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수출 3000억 달러 달성 소식이 매체를 통해 널리 홍보되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대한 전망들을 내어놓기도 한다. 경제규모 12위에 대한 이야기도 낯설지 않다. 또 1996년 OECD에 가입한 지 10년이 지나 ‘선진경제’를 이룬 사회라는 이미지를 재생산하기도 한다. 경제성장률, 노동생산성 증가율 등 몇 가지 거시경제 지표를 살펴보아도 괜찮은(?) 수준으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90년대 말 IMF 경제위기 이후로 살기에 좋아진 것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한다. 외환위기를 겪었던 중남미의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20세기 후반의 20년 동안 중남미 전체 GDP는 52% 성장했다. 하지만 중남미 빈곤층은 전체 인구의 44%에 이를 정도로 계속 늘어났다. 우리나라도 수출규모나 성장률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빈곤의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 시절엔 가난해도 희망은 있었는데
빈곤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신빈곤’ 혹은 ‘사회적 배제’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하곤 한다. 과거의 빈곤과는 조금은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빈곤이 가져오는 고통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빈곤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음 사항에 대해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절대 빈곤이 아니라 상대 빈곤의 중요성이다. 이는 양극화라는 용어와도 관련된다. 장기적으로 생산력은 발달하였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의식주의 충족’은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상대적인 빈곤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이 무너졌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양극화는 단지 빈부격차의 양적 심화가 아니다. 경제적 상위층과 하위층의 분리가 심화되어 사회구성원들이 둘 중 하나로 나뉘는 양상이다. 중산층의 완충작용이 사라진다. 결국 한 사회의 통합성이 붕괴되는 것이다. 진보정치연구소가 발간한 한 보고서는 최저생계비 기준의 절대빈곤율과 중위소득 50% 기준의 상대빈곤율 격차를 다음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빈곤선 기준 설정에 따라 절대빈곤율은 불규칙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상대빈곤율은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빈곤선 설정의 부적절성 문제와 아울러 우리사회 상대빈곤의 문제, 나아가 양극화 심화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로 근로빈곤의 문제이다. 과거에 빈곤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한 데 따른 물질적 박탈의 상황에 초점을 두어 왔다. 실업과 소득 상실, 빈곤의 순환이었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직접적 단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신빈곤의 논의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도 빈곤상황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빈곤이 확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유연한 고용체제 하에서 비정규직이 확산되며 많은 사람들이 일하면서도 극단적인 저임금과 빈곤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는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한 단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는 빈곤상황을 탈피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의 확산이 낳은 결과라 하겠다.
셋째로 다차원적 박탈의 문제이다. 빈곤은 단지 경제적 차원에서의 결핍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미 사회적 차원의 배제, 문화·심리적 차원의 소외, 공간적 차원에서의 격리 등이 경제적 결핍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또한 이는 악순환 구조를 통해 빈곤을 재생산한다. 사교육, 주거 영역에서의 양극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이 다차원성과 총체성 때문에 유럽 등에서는 빈곤이 아닌 사회적 배제의 개념을 도입하고 탈배제를 위한 종합적 사회정책을 기획하여 집행하고 있다.
네 번째로 빈곤의 구조화가 공고해지고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워 보이는 양극화 구조가 구축되고 있다. 빈곤층과 부유층의 사회적 거리는 물적으로도 공고한 토대를 쌓아가고 있고 빈곤 상황은 한 번 빠져들면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구조를 심리적으로도 내면화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지금보다도 더 가난했고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수 십 년 전에 우리사회 구성원들은 힘들지만 열심히 일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희망의 절대빈곤’ 시기를 경험하였다. 지금은 비록 생존은 가능할지언정 상대적 박탈을 나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다음 세대에도 개선할 수 없다는 ‘절망의 상대빈곤 구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파이를 키워 빈곤을 잡는다고
21세기 초반 우리사회의 현실 화두는 선진경제라기보다는 분명 양극화이어야 할 것이다. 몇몇 산술적 수치로 국민의 생활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심지어는 우리사회의 (절대)빈곤율 지표마저도 빈곤의 기준이 되는 법정 최저생계비를 비현실적으로 낮게 책정함으로써 빈곤문제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있다. 과거의 빈곤개념으로 바라볼 때, 현재의 신빈곤은 스스로를 감추는데 능숙하다. 거시경제지표 몇 가지로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의 신산함을 감추려 해서도 안 되고 감출 수도 없다.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성장만 강조하는 것은 이 고통을 감추려는 것일 뿐이다. 파이를 키운다 하여 절대 신빈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극화와 신빈곤이 가지는 사회적 구조를 감춘 채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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