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8년 09월 2008-08-06   1321

저항이 창조를 만나다

<참여사회>8월호 특집_촛불 이전과 이후

저항이 창조를 만나다

촛불항쟁의 미학적 의미

이명원 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racan@hanmail.net

‘자기보존’ 욕망에서 타자에 대한 ‘윤리’로 진화

진행 중인 촛불항쟁을 결정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여중고생들이 시작한 촛불항쟁의 초보적인 문제제기조차 해결된 것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촛불항쟁의 진행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브레이크 없는 독재적 행태 역시 변화한 것은 없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징후’에 불과하였던 이명박 정부의 독재 행태가 자못 명료한 ‘실체’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촛불이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다. 그러나 촛불 편에서는 벌써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는 물론이고, 사실상 오늘의 ‘촛불’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의 미래 전체다. ‘촛불항쟁’의 진면목은 이제부터다. 촛불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 시민사회단체들 그리고 야당을 포함한 정치세력 전체는 이제 대한민국이 어떤 지향성을 가진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전략을 세워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총괄해서 지난 촛불항쟁을 중간정리를 해보자면, 나는 이 항쟁의 의미가 참으로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에 대한 자각을 낳은 사건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윤리란 ‘타자’에 대한 주체의 내밀한 공감적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촛불항쟁의 초기국면에서는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보다는 ‘자기보존’의 문제가 중심적인 의제였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항쟁의 확산이 촉진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미친 소를 먹고 싶지 않다는 것. 특히 내 아이가 ‘광우병’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주장의 출발점은 유기체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자기보존’의 욕망에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항쟁의 초기단계에서 정부가 제기했던 괴담론이나 좌파 이념주의자의 개입과 같은 음모론은 우스꽝스런 일이며, 실제로 촛불항쟁의 초기에 우리가 목격한 것은 집회에 참여한 평범한 여중고생들이나 집회 주최단체 모두 과민할 정도로 ‘정치’의 영역과 선을 긋고자 하는 자기검열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한국에서는 ‘(제도)정치’란 말 자체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우리 삶의 전 부분에 미세하게 개입하고 있는 ‘정치적인 것’조차 우리는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할 뻔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촛불항쟁에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가능케 한 것은 무능한 이명박 정부와 우매한 조중동의 선동과 여론조작이었다. 이들 이명박 체제의 지배권력 복합체는 평범한 여중고생과 시민들을 이른바 ‘좌빨’(좌파-빨갱이의 줄임말)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상화했고, 촛불항쟁의 성격을 정권퇴진 운동으로 간주하면서(나중엔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무력탄압을 촉구하고 나섰고 과격하게 그것을 실행했다. 동시에 이문열과 조갑제를 포함한 시대에 불시착한 극우논객들, 가스통과 각목으로 무장한 극우단체들은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총’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하라는 해괴한 망언을 거듭 발설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치적인 것’과 일정하게 선을 그었던 시민들은 이런 정부와 조중동, 그 배후를 이루고 있는 극우세력들의 비이성적인 광기 앞에서, 오히려 정치적인 것에 대한 관대함과 포용력을 회복했다. 깃발의 등장을 촉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촛불항쟁을 ‘깃발시위’로 조롱한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언동이었다. 동시에 이로부터 촛불항쟁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타자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확산·진화하게 되었다. 쇠고기 문제와 함께 교육공공성, 비정규직 문제, 한반도 대운하 저지, 대의민주주의의 불구성, 의료민영화 반대와, 언론자유 수호 등 백화제방의 문제들이 명료한 중심의제로 부각된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란 나의 ‘자기보존’ 문제를 뛰어넘어, 너와 나 모두가 속해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이며, 동시에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촛불항쟁을 “스키마스크와 목총과 인터넷과 시(詩)를 가지고 싸웠던”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원주민들의 항쟁과 연관시켜, 항쟁의 의미를 높이 평가한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선생의 시각은 매우 날카로운 관점이다. 미국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인해, 멕시코 원주민들의 토착적인 문화와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것에 대항해 나타난 사파티스타 항쟁과 한국의 촛불항쟁은, 시장권력과 권위주의의 독주 앞에서 무엇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인가라는 근본적인 성찰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윤리적인 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새로운 집회문화의 등장

이러한 촛불항쟁의 윤리적인 방향전환 탓에, 항쟁의 전개양상 역시 시민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행동주의적 다원예술로서의 특성, 광장에서의 자발적인 축제에 동반되는 유쾌한 카니발리즘의 역동성이 돋보이는 집회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촛불항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시민적 감성의 기본형은 ‘유머’다. 이 유머는 지난 민주화시기 김지하와 같은 민중예술인들이 선보였던 『오적』에서의 ‘풍자’와 유사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넘어선 더욱 성숙한 것이다. 풍자는 ‘언어의 칼날’과 같은 것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담지하고 있는 ‘약자’가 힘은 세지만 우매한 ‘강자’를 조롱하고 격하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수사학적 전략이다. 풍자를 통해서 현실적 약자는 강자들의 상징권력을 격하시키고, 그것의 윤리적 기반을 균열시키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힘 관계에서 약자와 강자의 위치는 뒤집히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풍자가 가열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약자의 분노가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실의 힘 관계가 뒤집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얼마든지 ‘페이소스’ 또는 허무주의로 전환될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유머는 보다 어른스러운 것이다. 유머는 명백하게 어른이 아이를 보는 시선이 가능해야만 등장할 수 있는 수사법이다. 가령 물대포를 맞고 있는 청년들이 “온수! 온수! 온수!” 하고 외치거나, 전경들에게 연행되는 시민이 스스로 “닭장차 투어”를 즐기고 있다고 말하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광장의 피로에 처해 있는 시민들이 집회를 “국민 MT”로 일컫는가 하면, “너희에게 물대포가 있다면 우리에겐 물총이 있다”는 집회참가 여성들의 발랄한 행동은, 명백하게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이 공권력보다 우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에 있어서도 우월적 지위에 있는 시민임을 자각했기에 가능한 수사학-행동이다. 이것은 민주화시기 운동엘리트들(전위)의 비장한 희생정신과 영웅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집단 감수성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 촛불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민중적 전통 속에 잠재되어 있던 풀뿌리 민주주의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생산적인 접속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사실 촛불항쟁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포함한 집행기구는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시민들은 ‘인식’한다. 집회 초기 여중고생들의 시위 양상이나 이후 진행된 집회의 변개 양상에서도 볼 수 있듯, 촛불집회의 주된 내용을 이룬 것은 시민들의 ‘자유발언’이었다. 기왕의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의 집회방식은 연대단체의 대표자나 지도부가 의제를 던져놓고 그것을 설명하는 데 멈추지만, 이번 촛불항쟁에서 시민들은 스스로의 발언권을 더욱 확대하고자 했다. 촛불집회의 형식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구한말의 ‘만민공동회’를 연상했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번의 집회방식이 잊혔던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 민주주의 모델인 ‘두레’ 및 ‘민회(民會)’, 더 나아가서는 동학의 ‘집강소’ 모델과 같은 직접 민주주의 모델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번 촛불항쟁에서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은 ‘주권’의 범주를 제도민주주의 영역에 한정시키지 않고, 나날의 시장영역으로까지 확산시킨 점에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촛불항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카페모임과 공동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밝혔다. ‘소울 드레서’ ‘82쿡’ ‘유머차부대’ ‘마이클럽’과 같은 시장영역에서의 ‘취미공동체’가 정치주권의 문제를 소비주권의 문제와 결합시켜,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성감대’라 할 수 있는 상품의 소비·불매 문제를 직접민주주의 의제와 결합시켰던 것이다. 조중동 불매운동과 광고주 칭찬하기 운동, 경향·한겨레를 포함한 포지티브한 광고를 통한 참언론 살리기 운동 등이 그것이다. 내 판단에 이것은 단순한 ‘소비자 운동’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시장이라는 체제에서 어떤 상품을 선택·불매한다는 것은, 정치시장에서 어떤 정치인을 소비·불매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의 투표행위와 등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장 영역에서의 소비·불매 운동은 ‘나날의 민주주의’의 체질화라는 점에서, 더욱 뜻 깊은 의식의 진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통해 내 견해를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다.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 공간의 접속과 공진화

이와 함께, 인터넷 다음 토론방인 ‘아고라’의 전면적인 개화는 이번 촛불항쟁의 최대의 특이점이라 볼 수 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는 별도로 아고라는 촛불항쟁의 성격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아고라의 ‘국민청원’을 통해서 ‘안단테’라는 닉네임의 고등학생이 이명박의 탄핵을 촉구하고 그것이 130만 명에 이르는 서명을 이끌어냄으로써, 촛불항쟁에 대한 저변의 뜨거운 문제의식이 분출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동시에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토론광장을 통해서, 이번 촛불항쟁의 의미와 이명박 정부가 노정하고 있는 정치적 향방에 대한 다채로운 의제들이 검토·비판되고, 촛불항쟁의 개입전략과 방법론 등이 논의되는 것을 보면서, 참다운 의미에서의 직접민주주의의 출현가능성과 네티즌 자신에 의한 ‘그림자 정부’(또는 아고라당, 시민주권 선언 등)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고라의 출현에 접하여 많은 수의 지식인들은 이를 ‘집단지성’의 현 실태로 평가하기도 했는데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고라 내부에서도 열띤 논의가 진행된 바 있지만, 아고라의 중요성은 사이버 광장의 토론 동력이 광화문과 시청이라는 현실의 광장과 만나, 격렬한 폭발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와 현실공간의 접속과 공진화라는 현상이 그것이다. 즉 아고라 공간의 ‘잠재성’이 광장의 ‘현실성’과 접속해, 촛불항쟁이라는 행위를 통해 공진화(共進化, 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진화함)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촛불항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번 촛불항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가장 흥미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로서 나는 인터넷 생방송 또한 들고 싶다. 이번 촛불항쟁을 계기로 우리는 시위의 전 과정을 다채로운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눈’을 갖게 되었다. 오마이뉴스와 칼라TV, 그리고 민중의소리와 같은 언론사-정당의 방송과 함께,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프리카 TV를 통해서 시위의 현장을 목전에서 증언하던 시민 VJ, 그리고 시민기자단 등의 ‘미디어 행동주의’의 개화다. 이러한 미디어 행동주의를 통해서, 과거라면 정보소통에서 검열되거나 차단되었을 경찰의 폭력성과 집회참가 시민의 정당성이 생생하게 확인될 수 있었고, 한국에서의 촛불항쟁이 전세계에 송출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촛불집회를 지구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미국과 일본, 호주와 남미를 포함해 전 지구적으로 산재해 있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촛불항쟁에 각각의 장소에서 동시에 참여하게 만드는 계기를 이루었다. 동시에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 시위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일반시민들 역시 생방송을 보며 ‘촛불항쟁’에 대한 정부당국의 왜곡과 은폐, 조중동을 포함한 비대언론들의 여론조작의 실체를 생생하게 확인하면서, 언론의 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예각화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호혜와 평등, 나눔과 연대의 체험

이런 사실 말고도 촛불항쟁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발견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정부와 조중동이 ‘무법천지’라고 폭력적인 언설을 일삼고 있는 광장에서의 체험이야말로, 항쟁에 참여한 시민의 편에서는 호혜와 평등, 나눔과 연대라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가치를 절실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공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자동차가 점령하고 있는 거리를 광장의 주인인 시민들이 앉아서 평화롭게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감각적 쾌적함, 수개월에 걸친 집회과정 속에서 확인된 ‘촛불다방’과 ‘김밥부대’ 그리고 ‘다인아빠’의 포장마차와 같은 물과 먹을거리를 호혜적으로 나누는 데서 오는 인간적인 소통과 연대의 체험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가 요구하는 ‘경제동물’로서의 비인간적인 논리에 질식했던, 진정으로 사람다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광장의 시민들에게 공감각적으로 회복시킨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촛불항쟁이 진행되고 있는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이고, 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있는 시민들의 궤적과 이미지들은 너무나 충만한 의미들로 가득한 것이어서, 그것을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촛불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그것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무질서 속의 기묘한 조화감은 그 자체가, 기왕의 예술적 장르감각으로는 표현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행동주의적 다원예술이며, 장르적 관습과 관념에 갇히지 않은 ‘생성적인 텍스트’이다. 이 생성적인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증폭시키는 몫은 집회에 참가한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항쟁에 깃든 윤리와 아름다움이다.

촛불항쟁에 거듭 참여하면서 시민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에 대한 공동체적 윤리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의 인간다운 삶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듭 떠올리고 있다. 촛불항쟁은 ‘미친 소’에 대한 공포에서 촉발되었지만, 그 한계를 단번에 뛰어넘어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윤리와 인간이라면 근원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끈질긴 인문적 욕망을 공감각적으로 진화시켜왔다.

이 부분에서 시민과 지식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들의 미래전망과 관련하여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지구화된 위험조건의 비가역적인 증대 속에서 우리들이 공동체 상호간의 호혜적 관계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생존을 뛰어넘어 영적이고 초월적인 비전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핵심적인 가치는 무엇으로 정리될 수 있는가. 이명박 정권의 존속여부와 무관하게, 지난 100여 년간 한국사회가 달려온 근대주의의 파국을 눈앞에 둔 우리가 시급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고민해야 될 미래전망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촛불항쟁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다시금 던지고 있다. 필사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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