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아스텍 유산과 스페인 식민통치, 그리고 현대 멕시코 민주주의가 만나는 정치사회적 의미가 함축된 이 역사적 현장에는 오늘도 100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집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7월 2일 대선이 끝난 후 불과 24만 표 차이로 여당인 국민행동당(PAN) 후보 펠리페 칼데론이 승리한 것으로 발표되자 야당 후보인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가 개표부정을 이유로 재검표를 요구하면서 시작된 시위는 40여 일 동안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오브라도르 후보는 선거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며 자신이 대통령 자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해왔고, 결국 멕시코시티에서 수십 만 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시위캠프를 차렸다. 멕시코시티 주요 지역의 교통 및 행정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서다. 재검표가 마무리될 때까지 소칼로 광장과 수도를 관통하는 주요도로에 세워진 시위캠프에서 지지자들과 밤낮을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시위는 선거재판소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던 간에 시민 불복종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멕시코인들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이다.
거시경제 안정 속에 빈부격차 심화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 이후 제정된 신헌법의 한 특징은 사회부문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국가가 보장한다는 원칙이 강조되었으며 정부가 교육, 의료, 고용, 주택, 공공서비스 등의 영역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사회복지와 사회보장기구의 혜택은 사회보장프로그램에 등록된 공식부문의 노동자 등 일부계층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원의 분배가 조직된 그룹의 압력, 특히 석유와 같은 국가전략산업의 노동조합, 관료조직 또는 군대와 같은 거대 그룹의 압력에 좌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사회서비스의 영역에서 진전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도시 빈민이나 농촌지역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은 미비했다. 이들 빈곤층은 오랜 기간 제도권 밖에서 스스로 생존의 형태를 모색해야만 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멕시코는 고용증대와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호황을 누렸으나 적절한 사회 안전망을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아니,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80년대 경제위기 이후 전격 단행된 구조조정으로 거시경제는 안정되었으나 빈곤과 양극화는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와 함께 멕시코 시민사회는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개혁을 경험하면서 재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불러온 시민사회 재편
무엇보다도 구조조정은 실질임금의 하락을 유발하였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제조업 부문 실질임금은 1971~81년 사이 연평균 1.6%씩 상승했지만 구조조정기(82~95년)에는 연평균 3.4%씩 하락했다. 임금 소득의 감소는 실업률 증가와 맞물려 빈곤을 증가시키는 주된 요인이었다. 멕시코의 상대적 빈곤층은 81년 전체 인구의 48.1%였으나 구조조정이 끝난 92년 66%로 증가했다.
이때 94년 북미자유무역지대 발효와 함께 발생한 치아파스 농민 반란은 멕시코의 시민사회와 사회정책,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논쟁을 활발하게 불러일으켰다.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정책이 취하고 있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으로 인해 미진했지만 그나마 존재했던 기존의 사회안전망이 현저히 약화된 점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멕시코에서 가장 어려웠던 구조조정기(83~89년)에 연평균 GDP의 6%씩 사회지출이 감소한 바 있다. 동시에 건전한 발전모델의 부재와 사회지표의 악화(극단적인 빈곤, 실질임금의 하락)는 사회적 불만을 당연히 촉발시켰고 비폭력적인 시민행동도 다양하게 표출시켰다.
우선 80년대와 90년대에 멕시코 사회가 경험한 어려운 상황은 시민사회조직(NGO)의 증가를 가져왔다. 시민들이 절대 빈곤에 맞서 인권 수호, 시민의 자유와 평화 증진, 환경보호 등을 위한 자구적인 성격의 프로그램을 조직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재 5,0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NGO가 전국에 존재하며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조직되어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는 제도혁명당(PRI)의 71년 문민독재를 종식시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멕시코 시민사회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자극받아 다시 태어났다면 이때의 정권교체로 인해 보다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멕시코 혁명 이념을 계승하여 탄생한 제도혁명당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거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포괄하며 계파 간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내고 정권을 끊임없이 재창출하는 독점구조를 형성해왔다. 대통령 임기 6년은 대개 자파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 온갖 탈법과 독선을 자행하는 기간이었으며 다음 후보에게 안전하게 정권을 넘겨주면 되는 그만이었다. 제도혁명당은 각 지역 조직과 국영기업노조 같은 직능별 조합 조직이 떠받치고 있어 차기 선거에서 용이하게 승리할 수 있는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한 과제들
멕시코 시민사회가 풀어야할 첫 번째 과제는 권위주의 유산을 종식시키고 민주적인 개혁을 통해 성숙한 시민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2000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후 시민 사회는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으나 멕시코의 장구한 역사에 비해 그 역량은 매우 부족하다. 이런 의미에서 2006년 대선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괴리현상과 분출된 다양한 이견들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가 향후 시민사회의 성숙과 안정을 담보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멕시코의 시민사회는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를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와 규범을 다시 세우고 시민사회에서 제기된 사회 정치적 의제를 정치권에서 논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길 희망하고 있다.
둘째, 멕시코 시민사회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폭력을 종식시켜야 한다. 오늘날의 멕시코 사회에는 납치, 강도, 마약, 청소년 매춘 등이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 대도시와 지방을 불문하고 조직범죄집단이 사회적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곳이 많으며 공권력은 이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한 상황이다. 평화적인 시위 중에 경찰이 고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프락치들이 먼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경찰이 이를 빌미로 시위를 진압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때문에 평화적 시위가 전쟁으로 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어떠한 경우이든 사회적 정치적 폭력의 증가는 단순한 범죄 영역이 아니라 빈부격차와 양극화로부터 촉발된 심각한 사회적 현상이다. 이를 위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인 일자리 창출과 소득격차 해소, 복지확대에 대해 멕시코 사회와 정치권은 고민해야 한다.
셋째, 미국의 멕시코 이민자 그룹과 연계한 시민사회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현재 미국에는 40만이 넘는 멕시코계 이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어떤 방식이로든 고향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이들은 총 16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멕시코에 송금하고 있으며, 이 돈은 가족들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지역개발을 위해서도 쓰이고 있다. 또한 미국의 멕시코 이민 중 절반인 20만 명 이상이 자신의 인권 신장과 원활한 송금을 위해 고향, 인종, 직능 별로 조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에 있는 이민자 사회와 본국의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메커니즘의 개발이 매우 시급한 현실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