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생산·소비체제의 현대 기업활동과 여러 개발정책 등으로 양산되는 각종 환경피해와 소비자피해 등이 소송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같은 분쟁에서 개인들은 그 피해의 정도가 작고 흩어져 있으며, 소송비용, 입증의 어려움 등 소송기술상의 부담이 과도해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기업이 노동자와 투자자에게 미치는 피해, 기업활동과 관련한 소비자와 지역주민에게 미치는 각종 피해, 정부나 관료기구의 전횡이 가져오는 일반시민의 대규모 피해 등 각종 집단 피해를 일괄구제하는 사법적 절차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집단이익 보호, 외국의 사법장치
집단피해의 구제를 위한 사법절차의 도입과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외국 사례는 미국의 ‘대표당사자 소송제도’(Class Action)와 독일,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이 채택하고 있는 단체소송제도(Organization Action, Verbandsklage)이다. 이 중 많이 알려져 있는 미국의 ‘대표당사자 소송제도’는 피해자 집단 중에서 집단이익을 가장 적절하게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이가 그 집단에 속하는 전원을 위해 소송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한 제도이다. 대표당사자 소송제도의 핵심적인 특징은 한 개인이 정부나 관련 이익단체의 의사와 관계없이 다수와 관련된 쟁점에 관한 소송을 강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 집단에 속하는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사전동의 없이 총원을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대표당사자소송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요건은 첫째, 피해집단에 속하는 자가 다수이고, 전원을 당사자로서 병합하기가 어려우며 둘째, 피해집단에 공통적인 법률상·사실상의 문제가 존재하고 셋째, 대표당사자의 청구 또는 항변이 그 피해집단의 전형적인 문제여야 하며 넷째, 대표자가 집단의 이익을 공정하고 적절하게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며 소송수행을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는 법원이 결정한다. 이와는 달리 ‘단체소송제도’는 환경단체 등에 환경보전과 관련된 사안의 제소권을 허용하는 것이며, 프랑스의 ‘소비자법’에서 소비자단체에 제소권을 주는 사례, 독일의 경우 개별법률에서 정한 특수 사건에 한하여 이를 허용하는 사례가 있다. 그 밖에도 행정체계에 가깝지만 스웨덴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국이 차용하는 옴부즈맨제도, 집단이익을 위해 공익대표자로 법무부장관이 관계자의 신청을 받아 제기하는 뉴질랜드의 ‘관계자 소송’(Relator Action) 등이 있다.
공청회 한번 못거치고 사문화된 집단소송법
법무부는 지난 96년 민사특별법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집단소송법 도입을 추진한 바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해 비교적 훌륭한 원안을 만들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입법예고되거나, 공청회 한번 거치지 못한 채, 사문화되고 말았다. 당시 이 법안과 미국의 대표당사자소송제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이 이 법안에 담아야 한다고 제안한 내용 중 주요 골자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확산이익의 결집이다. 공통의 이익을 가진 다수의 개별적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그 중의 1명 또는 여러 명, 기타 법령이 정하는 단체가 개별피해자들의 명시적인 의사에 의하지 않고 당사자가 되어 피해에 대한 손해보전, 가해행위 중지 등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 수행함으로써 다수인의 집단적 분쟁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소송절차의 번거로움, 소송비용의 부담 등으로 인해 개별적으로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소액다수의 흩어져 있는 집단이익을 보호하지는 취지다. 이 경우 대표당사자인 대표단체는 일정한 요건을 갖춰 법원에 소송허가를 신청하며, 법원이 이를 허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판결효력을 확장하는 것. 법원에서 집단소송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확정판결을 내리면, 판결의 효력이 원고집단에서 제외신고를 하지 않은 모든 동일피해자에게 그 효력이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판력의 확장에 대해서는 첨예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이는 아래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셋째, 소송비용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법원은 사건의 대소 또는 대표당사자나 대표단체의 자력 등을 감안하여 필요할 경우 소송비용의 예납을 유예할 수 있고, 대표당사자나 대표단체가 소송비용이 들어가는 재판을 받을 경우에는 유예된 소송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의 지급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집단소송의 원고가 되는 대표당사자나 대표단체가 대부분 경제적 약자임을 감안하여, 막대한 소송비용을 경감토록 하는 것이다. 넷째, 입증책임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소송절차에는 개략적 주장, 석명의 특칙, 직권 증거조사 등의 특칙, 당사자 신문의 특칙, 문서제출명령의 특칙, 검증·감정의 특칙, 손해배상 산정의 특칙 등을 적용하는 것이다. 일반 민사소송법의 원리는 소송 당사자가 대등하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으나, 집단소송의 유형이 될 수 있는 분쟁의 대부분은 기업집단, 관료조직, 기타 우월적 단체에 증거가 편재되어 있고, 내용을 이루는 사안의 전문성 면에서도 우월한 지위에 있다. 따라서 일반 민사소송법의 원리대로 원고측이 입증책임을 지도록 하면 소송에서 이기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특칙을 두어 입증책임을 완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집단소송제도에 대한 여러 반론
집단소송제도에 대한 반론은 여러 각도에서 제기될 수 있으나, 그 중 일반적이고 주된 반론은 첫째, 민사소송법의 기판력제도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즉 소송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까지 판결의 효력을 적용하는 것은 민사소송법의 법리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무차별 불특정 대상이 아니라, 일정한 집단의 범주를 형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판결효력이 미치게 되어 법리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역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과 기업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원에 의하여 먼저 대표자로서 당사자 적격을 허가받는 절차를 거치는 장치가 있으므로 소송이 남발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기업활동의 투명성, 정직성을 견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필요성이 제기된다 할 것이다. 오히려 집단소송법, 제조물책임법 등에 의해 경영활동이 견제받는 환경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선진기업들에 대해 경쟁력을 가지려면, 이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외국 입법례가 많지 않고, 너무 앞서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규제완화와 시장자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경영문화가 조성되고 있다면, 그 견제수단 또는 보완체계로서 집단소송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율과 견제에 의해 균형적 사회체계를 만드는 전제라 할 수 있다.
‘집단소송제도’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각종 분쟁에서 나타나는 소액 다수피해를 보호하기 위한 핵심적 사법장치이다. 또한 현행 민사소송법의 한계를 보완하는 방안으로서 그 도입이 시급하다. 정부는 지난 IMF 구제금융 당시 세계은행이 투자자 보호를 위해 차관의 조건으로 제시한 ‘증권관계집단소송제도’ 수용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국회에 제출된 이 법안은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15대 국회의 임기종료와 동시에 자동폐기되었다. 그 배경에 기업과 경제단체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갈수록 개방화되는 사회체제에서 진정한 자율성과 경쟁력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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