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잔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정말 게을리 해야 하는 일만 빼고.”
한국은 노동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나라다. 민주노총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주 50시간으로 국제노동기구의 노동통계 연감에 잡히는 75개국 가운데 7번째로 길다. 요르단·이집트·수단·스리랑ㅋ,·마카우·터키 정도만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길다. 75개국 제조업 평균 노동시간 41.7시간보다 주당 무려 8.3시간이 더 길다. 대상을 경제협력 개발기구 가입 29개국으로 좁히면, 당연하게도(?) 한국이 단연 선두다. 그저 가장 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연간노동시간이 2,608시간으로 유일하게 연 2천 시간대를 돌파한 ‘부지런한’ 나라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말 현재 한국은 국내 총생산이 483조8천억원에 이르러 양적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 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잘사는 나라가 되어도 노동시간은 줄기는커녕 늘기만 하는 것이다. 덕분에 산업재해로 죽는 비율(중대재해율)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 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망자 수를 표시하는 만인율이 한국은 3.33으로 미국(0.05), 독일(0.80), 프랑스(0.56)는 물론 멕시코(1.20), 태국(1.17), 싱가포르(1.56)보다도 2~3배는 높다.
요컨대 한국은 자본가라면 모르겠으되 노동자가 살만한 곳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는 것에 특별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더 잘살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눈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소비한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난 충분히 자는데…’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 탄 사람들을 쳐다보기 바란다. 졸지 않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적당한 잠 경제적 효율성을 향상
‘일을 향한 격정적 사랑’은 잠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필요악’ 정도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잠은 정말 필요악일 뿐일까. 도대체 사람들은 잠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모자란 잠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저 유명한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폭발사고와 옛 소련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건은 모두 자정을 넘긴 깊은 밤에 일어났고, 그 원인은 바로 잠부족이었다. 잠이 모자라 판단력이 무뎌진 전문가들이 기계를 오작동한 탓에 사고가 났다면 한국사람들 가운데 과연 몇이나 믿으려 들까.
미국 국립수면재단(www.sleepfoundation.org) 리처드 게룰라 사무국장은 “잠 부족 탓에 초래된 직접적 생산성 저하비용은 97년 한해 미국에서만 180억 달러(20조원)에 이른다”며 “이런 보수적 계측에 잡히지 않은 실수나 위험, 건강상의 문제를 고려하면 피해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적당한 잠이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서도 좋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부지런히 살기 위해 잠시간을 줄인다. 이런 상황에서 여가를 이야기하는 건 좀 힘이 빠지는 일이다.
도대체 사람들을 이렇게 부지런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게으름은 그저 퇴치해야 할 악덕이기만 한 것일까.
사설이 길었다. 이달엔 ‘모두 함께 게을러지자’고 선동(?)할 생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으름 그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시간과 노동, 여가, 계급투쟁 등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참고 책자는 폴 라파르크가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 펴냄, 1997년)이다. 라파르크는 『자본』의 지은이인 칼 마르크스의 사위로 국제노동자연맹에 깊숙이 간여했던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자가 게으를 권리를 주장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책은 생-펠라지 교도소에 갇혀 있던 라파르크가 1883년에 지은 것으로, 한 세기도 훨씬 전에 쓰인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온갖 형태의 지적 타락을 가져오는 동시에 모든 생명체를 기형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요컨대 노동이 악덕이라는 것이다.
노동은 부르주아의 실용주의 철학에서 정당화
라파르크에 따르면, 인류가 원래부터 노동을 찬미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노동을 신성화하고, 부르주아의 실용주의 철학이 이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주장을, 풍부한 인류학적·역사학적 지식과 19세기 유럽사회에 대한 정밀한 분석으로 뒷받침한다. 예컨대 “‘구체제’(앙시앙 레짐) 아래서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일, 52일의 일요일과 38일의 공휴일을 보장했는데, 이 기간의 노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대죄로, 상공업 부르주아들이 종교에 반기를 든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게 그렇다.
라파르크에게 ‘더 많은 일자리’는 본질상 부르주아적 요구다. 그리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인권선언’ 또는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세 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하기 위해 봉기해야 한다.” ‘8시간 노동’이 아니라 ‘3시간 노동’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라파르크의 근본주의는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을까. 그는 “예술과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라고 말할 뿐, 이에 대해 명확한 답안을 내놓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더 많은 일자리’가 아닌 ‘노동시간 단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노동시간 단축은 삶의 질 제고를 기본 목표로 한 투쟁이지만, 신자유주의 바람이 거센 현실 속에서 세계 어디서나 고용안정 주장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라파르크가 보기에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은 ‘본질상 부르주아적’인 것이겠지만,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은 고용안정을 위해 더 처절하게 싸운다.
세상은 복잡하고 살기 힘겹지만, 적어도 라파르크의 ‘게으를 권리’로 주장되는, ‘노동타도’와 ‘모든 형태의 길들이기에 대한 한결같은 반대’는 가슴속에 새겨둘만하다. ‘24시간 노동체제’와 노동 중독증이 현대사회의 본질적 문제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라파르크의 주장처럼 하루 3시간 노동을 위해 싸우지는 못하지만, 주 5일(주 40시간) 노동을 위해 한국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중대한 변화다. 한가지 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대기업 조직 노동자만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를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들에게까지 뻗어가야 한다는 점 또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운동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다만 라파르크가 책의 말미에 적어놓은 부분, “(자본주의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직도 기계가 바로 인류의 구원자로, 천박한 일과 돈 때문에 하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여가와 자유를 마련해 줄 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에 대해서만은 다른 생각을 해봐야 한다. 라파르크에게도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긴 19세기 후반의 그에게 인공지능의 출현과 인간 정체성의 혼돈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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