용평가에 따른 금융자금 배분 관행은 후퇴하고 있다. 이는 제2금융권의 재벌 사금고화 현상과 더불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데, 특히 부실재벌의 경영위기시 계열금융기관에 대한 불법·편법대출의 유혹이 현실화되고 있다(예 : 신동아그룹의 대한생명, 성원그룹의 대한종금).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현대그룹의 바이코리아 펀드의 예에서처럼, 주식시장의 활황을 기화로 증권투자기관을 계열사 유상증자 수단으로 악용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어 우려를 더하고 있다. 또한 재벌들은 제1금융, 즉 은행지분에 대한 동일인 소유상한 규제를 철폐하기 위한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정부가 이런 상황에 대해 금융기관 소유규제를 강화하고, 금융기관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며,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장치를 개선하는 법적·제도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장악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이익은 고스란히 재벌이 얻게 되지만 위험에 닥칠 경우 손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지극히 높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대중정부의 재벌정책은 부분적인 성과들을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위태롭고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구조조정계획 실행과정에서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고 이것이 정부정책의 결정적 오류로 인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재벌의 정치적·사회적 지배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크다.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분야의 저항력이 약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 특히 5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의 위험성은 더욱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재벌 구조조정의 결과가 재벌의 경제력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김대중정부의 재벌정책이 심각한 모순을 내재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홍일표 참여연대 정책실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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