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러시아가 좋다. 가난해서 좋고, 독한 보드카가 있어서 좋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격렬하게 사랑할 줄 알아 좋고, 목소리 크고 몸집 좋은 여자들이 딸린 자식에 술주정뱅이 남편까지 부양하는 씩씩함이 좋다. 그리고 또하나 삶의 신산함을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야기할 줄 아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와 같은 러시아 영화때문에 더욱 그렇다.
“달에는 왜 보드카가 없을까?”
스탈린시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까운 탄광촌 스촨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었나보다. 작년 개봉되었던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에 무시로 흐르던 유행가(?). 시베리아 회색 하늘 아래 남루하게 펼쳐져 있는 이 탄광마을에는 무기수와 일본군 패잔병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용도폐기된 막사에서 살아가는 탄광인민들이 검은 탄가루 속에서 하루 하루를 맞고 있다.
영화에서 수인과 일본군 패잔병, ‘보드카 없이는’ 살 수 없는 탄광인민들을 구별해 내기 힘들다. “절 용서하세요 어머니. 또 유죄판결을 받았어요. 이번에는 형량이 길어요”라고 무기수의 청승맞은 노랫소리가 퍼지면 막장에서 광부들이 흩어져 나오는 식이다. 인민이나 죄수 할 것 없이 모두 유배당한 이곳에는 이들이 부르는 유행가처럼 슬프고도 격정적인 ‘삶’이 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여기서 유년을 사는 소년 발레르카와 그의 여자친구 갈리아의 성장영화이다.
발레르카는 선생님의 만년필을 훔치고, 화장실에 이스트를 넣어 학교를 똥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동. 그에게는 아들에게도 거침없이 자신을 싸구려 창녀라고 말하는 씩씩한(!) 엄마가 있고 그 엄마만큼이나 생활에 이골이 난 여자친구 갈리아가 있다. 발레르카는 화장실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그 보복으로 열차의 선로를 바꾸려다 전복사고를 내 친척집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서 갱단의 똘마니가 된 발레르카는 그를 찾으러 온 갈리아와 도망치다 갈리아를 영영 잃고 만다. 글로 옮기다보니 신파조가 되었지만 영화는 이 아이들에게 한치의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다. 화면을 만지면 마치 검은 탄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흑백의 영상은 지루할 겨를없이 참혹하고 혹독한 현실의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 명치 끝을 아프게 한다. 이때 흑백의 영상은 천연색에 대해 ‘현실에 대한 덧칠’이라고 조롱하듯이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감독 비탈리 카네프스키는 이 첫 장편으로 칸느에서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쥐는 행운을 잡았다. 그러나 나이 쉰넷에 늦깎이라는 말도 쑥스러운 그의 데뷔에는 영화만큼이나 더 우울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필름 살 돈이 없었던 그는 친구들에게 조금씩 후원을 받아 한 장면씩 찍기 시작했고, 찍은 필름을 보여주면서 다시 독지가를 찾기 시작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를 완성하게 도와준 은인은 알란 파커 감독. 완성되지 않은 그의 필름을 보고 ‘경악한’ 알란 파커는 영화의 완성은 물론 그의 영화를 칸느에 소개한 장본인이 되었다. 오슨 웰즈에 비교될 정도로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올렸지만 비탈리는 아직도 도벽을 버리지 못했다는 우울한 소식도 있다. 때문에 이름있는 영화제에서 그를 초청하기 꺼린단다.
위대한 영화가 모두 그렇듯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는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의 시점은 주인공을 정면에 배치하지도 대상화시키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처럼 기동성 있게 전경과 디테일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어와 치밀한 극영화를 완성한 비탈리의 속내는 그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하려는 데 있지 않았다.
“내가 한 이야기가 거짓말(드라마)인 것 같지, 아니야 이건 엄연한 사실(다큐멘터리)이야”라고 정색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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