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0년 07월 2000-07-01   1007

이제 386이라고 부르지 마라

386세대에게 어떤 시대정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 6월정신을 꼽을 것이다. 1987년 6월, 폭발적인 국민의 힘으로 공고했던 군사독재정권에 균열을 가하고, 이로써 한국사회의 다원화, 합리화, 민주화를 이룬 혁명적 사건 6월항쟁. 학생이나 노동자, 넥타이부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구리빛 팔뚝을 흔들며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수많은 사람들. 6월항쟁 13년 후 그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산다. 386세대 정치인들이 5월 광주 NHK단란주점에서 술 마신 사건이 벌어져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당했던 즈음, 현장에서 열심히 6월정신을 실천하는 세 명의 386세대를 카페 느티나무로 초대했다. 6월 14일. 그날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던 날. 단연코 화제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쏠렸다.

여영학 정말 화가 나요. 북한 사람들 일상생활이 들어 있는 책만 읽어도 이적표현물이라고 못 보게 하더니, 요즘 TV보도태도를 보면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죄 등에 다 걸리는 건 아닌지 생각되더군요. 하하하.

박혜성 저는 오늘 수업 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날이 틀림없이 중요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니 너희가 고1때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걸 잊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얘들의 반응이 무반응이에요. 군사독재시절에는 중학생들일지라도 정치문제 얘기하면 숨죽여 들었는데 요즘은 관심 갖는 애들이 없어요.

이태주 전 어제 술을 좀 마셨습니다. 87년 당시 스크럼 짜고, 닭장차에 끌려갔던 친구들끼리 오늘은 그냥 잘 수 없는 밤이다, 해서 모여 술을 마셨어요. 이 정신적 아노미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괴뢰집단으로 몰던 북한 김정일을 매너좋은 사회주의 지도자로 표현하는데…, 와 이건 예전과 180도 다른 보도 아닙니까? 이렇게 남북화해무드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생각하니 아찔하더군요.

여영학 저는 솔직히 속이 뒤틀렸습니다. 언론이나 공무원…. 저렇게 호들갑 떨 위인들이 아닌데(모두 웃음) 하는 생각에 말이죠. 사실 언론이 만드는 분위기를 타고 통일의 기운이 쉽게 다가오지만 사실상 내용없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지금 평화협정체결이나 주한미군철수 문제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 기왕지사 남북 정상이 만났으니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은 사문화돼야 한다는 것을 비롯 통일 이후 어떤 사회가 마련돼야 하는지 등등, 순안공항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마중 나올 때의 흥분됐던 감흥들을 서로 전달하고 공유하느라 정신 없다. 역시 386세대의 공감대는 정치현상 특히 통일문제에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때 찬물을 끼얹듯 4월총선에서의 386세대들의 정계진출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이태주 4월총선에서 386세대가 정치진출한 의미를 우리가 새길 필요가 있나요? 오히려 낙선운동으로 선거에 국민대중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거나 진보정당이 잔뿌리라도 내리게 됐다는 등 그런 부분을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배중 하나도 이번에 당선됐는데 그가 제도정치에 진입한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번에 정치진출한 386세대들이 6월항쟁의 정신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그들은 진보정당으로 고개를 돌렸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박혜성 정치를 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택은 그것뿐이지 않았나요? 솔직히 전 엉뚱한 구세대 정치인들보다 386세대들이 당선된 게 잘된 일 같아요. 다만 당선된 모두가 학생회장 중심의 스타들만 부각돼 지역에서 열심히 지역주민들 만나면서 지역정치활동을 했던 또다른 386세대들이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들더군요. 어쨌든 우리같은 사람이 할 일은 그들이 제대로 정치할 수 있게 감시하고, 박수치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여영학 전 시민사회단체들이 정치역량을 쌓아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입문한 386세대에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았으면 해요.

박혜성 기대를 많이 해야 압박이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지켜볼께 한번 잘해봐라, 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태주 기성 국회의원들과는 뭔가 다른 입장이 있겠죠. 그러나 초반엔 몰라도 중반 혹은 임기 말까지 가다보면 그들도 소신을 버리고 당론을 택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정당의 생리이므로. 그래서 전 당부하고 싶은 게 지금 정치에 진출한 386세대들이 뭔가 기성정치인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면 생활의 모범을 보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NHK단란주점 사건만 해도 벌써 보수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 아닙니까? 386세대들은 6월정신에 따라 작은 것부터 실천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정치적 쇼가 아니라 생활로 모범을…. 그리고 정말 열받는 건 386세대가 5월 17일 광주에서 술 마신 사건 때문에 도덕적으로 도저히 386세대들을 욕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싸잡아 386세대를 매도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 슬프더군요.

남북 정상회담으로 또 한번의 변혁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87년 6월항쟁의 주역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토론해 보았다.

이태주 저는 87년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신창동에 있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야학을 했습니다. 그때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30대, 80년대 학번의 60년대생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당시 보도블럭을 깨고, 스크럼을 짰던 사람들 중엔 대학을 다니지 않는 노동자들도 많았고, 지금은 마흔이 족히 넘었을 넥타이부대도 많았어요. 그들의 역사를 몇몇 386 정치인들이 가져가 퇴색시킨다면, 그건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하나, 6월항쟁세대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진지함인 것 같아요. 진지함에서 표출된 힘으로 싸우니 세상은 변혁되더라 뭐 이런…. 그래서 우리 세대는 사회에 참여하고, 연대해서 꾸준히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으까 싶습니다.

박혜성 386이란 숫자가 공연한 단절을 만든다고도 생각해요. 독재에 맞서 함께 항거했던 사람들이 386이란 숫자에 의해 나뉘어요. 4·19세대도 역사적 사건으로 뭉치는데 6월항쟁세대만이 386이란 숫자로 걸러진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 앞으로 386을 6월항쟁세대로 바꿔 부르죠. 6월항쟁세대의 주요한 특질은 공동체를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 사회에 대한 관심인 것같습니다. 사회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연대하고. 뭔가 사회에 기여하지 않으면 불안한…. 그런 사회참여의지를 자기가 딛은 현장에서부터 실천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여영학 80년대 저는 모든 걸 바쳐보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인권탄압하는 독재자에게 돌을 던지면서 말이죠. 그러나 지금은 같은 인권문제를 고민할 때 국가인권위원회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요. 그만큼 사회도 많이 바뀌었고, 운동의 패턴도 많이 바뀌었죠. 제가 지금 얘기하고픈 건 80년대 우리가 생각했던 삶에서 너무 동떨어져 사는 사람들 문제입니다. 너무 먹고사는 문제에 쫓겨다니는 선후배를 보면 뭔가 그들에게도 이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작은 역할을 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조선혁명을 꿈꾸었다는 세대. 단 한번도 10년 후를 기약해보지 않았다는 그들. 처음 만난 세 사람이 척척 호흡을 맞추며 6월정신을 공유한다. 세상이 변한 만큼 그들의 생각도 변했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들은 13년전 그날을 되새기며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6살 짜리 아들에게 늘 정직하게 살라고 강조하고, 그 모범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6월정신으로 살겠다는 사람들. 이 사회의 현실 속에서 공동의 문제가 생기면 먼저 고민하고, 실천하는 그들. 바로 6월항쟁이 틔운 싹이기에 그들이 더욱 거룩하고 신성하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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